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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씨의 출근시간은 오전 9시.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늦어도 오전 8시 15분에는 회사로 가는 버스를 타야 간신히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어린이집이 문을 여는 시간은 8시 30분이다.

직장과 어린이집 사이의 그 15분은 사실 아주 사소한 시간이다. 하지만 양육자들은 바로 그 사소한 15분 때문에 삶이 바뀐다. 그 15분 때문에 어떤 이는 어린이집 근처로 이직을 감행하고, 어떤 이는 어린이집 등하원을 맡길 수 있는 친정엄마네 동네로 이사를 하기 위해 무리한 대출을 받는다. 어떤 이는 결국 직장을 그만두기도 한다.

물론 직장을 그만두는 건 양육자 중에서도 대부분 '엄마'만의 이야기이긴 하다. 그리고 또 어떤 이는 아이가 자란 뒤 다시 자기 일을 찾으려고 취업을 시도하다가 이제 갈 수 있는 직장은 자신의 경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콜센터나 마트 캐셔 뿐임을 확인한다.

이 모든 일이 바로 그 15분 때문에 일어난다. 가장 사소한 15분, 하지만 가장 절실한 그 15분. 그래서였다.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진행한 양육자들의 릴레이 수다회를 <가장 사소한, 가장 절실한>으로 이름 지은 것은. 

직장맘들의 수다회를 열어 '한국 사회에서 아이 키우기'라는 매일의 미션 임파서블에 대해 수다를 한바탕 떨어보는 자리를 만들었다. 직장과 아이, 이 두 가지 시간표를 헐레벌떡 오가며 살고 있는 바쁜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토요일 오전 11시, 어렵게 모인 만큼, 그 자리들의 이야기가 참 귀했다. 그 귀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먼저 소개한다.

직장과 아이 사이에서 종종걸음 치는 일상 중에 수다회를 위한 시간을 내기란 쉽지 않았다. 드디어 수다회날 한자리에 모인 참가자들. 보조양육자가 없는 직장맘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기 위해서는 아이들에 보육교사까지 이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직장과 아이 사이에서 종종걸음 치는 일상 중에 수다회를 위한 시간을 내기란 쉽지 않았다. 드디어 수다회날 한자리에 모인 참가자들. 보조양육자가 없는 직장맘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기 위해서는 아이들에 보육교사까지 이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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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씨. 첫 아이를 보냈던 어린이집에 문제가 있었다. 문제제기를 했지만 어린이집은 달라지지 않았고 결국 어린이집을 나왔다. 둘째 아이부터는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나 퇴근시간까지 애를 봐준다는 이유로 아무 어린이집이나 보내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나마 믿을 만하다는 어린이집을 찾았고, 그 곳에 보내기 위해 근무지를 바꿨다. 

선정씨. 아이를 낳고 기르는 동안 공부하는 남편까지 뒷바라지 하며 가장으로 살았다. 지금은 남편이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혼자 애를 키우기는 마찬가지다. 나름 여성친화 인증 기업에 다니고 있지만 허울 뿐. 애 키우다 보면 직장에선 결국 찍히게 되어있다는 것이 선정씨의 결론이다.

지민씨. 입사동기 남편과 결혼해서 아이 둘을 키우고 있다. 직장 어린이집이 잘 되어 있어 애 있는 직원들끼리 근처에 모여 살며 도울 수 있는 건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엄마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일을 포기하는 동안 입사동기 남편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에 어쩐지 마음이 허전해지는 걸 감출 수 없었다.   

5시가 조마조마한 신데렐라, 직장맘

직장맘들이 모였으니 출퇴근 전쟁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법정 어린이집 운영시간은 오전 7시 30분에서 오후 7시 30분까지이고 직장인의 출퇴근시간은 보통 오전 9에서 오후 6시이다. 제도로만 보면 일-가정양립은 전혀 무리가 없다. 하지만 직장맘의 현실은 매일이 '무리'이다.

선정 : "출퇴근 시간이 9시, 6시거든요. 근데 어린이집이 등원 차를 9시 10분부터 돌려요. 8시부터 차를 보내주는 데는 아무도 없더라고요. 출근 전에 제가 애를 업고 등원을 시켰어요. 네 살 전에는 애들이 잘 못 걷잖아요 근데 나는 출근시간까지 너무 바쁘니까 업고 뛰게 되는 거죠. 비 오는 날은 비옷을 씌워서, 우산을 목이랑 어깨 사이에 끼고, 업고 가서 애를 맡기고….

