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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삶의 터전이 되어주었던 시절을 뒤로 하고 앙상한 뼈대만 남아있는 폐가가 쓸쓸하다.
▲ 폐가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 되어주었던 시절을 뒤로 하고 앙상한 뼈대만 남아있는 폐가가 쓸쓸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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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간여를 달려 익산 황등에 다달았다. 돌로 유명한 황등, 황등에 들어서기 전 자동차도로에서 바라보니 여기저기 돌무더기가 쌓여있다. 1984년, 그곳을 들른 적이 있으니 거반 30년 만에 찾은 것이다.

초입 도로변에 폐가가 있다. 블럭에 황토흙을 바른 흔적이 남아있는 엉성한 집, 무너진 흔적 속에 스레트가 있는 것으로 보아 스레트 지붕을 한 허름한 집이었을 것이다.

누가 살았으며, 어떤 연유로 이곳을 떠난 것일까? 부디 잘 되어 그곳을 떠난 것이면 좋겠다.

사람을 살리는 일

사람이 떠난 곳에 풀들이 자라나고 꽃들이 자라나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 폐가 사람이 떠난 곳에 풀들이 자라나고 꽃들이 자라나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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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떠난 그곳엔 풀들이 살림을 차렸다. 허물어진 것들에 기대어 피어난 생명, 집이 허물어진 자리에 햇살이 들자 땅 속에 숨어있던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자라났을 것이다.

생명은 참으로 끈질긴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생명력으로 끈질기게 피어나는 들풀들의 생명력을 닮은 것이 사람의 생명력이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므로.

제초제에 죽어가는 들풀처럼, 경쟁사회에서 사람들도 죽어간다. 경쟁이 제초제인 셈이다. 생명농업을 통해서 땅을 살리는 일, 먹을 거리를 살리는 일은 화학약품을 멀리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사람을 살리는 일은 화학약품보다도 독한 경쟁 사회의 구조를 깨뜨리는 일일 것이다.

그곳을 떠나야만 했던 이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떠날 때 더 좋은 곳으로 떠났으면 좋겠다.
▲ 폐가 그곳을 떠나야만 했던 이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떠날 때 더 좋은 곳으로 떠났으면 좋겠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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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을 떠나고 중소도시를 떠나 도시로 도시로 향한다. 삶의 기반이 흔들리기 때문이기도 하고, 모든 것이 도시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고만고만한 도시라도 자생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궂이 도시로 몰려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도시엔 사람이 넘쳐나지만, 넘쳐나는 만큼 힘겨운 삶을 강요당한다. 도시의 삶이 농촌의 삶보다 편리할지는 몰라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할 수만 있다면, 그래도 도시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을 위한 지름길일 것이다.

어긋난 기왓장과 폐가 모두 을씨년 스러운 겨울의 모습과 어우러져 더 쓸쓸하다.
▲ 폐가 어긋난 기왓장과 폐가 모두 을씨년 스러운 겨울의 모습과 어우러져 더 쓸쓸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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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쓸쓸하고 아련했다. 차가운 바람과 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남도의 하늘까지 뿌옇게 만든 미세먼지 때문에 더 쓸쓸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추운 겨울이면 하늘도 쨍하니 얼은 듯 푸르렀던 시간들이 있었는데, 이젠 도시의 하늘이나 시골의 하늘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일까?

눈이 따끔거린다. 단지 아련한 때문이 아니라, 미세먼지 때문이라 생각하니 숨 쉬는 것조차도 불편하다.

어긋난 기왓장에서 본 생명의 기운

폐가의 지붕을 타고 꽃 피웠을 나팔꽃의 흔적이 남아있다. 봄에 저 씨앗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어날 것이다.
▲ 폐가 폐가의 지붕을 타고 꽃 피웠을 나팔꽃의 흔적이 남아있다. 봄에 저 씨앗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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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난 기왓장, 다 허물어진 기왓장에서 생명의 기운을 본다. 그랬구나. 지난 봄에 싹을 내고, 부지런히 자라, 여름에 나팔꽃을 피우고, 가을에 씨앗을 맺었구나. 보나마다 내년 봄이면 그 자리에서 또 꽃을 피우겠구나.

