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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앗간 문지방은 사람보다 자루가 먼저 넘는다.

들일이 대충 갈무리되면 어머니들만의 수확이 시작된다. 틈틈이 심고, 매고, 털고, 얼맹이로 일어 깔끔하게 담아놓은 들깨와 한해 양념으로 결코 빠져서는 안될 고추. 그리고 엿기름과 드물지만 산골 아낙이 가져 오는 말린 도토리까지 이것저것 자루들이 줄을 지어 방앗간 문턱을 넘는다. 어머니들은 늘 자루부터 문지방 너머로 밀어넣고 그제서야 허리를 편다.

기름틀 속에서 막 짠 들기름이 병 속에 담기고, 어머니들은 기름이 얼마만큼 났는지 시선을 떼지 못한다.
 기름틀 속에서 막 짠 들기름이 병 속에 담기고, 어머니들은 기름이 얼마만큼 났는지 시선을 떼지 못한다.
ⓒ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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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역전장 초입에 있는 태양방앗간은 그 자리에서 반 세기가 훨씬 넘는 세월을 지켜오고 있다. 주인도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바뀌었고, 단골들 또한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이어졌다. 새댁이 아낙이 되고 할머니가 된 세월이다.

기름틀 앞에는 오래돼 반질반질한 평상이 놓여 있고, 어머니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기름짜는 순서를 기다린다. 평상 위엔 주인의 배려로 전기 판넬까지 깔려 있다. 거기에 앉아 나누는 세상 얘기에 어머니들은 때때로 소녀처럼 웃는다.

고춧가루는 금세 빻아 가지만 들기름은 오랫동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기다려야 한다. 그러다보면 고추며 들깨며 품평이 나오게 마련. 자식자랑이나 농사자랑은 매한가지, 주인이 먼저 추이는 법이 없다.

"하이고, 고추 빛깔 참 좋다"하면 "그 짝 게 더 좋네유 뭐"하면서도 기분이 으쓱해진다. 물건 보는 눈으로 치면, 방앗간 주인아주머니가 도사일 텐데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끼어드는 법이 없다.

기름틀 속에 고인 기름이 주전자로 쏟아질 땐 모두 조용해진다. 평상 위의 어머니들은 너나 없이 그쪽으로 허리를 굽혀 시선을 고정시킨다. 정적 속에 들기름이 고소한 향기를 풍기며 플라스틱병을 한병 두병 채워간다.

"올해 깨가 지름 나는 게 어째 작년만 못혀."

들기름병을 다섯 개 하고도 반이나 챙기면서도 어머니는 못내 서운한 눈치다. "웬 기름을 이렇게 많이 짜냐"고 물으니 "아들 주고, 딸도 주고, 나도 먹을라믄 많치도 않혀"라고 답한다. 어머니의 말 중에 주는 순서가 되새겨진다. 1번이 아들이고, 2번이 딸, 그리고 마지막이 자신이다.

"사진좀 한방 찍자"고 카메라를 드니 "시방 늘근 얼굴은 찍어서 뭣허게, 괜히 돈만 든다"며 손사래를 치고는 냅다 돌아앉아 "깔깔깔" 웃는다. 새댁에서 아낙으로 그리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가 되기까지 텃밭을 지켜온 우리 어머니들 인생엔 언제나 고소한 향기가 묻어난다.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신문>과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방앗간, #태양방앗간, #기름틀, #예산군 역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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