물론 차도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탐탁치는 않아요. 하지만 만약에 차가 있었으면, 당장 급하니까 맡겼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문제는 선택권이 아예 없는 거예요. 또 하원 차는 오후 5시에 출발을 해요. 그러면 차가 5시에 출발해서 내 집 앞에 언제 올지 모르니까 나는 퇴근시간만 다가오면 항상 조마조마한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어린이집 근처로 이사를 했어요. 대출을 많이 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어쩔 수 없는 거죠."

지민 : "저도 퇴근시간만 되면 조마조마한 게, 오후 3, 4시가 넘으면, 일찍 마치는 엄마들이나 할머니들이 어린이집에 하나 둘씩 오잖아요. 그러니까 오후 5시쯤이면 애가 시계만 보면서 말도 못하게 울고 있는 거예요. 엄마나 할머니 비슷한 사람이 왔다 가면 우는 거죠."

'칼퇴근'은 불성실의 아이콘?

법정 보육 시간이 있지만 어린이집은 그 시간을 온전히 책임지는 분위기가 아니다. 초등학교에서 조퇴가 예외적인 경우로 인식되는 것과 비교해보면.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아이를 하원시키는 게 기준이 되어버린 보육제도의 모습은 사실 의아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굴러간다. 이렇다보니 야근이나 회식은 커녕 정시 출퇴근만이라도 해야 생활이 가능하다. 하지만 다들 안다. 그런 직장은 없다.

선정 : "저는 오전 9시 달랑달랑하게 사무실에 출근하고, 오후 6시 땡 치고 나가요. 애를 데려다 놓고 데리러 가고 해야 되니까. 근데 그걸 불성실하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저희 회사가 약간 군대식 문화가 남아있는 데라서 아침에 일찍 와서 저녁에 늦게 가는 사원에게 "일 잘하고 성실하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업무 분담을 하면, 너는 땡 치고 가니까, 죽어라고 일을 하는 게 아니니까라면서도 일은 점점 많아져요. 일 년이 지나면 일이 항상 하나씩 더 생겨나요."

캠페인에 참여한 시민이 노동시간 단축을 갈구하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캠페인에 참여한 시민이 노동시간 단축을 갈구하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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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양육자들이 겪는 문제에 대해 정부는 '일가정양립제도'로 대책을 마련했다고 한다. 일가정양립제도가 잘 되어 있는 회사를 여성친화기업으로 인증도 한다. 선정씨는 여성친화기업에 다니고 있다.

선정 : "화가 나는 게, 우리 회사는 여성친화인증기업이거든요. 그 지표에 맞춰서 회사에서 이것저것 하고 그래요. 예를 들어 직장 어린이집이 있는가 이런 지표가 있으니까 저희 회사에도 어린이집이 있어요. 근데 그게 강서구에 딱 하나 있어요. 회사 사업소가 여러 개 있는데 그중에서 딱 한 군데만 있는 거예요. 제가 다니는 사업소는 은평구에 있는데, 강서구에 있는 직장 어린이집이 무슨 소용이에요."

직장맘들의 생존법, '허허실실'

일가정양립제도는 유명무실한 가운데 야근은 기본, 언제 어디서든 회사의 필요에 자신의 삶을 맞출 수 있는 사람만을 '적절한 노동자'로 인정하는 게 기업의 현실이다. 이런 노동자를 '기준'으로 하는 조직문화와 노동환경은 아이를 돌봐야 하는 사람들을 '기준 미달'로 만들어 버린다. 뺀질거리는 직원으로 찍혀도 허허실실하기, 승진 포기하기, 가늘고 길게 버티자고 마음 먹기…, 직장맘들은 오늘도 이렇게 생존하고 있다.

