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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방어는 가장 신속한 공격이라는 말이 있다. 국정원과 국군기무사령관의 대선 개입 의혹은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다.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적극적이고 선도적으로 '공격'이라는 선택지를 결정했다. '법대로'를 빌미로 법외노조를 만들어버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문제가 대표적이다.

전교조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란 사실은 작년 대통령 선거 토론회에서 이미 정해졌다. 이는 당시 그 강력한 '레이저 광선'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게 내던진 한 마디, "전교조와 친하시죠"가 웅변한다.

문제의 관건은 시기였다. 마침 국가 기관의 대선 개입 문제가 정국의 핵으로 부상했다. 이전 정부와 달리 박근혜 정부는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전교조가 정부의 규약시정명령을 거부하자 고용부는 곧장 법외노조 통보를 했다. 교육부는 일사천리로 시도교육청을 통해 전교조의 전임자들에게 교단 복귀를 명령했다.

상당수의 전교조 전임자들은 교육부와 교육청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교단 복귀 거부자들에 대한 해직 등 대량 징계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정국은 순식간에 교육 문제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가능성이 높다. 그사이에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문제는 수면 아래로 조용히 사라져갈 것이다. 전교조 '공격'을 통한 정권 '방어'의 논리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박 대통령의 '공격적 방어론'을 뒷받침하는 방증이 있다. 지금 권력의 최정점은 고대 '씨족사회'에 버금가는 동질 집단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동질 집단은 현대 한국정치의 불변의 주류인 '피케이(PK)-티케이(TK)'다. 검찰총장 지명자인 김진태 변호사가 검찰의 수장이 된다면 이 집단의 동질성은 좀더 공고해질 것이다.

권력 최정점의 라인업은  일부 언론에서 거론하는 이른바 '신 피케이(신 부산경남)'가 결코 허언이 아님을 말해준다. 하동 출신의 정홍원 국무총리와 거제 출신의 김 비서실장, 마산 출신의 황찬현 감사원장 들만으로도 '신 피케이 향우회'를 꾸릴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들은 항변한다. 능력에 따라 선택한 인사 결과를 놓고 편향이니 정실이니 하는 말을 듣는 건 너무 억울하다고. '기춘대원군'으로 풍자되는,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의 말씀이시다. 아니 어떤 식으로 인사를 해도 야당으로부터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테니 이런 식으로라도 항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능력주의'를 따르는 나라가 되었나. 학연이나 지연, 혈연이 아니라 정말로 개인의 진정한 '능력'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능력주의'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진정 유효한 잣대로 쓰이고 있나. '기춘대원군'의 말에 그럴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스멀스멀 의심과 의혹과 음모가 떠오르는 이유다.

그가 말하는 그 '능력'이란 건 과연 무엇인가. 청와대는 무슨 잣대로 물망에 오른 검찰총장 후보자들의 '능력'을 평가했을까. 우리에게는 그와 관련된 구체적인 정보들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기춘대원군'이 강조한 '능력주의론'은 한갓 주장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된다. 야당이나 국민들의 반발은 지극히 당연하다.

실제의 씨족사회는 일종의 혈연 공동체다. '피'로 똘똘 뭉쳐 있으니 서로 끈끈한 유대감을 갖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보면 그 구성원의 운신 폭이 제한된다는 단점도 있다. 그 씨족의 구성원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자신의 행동 반경을 통제하고, 사고와 의식의 범주를 결정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다.

그런 점에서 1992년, 부산 초원복국집에서 김기춘씨가 내뱉었다는 그 '멋진' 한 마디, "우리가 남이가"는 한국정치사에 두루 남을 '명언'이 아닐 수 없다. 20여년 전의 한국 정치판을 달군 그 한 마디는 실제적인 씨족사회의 특징이 상징적인 정치 영역에 들어서면서 발휘하게 되는 가공할 영향력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많은 사람이 '전라도'와 '경상도'를 등가로 놓고 말하거나 생각한다. 하지만 '경상도'라는 이름과 '전라도'라는 이름의 값은 결코 같지 않다. 두 지역에 살고 있는 인구 수는 2배 차이가 훨씬 넘는다. 땅덩어리의 격차도 무시 못한다. 두 지역 각각의 부와 경제력의 규모, 현실 정치에서의 영향력, 사회 제부문에서의 차이까지를 고려하면, 속된 말로 게임 자체가 안 된다.

20세기 중후반 이후 '경상도'라는 이름은 그 구성원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권력'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남이가"에 포획된 평범한 경상도 사람에게 '경상도'라는 말은 나날을 살아가는 '힘'을 주는 원천이 아닐 수 없다.

21세기 대한민국에 고풍스러운 씨족 공동체를 숭배하는 이들이 아직도 여전히 많다. 나는 '전라도' 출신이어서 자랑스럽다, '경상도'에서 태어난 게 다행이다 식으로 말하는 이들이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태어난 데 자신의 의지가 작용했는가.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이 '피'로 구별되는가.