폐가에서 생명의 기운을 본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을 준다. 그렇게 사람이 떠난 곳은 쓸쓸한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정미소, 곳곳에 세월의 무게가 새겨져있다.
▲ 정미소 오랜만에 만난 정미소, 곳곳에 세월의 무게가 새겨져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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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더 시내 쪽으로 들어가자 황등성당 맞은 편 쪽에 정미소가 보인다. 어릴적 봐왔던 방앗간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 이곳은 그래도 평야지대요, 곡창지대니 내가 자랐던 서울 변두리의 방앗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정미소의 벽이나 지붕 할 것 없이 세월의 흔적을 새겼다. 곧 쓰러질 것만 같은 정미소에서 농촌의 현실을 본다. 농촌이 피폐화하면 우리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런데 아직도 농촌의 존재, 기본적인 먹을거리인 쌀을 생산하는 농사의 중요성은 간과되고 있다.

쌀 한 톨의 생명으로 살아가건만 쌀 한 톨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니 헛똑똑이다.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있는 정미소
▲ 정미소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있는 정미소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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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미소 조차도 별반 의미가 없어져 폐가가 된다면, 우리는 과연 수입쌀로도 넉넉하게 살 수 있는 것일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삶의 기본이 되는 먹을거리를 생산해 내지 못하는 나라의 미래가 밝을까? 쌀이 자라던 논들은 하나 둘씩 메워지고, 농사를 짓던 이들은 생산비에도 못미치는 농사일에 진저리를 내고, 차라리 농사를 짓지 않는 편이 나은 현실은 우리의 미래를 얼마나 암울하게 하는 징조인가?

정미소 안에서 바라본 지붕이 엉성하다. 본래 이렇게 엉성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 정미소 정미소 안에서 바라본 지붕이 엉성하다. 본래 이렇게 엉성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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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소 안에서 지붕을 바라보니 사방팔방 엉성하기만 하다. 정미를 할 때 나는 먼지들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저렇게 만든 것이리라. 저렇게 엉성해도 폭우에도 작업을 하는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엉성한 것의 이유를 본다. 익산 황등의 길가의 건물들도 도시의 건물을 빼박았다. 낮다는 것 외에는 대부분이 성냥갑 같이 네모반듯하다. 그 네모반듯한 건축양식이 우리네 건축양식이 아닐터인데, 언제부터 이렇게 획일적인 집짓기가 시작된 것일까?

차라이 삐짝하고 엉성한, 그래서 언제 쓰러질지 모를 비대칭형의 정미소가 훨씬 정감있게 다가온다.

남아있는 이들이나 떠난 이들 모두 아프다

페가의 스레트 지붕과 서까래, 백열전구를 끼었음직한 전선 줄 하나가 쓸쓸하다.
▲ 폐가 페가의 스레트 지붕과 서까래, 백열전구를 끼었음직한 전선 줄 하나가 쓸쓸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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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에 가기 위해 도로변에서 주택가 뒷골목으로 들어가니 듬성듬성 여유가 있다. 텃밭도 있고, 제법 큰 밭도 있고, 자그만한 야산도 있다. 그 한 켠엔, 축사로 쓰였음직한 건물 하나가 스레이트 지붕에 뼈대만 간직한 채 남아있다.

이 또한 쓸쓸하다. 시골의 쓸쓸한 풍경은 도시인의 속내일 것 같다. 무언가를 찾아 도시로 떠났지만, 그 마음을 채우지 못하고, 혹은 비우지 못해 쓸쓸한 그 마음의 풍경을 그려보라면 이런 풍경이 아닐까 싶다.

남아있는 이들이나 떠난 이들이나 모두 아픈 것이 아닐까?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길, 가로등 불빛만 환하게 빛나고 황등 시내는 일찌감치 침묵에 젖어들었다. 밤하늘을 바라보니, 미세먼지에도 불구하고 별이 보인다. 그래도 아직 시골의 하늘은 서울 하늘과 다르구나 싶다.

도시가 아닌, 저 변방들도 모두 사람 살만한 세상이면 좋겠다.


태그:#폐가, #정미소, #도시, #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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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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