선정 : "근데, 불평할 수 없는 게 대신 아침 행사나, 밤에 갑자기 생기는 행사 같은 게 있으면, 그래도 애 엄마라고 저를 빼주는 그런 게 있거든요. "애 엄마니까, 누가 대신 가 주지?"라고 상사가 한 마디 하면, 누가 대신 가주죠. 그럼 저는, "어, 정말 죄송해요, 나중에 제가 밥을 사 드릴게요" 하는 식으로. 그런 구조인 거예요. 회사에선 일단은 찍혔고, 거기에 온정주의를 더해서 이런 구조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거죠.(웃음)" 

지민 : "저희 회사는 많이 이해해 주는 편이에요. 회식도 많이 없고, (회식을)해도 늦게까지 술 먹고 그런 분위기 아니라 그냥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가고 그렇거든요. 애 데리고 갈 수 있게 분위기 나쁘지 않은 곳으로 회식 장소를 잡기도 하고. 근데 어쨌든 커리어 상으로는 문제가 생겨요. 그러니까, 중요한 일은 절대 나한테 안 떨어져요.(웃음) 뭔가 중요하고 큰 프로젝트는, 저희 신랑같이 일을 열~심히 하는, 늦게까지 일할 수 있는 사람한테 가고, 저 같은 사람한테는 안 떨어지죠.

첫째를 낳았을 때는, 그게 우울하기도 했어요. 회사 생활한 지 얼마 안 됐고, 일 욕심도 있었거든요. 임신도 그때, 계획이 아니었으니까. 정말 열심히 일해야 할 시점에 애 때문에 발목 잡힌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우리 신랑이 입사 동기 거든요. 입사 초기니까 되게 열심히 일하잖아요. 그렇게 일해서 지금 막 인정받고 하는 걸 또 보니까."

선정 : "저도 본사에 있다가, 사업소를 옮긴 제일 큰 이유가 애 때문이었어요. 본사는 일이 너무 많거든요. 지점은 본사 업무량의 2/3 정도? 본사에 있을 때, 제가 일을 굉장히 많이 한 편이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애는 아파서 막 열이 나는데 그런 애를 어린이집에 억지로 보내 놓고 울면서 출근한 적도 있고. 근데 어쨌든 야근이나 이런 건 남자 직원들보다는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중요한 일이나 성과가 확실한 일은 남자 직원들을 줘요. 이 남자 직원은 밤을 새서라도 일을 할 사람이다, 이 직원을 앞으로 키워야 된다. 이런 관점으로 남자 직원을 더 가르치고, 더 주는 거죠."

일하는 이유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들

2013년 7월에 진행한 민우회 캠페인 <애 키우기 힘든 덴 다 이유가 있다>
 2013년 7월에 진행한 민우회 캠페인 <애 키우기 힘든 덴 다 이유가 있다>
ⓒ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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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생존 전략들을 다 동원 해봐도 '버티기'는 쉽지 않다. 개인의 고군분투만으로는 유명무실한 일가정양립제도, 부실한 공보육제도, 양육기 노동자가 '기준 미달'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는 기업문화,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성역할고정관념을 한 번에 뚫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이런 구조 속에서 여성은 '엄마'가 되는 순간부터 원한다면 당연히 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일 해야 하는 이유를 늘 '증명'해야만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다.

지민 : "회사 다니면서 애 낳으면 일에 위기가 있어요. 애 낳고 나서 출산휴가 3개월 쉰 직후랑 육아휴직 끝났을 때, 그때 막 갈등하다가 많이 그만두고. 그 고비 넘기면 애 어린이집 보내놓고 적응시키고 그러면서 그런대로 지내다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한 번 더 위기가 와요. 애가 열한 시에 집에 오니까요.

그 고비도 넘기고 애가 좀 커서 중학교도 가고 그러면 이제 괜찮은가 싶다가 선생님이랑 상담을 하면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거죠. "아, 애가… 성적이 바닥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 때 또 한 번 위기. 경력상으로 봤을 때는, 초등학교 입학할 때가 중견 사원이고 애가 중학생쯤 됐을 때가, 과장이나 간부급이 됐을 때거든요. 보직을 맡고 있는 중요한 시기에 많이 그만 두게 되는 거죠."

결국은 '기준'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좀 덜 일하고 삶을 좀 더 누릴 수 있는 기준으로 노동자의 상 자체가 달라지지 않으면 어떤 일가정양립제도가 시행되든 지금과 같은 상황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노동시간 단축은 너무 먼 이야기일 뿐일까? 그렇게 체념하기엔 결국 노동시간 단축만이 해답인 상황들을 매일 너무 많이 겪는다.