'전라도'니 '경상도'니 하는 것들은 행정의 편의와 지리·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넓은 의미로 보아 문화적 공동체일 따름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마치 피가 섞이고 뼈를 공유하는 혈족, 곧 농경사회의 씨족 구성원들처럼 여긴다. 유전적인 공동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웃은 결코 '남'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 상징적인 자본 등을 지키기 위해 타 지역과의 경쟁과 차별화를 당연시한다. 각자가 가진 역량이나 자질과는 무관하게, 부와 권력, 상징 자본 들을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 공동체(구성원)의 탁월성을 보증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일체감은 그 안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공동체 내부를 향한 그들의 사랑이 종종(자주?) 외부인에 대한 극심한 혐오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국정원 직원으로 밝혀진 '좌익효수'는 "절라디언들 전부 씨족을 멸해야 한다"고 썼다. '홍어종자들'이라는 표현도 그의 작품이다. 5·18 당시의 광주시민들은 '북한의 심리전에 넘어간' 사람들로 규정되었다. 국민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공무원이 한 말들로 보기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그런 식의 증오와 차별의 글들이 국가 기관에 종사하는 공무원들의 손을 통해 인터넷을 더럽힌 게 작년 대선이었다.

호남지역과 전라도 사람들을 비하하는 사례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무소속 강동원 의원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1년 이후 올해 8월 말까지 2년 8개월간 인터넷이나 방송통신 분야에서 지역차별 비하와 역사왜곡 정보 시정요구 건수 686건 중 압도적인 다수는 차별비하 정보로 모두 557건에 이르렀다. 이들 차별비하 정보에 대한 시정요구 건수도 2011년 4건에서 2012년 113건, 올해 8월 말까지 440건 등으로 가파르게 증가했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1퍼센트'는 그들의 권력과 부를 잃지 않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국가와 사회를 향한 사람들의 불만을 이들 소수의 희생양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체제 안전을 꾀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숙한 씨족사회라면, 당연히 이들 폭주하는 l퍼센트를 자체적으로 제어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1퍼센트가 퍼뜨리는 광기 어린 증오와 혐오의 바이러스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희생양의 무리로 전락한다. 그렇게 다수가 희생양이 돼버리는 사회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1퍼센트가 가진 권력과 부의 보존은 물론이고 체제 전체의 안전도 담보할 수 없게 된다. 씨족의 지혜로운 촌장이나 현명한 원로들이 필요한 이유다.

지금 이 나라의 '1퍼센트'는 어떤가. 김기춘 비서실장은 1939년 생이다. 올해 나이가 74살이다. 1952년생으로 올해 환갑 나이인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큰삼촌뻘에 해당하는 나이다. '대독 총리'의 오명을 가진 정홍원 총리는 1944년 생이니 69살이다. 박 대통령과 8살 차이가 난다. 박 대통령이 형제 많은 집안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났다면 막내삼촌쯤으로 보아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다.

그런데도 이들 '삼촌'이 지금 대한민국 '권력 씨족'의 어른 노릇을 하고 있는가. 이들에게서 지혜로운 촌장이나 현명한 원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가. '큰삼촌'인 김기춘 비서실장은 노회하게 정국을 배후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큰손 노릇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막내삼촌'뻘인 정홍원 총리는 어떤가. 그 자신의 존재감조차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가 뜬금없는 담화로 사람들 속을 뒤집어 놓은 게 불과 며칠 전이다.

얼마 전,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시구를 하던 박 대통령의 모습이 징후적으로 다가왔다. 그 미소 뒤에 담긴 대통령의 진짜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그저 시구 자체에 대한 단순한 기쁨의 표시였을까, 아니면 별다른 말 한 마디도 없이 정국을 이끌어가는 자신의 탁월한 정치력(?)을 향한 깊은 자부심의 발로였을까.

진심으로 말하건대,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의 미소는 참 곱다. 환갑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하지만 그 미소가 진정으로 곱고 아름다우려면 아직 멀었다. 전국 방방곡곡에 그가 아직 품지 못한, 한숨과 비탄과 눈물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있어서다.

오늘도 밀양의 할머니들은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파고드는 시린 바람을 막아내지 못하리라. 대다수의 평범한 일상인들은 벌어도 벌어도 모자라는 '돈' 때문에 한숨을 내쉬며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살아가겠지. 성적과 공부의 노예가 돼버린 아이들은 끝모를 경쟁 시스템 속에서 하루하루 자신을 소진하고 있다.

대통령은 결코 1퍼센트의 대변자가 아니다. 대통령은 그 자신을 찍지 않은 사람들까지를 포함한 대다수의 평범한 99퍼센트를 품어야 한다. 그것이 근대 이래의 민주주의와 선거제도가 대통이라는 직책에 부여한 임무다. 대통령이 1퍼센트의 대변자가 되는 순간 99퍼센트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난다. 그를 찍어준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결코 그 1퍼센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냉철하고 합리적인 '머리'? 좋다. 스스로에게 깨끗한 '손'? 결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탁월한 '머리'나 순수한 '손'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또는 그 어디로든지 갈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가 필요하다.

그 튼튼한 두 '다리'로 이 힘든 세상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의 미소가 진정으로 곱게 다가오는 날이 왔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지금 우리에게 냉소와 침묵은 지나친 사치일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박근혜 대통령, #전교조 법외노조화, #경상도, #1퍼센트, #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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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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