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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들어서니 날씨가 자주 흐리다. 아파트 창문 너머로 잿빛 하늘이 낮게 드리워진 도시의 건축물들은 연무에 덮여 마치 유럽의 여느 도시처럼 을씨년스럽다.

주말이라 아침 시간을 이불속에서 게으름을 피우다가 해가 중천에 떠서야 털고 일어났다. 몸을 가볍게 할 양으로 삶은 달걀 하나와 고구마 두 뿌리로 요기를 하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산행길에 나섰다.

주말은 아내와 함께 이렇게 도시 근교의 가까운 산을 찾아 몸을 푸는 것이 좋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일상화되어 어쩌다 산행을 빼먹고 한 주일을 맞으면 그 주일은 내내 허전하고 힘에 겹다.

연무와 미세먼지에 덮인 12월의 도시가 아침 늦도록 잠에게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 연무에 덮힌 도시의 아침 연무와 미세먼지에 덮인 12월의 도시가 아침 늦도록 잠에게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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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살면서〈당신에게 제주〉라는 여행집을 펴낸 고선영씨는 일상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돼 모든 것이 시큰둥하게 느껴질 때나 불현듯 다가오는 권태로움에 가슴이 답답할 때면 숲으로 간단다. 모든 것을 숲에 의지한 채 풀과 나무와 바람과 구름과 이야기하고 마음을 나누다 보면 어느새 그들의 왕성한 생명력에 위안을 얻곤 한다. 숲을 걷는다는 것은 잃어버린 어떤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9세기 자유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숫가의 숲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행선지는 금성산성이다. 담양군 금성면과 전라북도 순창군 강천사 계곡과 경계를 이루는 해발 603m의 금성산에 위치한 금성산성은 장성의 입암산성, 무주의 적상산성과 함께 호남의 3대 산성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담양리조트에 차를 세워두고 리조트 뒤편으로 난 오솔길에 접어들면 바로 등산로와 연결된다. 리조트 뒤에 조성된 수목원 주변으로 무리지어 꿈을 꾸듯 서 있는 은사시나무의 은백색 수간이 겨울 볕에 눈부시다.

가파른 나무계단을 따라 30여 분을 오르면 바로 산성 초입 보국문이다. 산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되었으며 조선태종 9년(1409년)에 개축하였단다. 임진왜란 후 1610년에 파괴된 성곽을 개수하고 내성을 구축하였으며, 1622년에 내성 안에 대장청을 건립하고 1653년에 성첩을 중수하여 견고한 병영기지로 규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치열한 싸움터가 되어 성안의 모든 시설이 불에 타 사라졌다.

1994년부터 성곽복원사업을 착수하여 외남문, 내남문, 서문, 동문을 복원하여 외남문은 보국문, 내남문은 충용문이라 명명하였으며 약 7㎞가 넘는 성곽도 함께 보수하였단다. 석축을 따라 난 등산로를 밟아 성안으로 들어서는 흙길이 편하고 정겹다. 지난밤 삭풍을 타고 내린 잔설이 마른 풀숲이며 성벽을 따라 서케처럼 내려앉아 있다.

성안에는 곡식 1만6000섬이 들어갈 수 있는 군량미 창고가 있었으며 객사, 보국사 등 10여 동의 관아와 군사시설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그것들이 자리했던 곳에는 허름한 동자암이 초라하고 고적하게 쪼그리고 있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어도

아 괴로운 이 심사를 가슴깊이 묻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 대중가요 <황성옛터>

성은 허물어져 잡목만 무성한데 폐허에 서린 회포를 까마귀 떼의 울음소리가 대신한다. 내성 깊숙이 숲은 무성하여 까마귀의 긴 울음과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에 후드득 눈꽃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 사위는 고요하다. 포근하고 쓸쓸하며 다정하고 냉정한 겨울골짜기의 풍경에 자꾸 마음이 울렁인다.

내성을 가로질러 동문으로 향하는 길은 쌓인 눈이 녹지 않아 발걸음을 옮기기가 힘겹다. 낙엽을 떨군 나무들 사이로 찬바람이 휘감고 돌아 낙목한천을 실감케 한다. 동문에서 운대봉과 연대봉, 북문으로 이어지는 길의 성 밖은 30m가 넘는 절벽으로 이루어져 천혜의 요새로 완벽한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

성을 따라 연대봉이 오르니 멀리 무등산이 운무에 싸여 신비롭다. 우측으로는 추월산과 담양호가 이백의 시처럼 단아하다. 아스라이 산등성이를 따라 앙상하게 줄지어 선 교목들의 군상이 제행무상으로 가슴을 시리게 한다.

잎을 떨구고 눈보라 속에서 앙상하게 서 있는 겨울나무들이 애잔하다.
▲ 산등성이에 늘어선 겨울나무들 잎을 떨구고 눈보라 속에서 앙상하게 서 있는 겨울나무들이 애잔하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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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길은 자꾸 꺾이는 관절에 무리를 느껴 북문에서 보국사터로 이어지는 지름길을 택했다. 길 위에 쌓인 낙엽들이 양탄자가 되어 발걸음을 가볍게 부축한다. 바람결에 서걱이는 나무와 돌돌돌 낮은 소리로 흐르는 시냇물과 조심스레 지저귀는 산새들의 노래가 하산길을 동행해준다.

매번 이렇게 산소 듬뿍 담긴 활력을 얻어 돌아가니 산과 숲이 고마울 따름이다. 이 엄동을 오늘도 칼바람을 맞으며 길거리에서 조국과 민족의 앞날을 위해, 혹은 밥벌이를 위해 분투하는 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산이 없었다면 어찌 생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태그:#금성산성, #금성산, #제행무상, #낙목한천, #겨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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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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