보내도 마음이 불편한 어린이집

한바탕 직장 이야기가 끝나고 어린이집 이야기가 이어졌다. 어린이집은 직장과 시간도 안 맞지만, 더 큰 문제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고운 : "첫째가 다녔던 어린이집에 문제가 있었어요. 구립 어린이집이었는데. 한 엄마가 어린이집 CCTV를 본 걸 계기로 엄마들이 모여서 얘기를 했더니 너무 심각한 얘기가 나오는 거예요. 남자애 하나가 장난치면서 다른 애를 쳤는데, 그걸 훈육한다며 애들한테 돌아가면서 그 남자애를 한 대씩 때리라고 했다고도 하고. 모인 엄마들이 원장 간담회를 요청을 했어요. 동영상을 보더니 원장 선생님도 깜짝 놀라시는 거예요. 그런데도 교사가 바뀌거나 뭐 그런 후속이 없는 거예요.

도저히 이런 어린이집을 계속 보낼 수는 없었어요. 근데 어린이집을 바꾸는 게 쉽지 않잖아요. 들어가기도 너무 어려운데... 애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한 번 더 힘들 거고. 또 주변에 자리가 있는 곳이 그때 유치원 밖에 없었거든요. 구립어린이집을 보낸 건 경제적 이유가 컸는데... 그걸 포기하고 비용이 훨씬 더 드는 근처 유치원에 보내야 하는 상황이 됐으니까. 왜 우리가 이래야 돼? 그래서 구청에 신고를 한 거예요. 그런데 신고를 한 우리들 보고 다른 반 엄마들이 도리어 뭐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과정에서 처음엔 불같이 화를 내던 엄마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6명이 남았어요. 마지막까지 얘기 하다가 결국 문제제기 했던 우리만 나오면서 끝났어요. 근데 딴 데로 옮기려고 해도, 역시나,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봐줘요?" 이게 급한 거예요. 그래도 그렇게 보내서 이런 일을 겪었으니까 아이한테 필요한 어린이집을 찾겠다고 여기저기 알아보는데, 근처에는 도저히 없어서. 그래서, 이사를 했어요."

지민 : "그런데 그 정도면 부모들이 처벌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처벌을 해야죠!"

고운 : "그렇죠. 그런데 구청 직원에게 요구를 했을 때도, 구청 직원도 여기를 감싸더라고요."

지민 : "그러니까 어린이집 관리가 안 되고 있다는 거예요!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으면, 그 교사 파면뿐만 아니라 학교가 다 뒤집어 졌을 텐데. 국가가 학교를 관리하잖아요. 징계위원회같은 채널이 있어요. 참여할 수 있는 제도가 되어 있고요. 그리고 (어린이집 양육의 질이 낮은 게) 이해가 가는 게, 어린이집 교사가 대부분 20대 초반이잖아요. 박봉이고, 애가 없잖아요. 근데 우리가 애를 키워보면 내 자식이라도 사실 쥐어 박고 싶을 만큼 얄미울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육아 경험이 없는 20대 초반의 교사들이 애가 한 명도 아닌데 그 애들을 한 번 쉬지도 못하고 감당을 하다보면 당연히 그렇게 되는 거잖아요. 보육교사를 공무원으로 만들어서 안정직이 되면 전혀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 보육은 양육자의 질을 넘어설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좋은 교사를 뽑을 수 있는 제도적 완비가 되지 않으면, 그냥 원장 돈 벌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죠. 학교는 돈벌이가 아니잖아요."

2013년 1월에 방송된 <EBS 다큐프라임 행복의 조건, 복지국가를 가다 - 4부 보육>에 등장하는 프랑스 부모들은 보육기관 선택의 기준으로 모두 '거리'를 꼽았다. 어디를 보내든 보육의 질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양육자들도 바라는 것은 같다. 집에서 가까운 어느 어린이집이든 믿고 보낼 수 있는 곳이기를... 지금의 초등학교처럼 말이다. 그렇게 되려면 보육기관이 원장의 이윤을 추구하는 개인사업체에서 보육이라는 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공공기관으로 성격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보육교사 처우개선도 필수다.

자기만의 시간은 출퇴근 시간 뿐

어린이집은 믿을 수 없고 직장은 야근이 당연하다. 그래서 직장맘들은 지구에서 제일 바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자기만의 시간은 출퇴근 지하철에 앉아 있는 몇 십분이 전부이다.

