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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도 훨씬 지난 기사를 알게 된 것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서였다. 사람들은 SNS에서 신문기사를 공유하며 자신들의 불편한 감정을 표현했다. 문제의 주인공은 각종 방송, 팟캐스트 등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대중 철학자' 강신주다.

문제가 된 것은 강신주 박사가 2012년 4월 <중앙일보>에 기고한 '수치심은 정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 관련기사 보기 )라는 제목의 글이다. 2012년에 작성한 글이 지금에야 화제가 되는 것은 아마도 기사의 내용이 강신주 박사의 신간(<감정수업>, 민음사, 2013)에도 그대로 실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사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치욕은 우리가 부끄러운 행위를 할 때 느끼는 감정이며, 수치는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추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억제하는 감정이다. 우리가 수치심을 느낄 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행동도 강하게 반성하게 된다. 마비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깨울 수 있는 것은 수치심이다.

사람들이 이 기사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강신주 박사가 기사의 앞부분에서 노숙인을 수치심이 없는 사람들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해당 기사를 보면, 강신주 박사의 눈에는 서울역에 있는 노숙인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어 있"는 "강시 혹은 좀비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노숙인들은 "서울역을 지나다니는 일반 시민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의식하는 일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자존심을 느낀다면 어떻게 노숙자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는 그는 "어떻게 해야 노숙자를 하나의 인격자로 깨울 수 있을까? 아니, 어느 순간 노숙자는 자존심을 가진 인간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노숙인은 수치심이 없어서 노숙을 할까

 '대중 철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강신주 박사의 노숙인 비하 발언은 최근 SNS 상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대중 철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강신주 박사의 노숙인 비하 발언은 최근 SNS 상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 트위터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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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에게 수치심이 없다고 하는 강신주 박사의 언급에는 다음과 같은 추론이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것은 충분히 치욕감을 느낄 만한 행동이다. 이러한 행동을 억제하는 것은 수치심이다. 수치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고 수치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행동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노숙인들이 서울역에서 아무렇지 않게 노숙하는 것은 그들이 수치심이 없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가 빠져 있다. 수치심이 있지만 치욕스러울 만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치욕스러울 만한 행동을 한다는 것만 가지고 그 사람이 수치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나는 예전에 파업 중인 건설 노동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은 자신과 동료들이 왜 파업을 하는지에 설명하며 열악한 노동 조건에 대해 말했다. 공사장에 있는 노동자를 위한 시설(화장실, 식당 등)은 공사가 끝나면 모두 없애야 하기 때문에 사장은 최소한만 만들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수백 명이 일하는 건설현장에 화장실은 간이화장실 한 개뿐이었다. 건설 노동자들은 오줌을 바지에 쌀 수도 없고 인근 건물에서 해결할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공사장 구석에서 노상방뇨를 했다.

어느 날 그분이 공사장 구석에서 노상방뇨를 하는데, 지나가던 어떤 어머니가 자식에게 "어려서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저렇게 된다"라고 말하는 것을 어쩌다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 노동자는 그때 느낀 치욕감을 나에게 말했다. 이 경우 노동자의 수치심은 치욕스러울 만한 행동을 하지 않게끔 하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을 노숙인에게 적용한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것은 충분히 치욕스러울 만한 행동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노숙인에게 수치심이 없다고 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수치심이 정말 문제가 되는 경우

사실, 수치심을 주제로 하는 글을 쓰기 위해 언급할 만한 행동은 기차역에서 노숙하는 것 말고도 정말 많다. 위장전입을 한다거나, 논문을 표절한다거나, 뇌물을 받는다거나, 선거에서 상대 후보를 근거 없이 비방한다거나, 본인은 온갖 불법을 저질러 놓고 기자들 앞에서 "대한민국이 정직해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거나, 이상한 금융회사를 세워서 선량한 사람들의 돈을 교묘하게 가로챈다거나, 본인이 살 사저를 아들 이름으로 등기한다거나, 하여간 찾아보면 정말 많을 것이다.

수치심이 문제가 되는 것은 치욕스러울 만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조건이 충분했는데도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경우이다. 고위층, 권력자, 재력가가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수치심을 주제로 글을 쓰기 위해 누군가를 언급해야 했다면 한국사회의 가장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을 언급하는 것이 적절했을 것이다. 그것이 힘들다면 그 밑의 층을, 그것도 힘들다면 두루뭉술하게 언급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강신주 박사가 언급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인 노숙인이었다. 이들은 강신주 박사에게 명예훼손 소송을 걸지 못할 것이고 그의 글을 내리라고 신문사에 압력을 넣지도 못할 것이다.

나는 강신주 박사가 한양대에서 한 강연을 기억한다. 그날 강연에서 그는 '인(仁)' 개념에 대해, 인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신주 박사는 자본주의가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한다고 설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에서 가장 바깥으로 밀려난 노숙인들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했다. 그는 적어도 노숙인의 아픔은 느끼지 못하는 듯 보인다.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 추모제가 22일 오후 동대구역 무료급식소에서 열렸다.
 지난 2012년 12월 말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 추모제가 동대구역 무료급식소에서 열렸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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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워할 것은 노숙인이 수치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수치심을 가진 사람이 치욕스러울 만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사회구조다. 개인의 문제가 모두 사회구조의 결함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노숙인의 증가에는 상당 부분 사회적인 요인이 개입한다.

1997년 IMF 이후 노숙인이 급증한 것은 갑자기 사람들의 수치심이 낮아졌기 때문이 아니다. 경제위기에 따른 실직과 해고, 가정 붕괴가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노숙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강신주 박사는 그들이 노숙하는 원인을 한 개인의 수치심으로만 돌린다. 여기에서 어떠한 사회적인 요소도 고려하지 않는다. 강신주 박사의 글에서 느끼는 불편함에는 약자에 대한 조롱과 더불어 사회적 책임을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사회문제에 대한 몰이해도 한몫하는 것 같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 중 강신주 박사만큼 한국 사회에 근본적인 비판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무상 급식을 주장해도 좌파로 매도당하는 나라에서 강신주 박사는 공중파에 나와서 자본주의를 거부해야 한다고 대놓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무력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거대 담론이지만 정작 사회 문제는 모두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그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수준은 "가정에서 냉장고를 없애는 것" 정도이다( 관련기사 보기 ).

덧붙이는 글 | 김범용 기자는 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원생입니다. 이 글은 장애인언론 <비마이너>(http://beminor.com)에도 게재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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