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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 개월 전, 나는 서울생활을 접고 지방으로 내려왔다. 내가 태어나 19년 동안 살았던 곳이 경상도지만 나는 전라도를 선택했다.

산이 있고 넓은 들판이 있는 곳에 살고 싶었으나 차가 쉬는 골목, 건물과 건물이 어깨가 닿을 듯 빽빽이 들어선 도시에 살고 있었다.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이 밀집된 주택가, 창을 열면 전선줄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산이나 바다 대신 옆집의 세간이 훤히 보이는 그런 곳에서 아침을 맞으며 보냈다. 하늘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도 넓은 하늘을 보기보다 우물 안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개구리처럼 작은 하늘만 보며 살았다.

그런 하늘을 보며 '아, 하늘이야'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아, 갇혀 있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나는 회사의 영업 실적에 대한 강요와 도시의 답답함을 벗어나기로 했다.

작년 겨울, 지금 사는 곳으로 답사를 왔었다. 지인도 만나고, 선운사라는 절도 들르고, 시간이 된다면 내가 살기에 적합한 고장인지도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버스 타고 세 시간이 걸려 내린 곳은 전북 고창이었다. 지인과 터미널 근처에 있는 낡은 다방에 들어갔다. 난로 옆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이곳에 내려와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빈집을 찾기 힘들고, 여자 혼자서 사는 건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가 자신의 집에 빈방이 있으니 그곳을 사용해도 좋다는 말을 넌지시 했다.

'이런 횡재가 또 어디 있는가.'

나는 고맙다는 말도 어떤 인사치레도 하지 않았지만, 기쁨에 그의 볼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다. 너무나 간단하고 쉽게 시골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나는 지금 전북 고창에서도 외각에 위치한 한 마을에 살고 있다. 이곳은 가구 수가 13가구다. 대부분이 노인 분들이고, 마을을 돌아다녀도 그 분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농사일로 바쁘고 집안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함께 사는 그와 나의 생활 패턴이 달라 하루의 절반은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지낸다. 나는 매일 산속에서 명상을 하는 것 같다.
 
시골 생활에 편안함을 느끼는 내게도 걱정거리가 있다. 아직도 이 고장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가는 기가 먹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사실 나는 표준말을 사용하지만 정확하지 않고, 경상도에서 자랐지만 경상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쓰거나 의미를 잘 아는 것도 아니다. 언어의 경계에 서서 이 고장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지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전라도 말을 공부하기로 했다. 이론적 공부는 아니며 생활속에서 전라도 사투리의 의미를 알아가기로 했다. 이 결정을 하게 된 하나의 사건이 있다.

수선화가 피던 사월, 지인이 나를 위해 고창 읍내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의 배려에 감사했고 무조건 따라 가기로 했다. 그는 삼 분 만에 외출 준비를 끝냈지만 나는 삼십 분이 지나도록 외출준비를 했다. 그는 마당을 오가며 계속 "가게"를 외쳤다. 나는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 했다고 생각했다. 또다시 그 말이 들려왔다.

"가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가게를 가자는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필요한 물건을 사야 하니까 다이소 같은 가게를 갈까, 아니면 이곳 사람들의 패션 스타일을 알아보는 것도 재밌으니까 옷가게를 갈까, 아니면 장보기가 힘드니까 간식거리 사러 마트를 갈까, 그것도 아니면 잡화가게를 갈까. 내 머리 위로 수많은 가게들이 풍선처럼 둥둥 떠 있다.

나는 어떤 가게를 가야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마당을 나오면서 그에게 구멍가게를 먼저 들러야 한다고 말했다.

"돌아다니면 배가 고프니까 구멍가게부터 들러요. 그리고 다음 갈 곳을 정하죠."

그는 내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 했는지 웃으며 마당을 서성이기만 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너무 먹는 것을 밝혔나? 에이, 그냥 어떤 가게를 가자고 먼저 말해주면 좋으련만... 타인에 대한 배려가 너무 지나치신 분이야.'

마당을 둘러보던 그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가게?"

가게를 자꾸 말하시는 걸 보면 내게 선택권을 주고 싶으신 게 확실했다. 나는 가야 할 곳이 많아 어떤 가게를 갈지 못 정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차를 타고 가면서 결정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여 가게?"
"어떤 가게를 갈지는 차를 타고 가면서 정하기로 해요."
"잉?"

그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의 의미를 모른 채 차를 타고 가는 내내 고민했다. 그는 분명 나의 말을 듣고 놀라며 "잉?"이라고 했다.

'이건 또 뭐지? 아직 결정을 안 한 것에 놀랐다는 것일까? 아니면 갑자기 멋지게 차려 입은 나를 보고 놀랐다는 뜻일까?'

궁금증을 풀지 못한 채 고창 읍내에 도착했다. 그는 나를 데리고 어떤 가게도 가지 않았다. 옛 성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모양성으로 갔다. 차에서 내린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모양성을 향해 걸어가다 뒤돌아 나를 향해 소리쳤다.

"가게?"

우리는 모양성을 둘러보고 다시 차로 이동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가게'에 대한 어떤 말도 하지 않는 그가 얄미웠다. 내가 먼저 이곳으로 가자, 저곳으로 가자고 부추기기도 싫었다. 나는 차창에 얼굴을 대고 밖만 내다보았다.

'아, 가게들이 다가온다. 어, 가게들이 멀어져 간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지락 칼국수 집이었다. 모양성을 도는 내내 추위에 떨었던 나는 햇살이 드는 곳에 앉기 위해 부부가 앉은 옆 테이블로 갔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우리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나는 '가게'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생각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던 것일까? 음식이 내 앞에 놓인 것도 모르다 바지락이 뿜어내는 바다 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오는 순간에야 고개를 들고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숟가락으로 바지락을 하나 집어내는 순간 '가게'라는 단어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편이 아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게."

그 말을 들은 아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남편을 따라 식당 밖으로 나갔다. 나는 바지락 속살을 뜯어 먹으며 킥킥 거렸다. 그가 웃는 이유를 물었지만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식사하는 내내 웃음이 나와 입을 막아야 했고, 그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식사가 끝나자 웃옷을 걸치고 재빨리 식당 문 입구 앞에 섰다. 그리고 계산을 하고 돌아서는 그를 향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게!"


태그:#가게, #모양성, #바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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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경의로움에 고개를 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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