고운 : "처음부터 끝까지. 그니까 애 생기는 그 순간부터는 종종거리는 마음이 생겨요. 항상 시간이 없고 단 하루도 여유가 없어요. 단 십 분이라도 여유있게 커피 한 잔 마시고 이런 거는, 직장에서 고 잠깐인데, 사실 직장 업무도 계속 늘어나고. 요즘 다 그렇잖아요. 거기다가 집부터 애까지 막~ 이렇게 되면, 그럼 당연히 마음이 조급해지고, 그러면 몸도 아프죠."

선정 : "저는 점심시간이 너~무 귀해서, 그 시간에 시장도 보고 다 하거든요. 시장도 보고, 그날의 할 일, 혹은 내가 병원에 가야 하면, 점심시간에 밥 안 먹고 그냥 병원에 가고 이렇게 (웃음) 근데 너~무 아파요. 뭐가 힘드냐고 누가 나한테 딱 물어보면,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몸이 너무 아파요~라고 얘길 할 것 같아요."

직장과 어린이집 그 사이의 죄책감

놀라운 것은 이 노고가 지지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더 놀라운 것은 오히려 비난을 받는 현실이다. 아이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엄마가 일을 해서'로 귀결되어 버린다.

선정 : "엄마들이 자주 가는 온라인 카페 게시판에 누가 '맞벌이 자녀 많이 티 나요?'라고 질문을 올렸어요. 거기 댓글에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애가 과도하게 선생님에게 애교를 피우고 관심 한 번이라도 더 받으려고 하고, 머리 모양 한 번도 안 바뀌고 똑같이 오는 애들 보면, 솔직히 엄마가 누군지 한심합니다' 이렇게 써 놓은 거예요. 근데 우리 애는 그런 애거든요. 애교가 많은 성격이라서 그렇다고 저는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보기에는 애정을 못 받아서 갈구하는 아이인 거죠."

고운 : "어린이집 선생님이 그러는 거예요. 애를 찾으러 갔는데, '어머니~ 일하시는 것도 좋은데 아이가 말을 못해요~' 이러는 거예요. 애가 말이 늦긴 했지만 그 말을 들으니까 딱 '아, 이유가 나한테 있구나' 자책하게 되는 거죠. 또 어린이집에서 애가 아프다고 전화가 오면 그 순간 멘붕이 와요. 마음이 막 급해져요. 조급해지고 어느 한 순간에 일이 너무 하기 싫은 거예요. 죄책감이 확 오면서. 내가 왜, 뭐하려고 여기 있나. 애가 아픈데, 무슨 영광을 보려고 내가 다른 애들을 가르치고 있나."

선정 : "상처가 되는 말이 하나 딱 있었어요. 3년 동안은 엄마가 출근을 하던 간에 엄마가 애를 떠안고 출근해야 한다는 거. 법륜스님도 그러셨잖아요. 애 태어나고 3년은 돌봐야 한다고. 그런 얘기를 정말 많이 들어요. 안 그러면 애가 사춘기 돼서 정서적인 문제 같은 게 나온다, 육아서를 봐도 세상의 모든 시선이 '애는 다 엄마가 키워야하는데…'를 반복하고 있고요. 마치 엄마가 애를 세 살까지 짠하고 만들어야 하고, 애가 잘 되고 못 되는 건 다 엄마 책임이야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내가 신이 아닌데… 엄마도 사람인데 그런 생각 들어요." 

고운 : "저는 한 번도 전업주부일 수가 없었어요. 경제적 상황이 그랬거든요. 둘째 낳고 3개월 쉰 거 말고는. 근데 주변에서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일하는 게 다가 아니야', '세 살까지는 엄마가 중요해', 세 살 지나니까 '이제 초등학교 올라갈 때 너무 중요해, 특히 일학년 때가 너무 중요해, 그때는 일 쉬어'. 나는 그럴 수 없는 상황인데, 포인트가 쌓이듯이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 쌓이는 거예요. 그러지 말라고 해도 이미 내 안에 계속 그게 생기는 거죠. 그래서 그런 불안감이 있어요. 애가 컸을 때 정말 전업맘 엄마랑 다르면 어떡하나. 확인 되지 않은 불안감."

아이에게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엄마만이 아니다. 그런데 세상은 다 엄마 탓이라고 말한다. 아이가 말을 못한다는 사실과 엄마가 일을 한다는 사실 사이의 관계는 증명되지 않았지만 당연한 인과관계로 인식된다. 마치 '결손가정에서 자라 범죄자가 됐다'는 식의 편견처럼 말이다.

사실 '아이의 정서가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과 '엄마가 일하느라 바쁘다'는 사실 사이에는 '아빠는 양육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숨겨져 있다. 그런데 세상은 그저 엄마를 탓한다. 그래서 하루종일 종종걸음을 치며 어린이집 하원 시간을 맞춰낸 엄마는 비난을 받고, 본인의 직장은 포기하고 아이를 일찍 데리러 가는 엄마가 당연하게 여겨진다(심지어 '칭찬 받는 것'도 아니고 '당연하다').

법정 시간을 책임지지 않는 보육기관이 아닌 그 무책임을 떠맡은 엄마를 비난하는 분위기. 그러니까 '애는 엄마가'라는 인식으로 덕을 보는 건 제도의 부실함을 엄마 탓으로 떠넘길 수 있게 된 한국의 보육제도인 셈이다.

양육자들의 릴레이 수다회 '가장 사소한, 가장 절실한' 기획은...

정책이나 제도는 참 어렵고 복잡해 보입니다. 행복이니 안심이니 좋은 말들을 앞세워 뭘 또 시행하겠다고 하면 어쩐지 회의감부터 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제도가 사람들의 삶의 틀을 결정한다는 겁니다. 페리클레스가 이런 말을 했다지요. '설령 그대가 정치에 관심이 없을지라도 정치는 그대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 예를 들어, 어린이집 문제가 그렇습니다. 지금은 민간 어린이집의 아동 학대, 운영 비리가 너무 흔한 이야기이고 민간 어린이집을 관리감독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도 큽니다

'보사부는 (...) 민간보육업자가 탁아시설을 세우거나 기존 시설을 확충할 때 필요한 자금을 장기저리로 융자해주기로 했다. 한편 보사부는 탁아시설의 설치가 쉽도록 영유아보육법 등 관계 법령을 개정해 민간보육시설의 설치인가제를 등록제로 완화하고(...)' -1994.10.6 <한겨레> 기사
 '보사부는 (...) 민간보육업자가 탁아시설을 세우거나 기존 시설을 확충할 때 필요한 자금을 장기저리로 융자해주기로 했다. 한편 보사부는 탁아시설의 설치가 쉽도록 영유아보육법 등 관계 법령을 개정해 민간보육시설의 설치인가제를 등록제로 완화하고(...)' -1994.10.6 <한겨레>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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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국에 어린이집이 처음 생기기 시작했을 때,그러니까 영유아보호법이 제정되었던 90년대 초반(1991.1.14 제정)에는 부족한 어린이집 수를 늘리기 위해서 정부에서 일일이 공적자금을 쓰기 어려우니 민간 어린이집이 많이 생길 수 있게 설치 기준을 낮추고, 관리감독을 기준도 낮추자는 요구가 컸습니다. 결국 보건복지부에서는 민간 어린이집 설치 확대를 위해 이런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 이후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아이 키우기 어려운 사회'의 핵심에 있는 "믿을 수 없는 어린이집만 많으면 뭐하냐, 믿을 수가 없는데'라는 말이 나오는 게 바로, 이 정책의 결과입니다. 십여년이 훌쩍 흐른 지금, 작년부터 중요한 보육정책들이 많이 시행되었습니다.

무상보육 대상을 모든 영유아로 확대하도록 영유아보육법이 개정되면서 보육비 지원 대상 연령이 늘었고 양육수당도 전 계층에 지원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앞에는 '안심', '행복'이라는 수식어들이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 키우는 사람들은 왜 여전히 행복하지도, 안심할 수도 없는 걸까요?

한국여성민우회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양육자들의 현실에서 찾아보고자 지난 2013년 4월~10월에 걸쳐 양육자들의 릴레이 수다회 <가장 사소한, 가장 절실한>을 진행했습니다. 총 7회에 걸친 수다회 중 일부의 후기를 이번 5번의 연재를 통해 공유합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보다 자세한 내용이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 [민우 트러블]에도 실렸음을 밝힙니다.



태그:#직장맘, #한국여성민우회, #일가정양립, #어린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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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회는 1987년 태어나 세상의 색깔들이 다채롭다는 것, 사람들의 생각들이 다양하다는 것, 그 사실이 만들어내는 두근두근한 가능성을 안고, 차별 없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세상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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