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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를 보고 사람을 보며 그를 통해 세상을 본다는 간수간산간인간세(看水看山看人看世)라는 말이 있다. 남명 조식이 지리산을 둘러보고 감상을 말한 문구다. 남명 선생은 지리산에 12번 올랐다. 오를 때 강산만 본 게 아니라 선현의 유적지를 둘러보고 자신을 돌아보며 당시 상황에서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생각했다. 

여행을 하면서 선현을 만나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강진에는 다산이 있다. 다산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 만나고 싶은 선현 중에 한 분이다. 다산의 발자취는 넓고 깊어 어느 하나만을 짚어 얘기하기 힘들다.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굳이 거론 않고서도 다산초당 하나만 들여다봐도 '인간 다산'과 '착한' 목민관을 그려볼 수 있다.

여러 고증을 거쳐 가장 최근에 그려진 것이다. 다산초상은 그려질 때의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하는데 이 초상은 안경을 낀 학자풍모습으로 사회변혁을 꿈꾼 인물상은 아닌 것 같다.
▲ 다산초상 여러 고증을 거쳐 가장 최근에 그려진 것이다. 다산초상은 그려질 때의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하는데 이 초상은 안경을 낀 학자풍모습으로 사회변혁을 꿈꾼 인물상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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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어지럽히는 온갖 악행은 욕심과 집착에서 비롯된다. 다산초당을 둘러보고 초당 마루에 앉아 다산을 생각하면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산이 꿈꾼 집 속에 어지러운 세상을 풀 열쇠가 있다. 스스로 유인(幽人)이 되어야 할 사람과 유인이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다. 초당 마루에 앉아 곰곰이 생각할 일이다. 다산의 시와 초의가 그린 <다산도>를 근거로 다산이 꿈꾼 공간을 더듬어 본다.

집터(location)

다산이 생각한 이상적인 유인(조용히 숨어사는 사람)의 공간은 무엇일까? 다산은 시내와 산이 어우러져 산수가 아름다운 곳, 골짜기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고 거기에 기우뚱한 바위가 있는 곳, 시계가 환하게 열려 눈을 즐겁게 하는 곳이 복지(福地)라 했다.

깎아지른 듯 한 절벽에 기우뚱한 바위가 있고 지세가 맺힌 곳에 두세 채 띠집이 있다. 다산이 말한 복지(福地)에 가깝게 보인다.(다산생가 다산기념관에서 촬영)
▲ 다산의 산수화 깎아지른 듯 한 절벽에 기우뚱한 바위가 있고 지세가 맺힌 곳에 두세 채 띠집이 있다. 다산이 말한 복지(福地)에 가깝게 보인다.(다산생가 다산기념관에서 촬영)
ⓒ 김정봉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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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귤동마을 서쪽, 시내(川)를 끼고 오솔길 따라 100미터쯤 오르면 험한 비탈이 나온다. 비탈길 따라 시냇물 찾아올라 샘솟는 데 가면 바위 사이에 그윽한 집, 초당이 있다. 다산이 말한 천 그루 소나무는 온데간데없고 뿌리만 길 위에 엉겨 있다. 길 이름도 억지로 지은 '뿌리길'이다.

비탈길 옆 시냇물 쫓아 올라가면 지세가 맺힌 곳에 다산초당이 있다. 소나무 뿌리가 엉겨있어 ‘뿌리길’이라 이름붙이고 있으나 그다지 보기에는 좋지 않다. 흙으로 덮어주었으면 좋으련만..
▲ 다산초당 가는 길 비탈길 옆 시냇물 쫓아 올라가면 지세가 맺힌 곳에 다산초당이 있다. 소나무 뿌리가 엉겨있어 ‘뿌리길’이라 이름붙이고 있으나 그다지 보기에는 좋지 않다. 흙으로 덮어주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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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주변은 나무가 우거져 답답하다. 한여름은 습하고 덥다. 예전에도 그랬을까? 초의가 그린 <다산도>에는 띠집 앞에 버드나무 몇 그루만 자라고 있을 뿐 시계가 환하게 열려있었다. 그렇지 않다 해도 지금 천일각이 있는 언덕배기에 오르면 구강포가 훤하게 내려다보여 시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산초당은 다산이 말한 '시계가 열린 곳'이었다.

다산이 거주한 동암 언덕배기에 오르면 구강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시계가 환하게 열려있는 곳이라고 한 다산의 복지관(福地觀)에 그런대로 부합한다 할 수 있다.
▲ 천일각에서 내려다 본 구강포 다산이 거주한 동암 언덕배기에 오르면 구강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시계가 환하게 열려있는 곳이라고 한 다산의 복지관(福地觀)에 그런대로 부합한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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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서쪽 언덕에 병풍 같은 바위, 석병(石屛)이 있는데 다산이 말한 '기우뚱한 바위'역할을 하고 있다. 그 바위에 다산은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듯 반듯하고 단정하며 흐트러짐 없는 글씨체로 '정석(丁石)'을 새겼다. 초당의 문패 역할을 하고 있다.

다산이 해배된 뒤 제자 등 여러 사람이 찾았을 때 다른 것은 모두 스러졌으나 ‘정석’바위는 온전하다 했다. 정석은 문패역할을 한 셈이다.
▲ 병풍 같은 ‘정석’바위 다산이 해배된 뒤 제자 등 여러 사람이 찾았을 때 다른 것은 모두 스러졌으나 ‘정석’바위는 온전하다 했다. 정석은 문패역할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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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의 공간구성(construction of space)

지세가 맺힌 평평한 곳에 세 채의 띠집이 있다. 가운데에 초당, 동쪽에 동암(東菴), 서쪽에 서암(西菴)이 있다. 띠집 앞에는 담을 쌓아 자연과 경계를 두었다. 지금 '다산초당(茶山草堂)' 현판이 걸려 있는 곳이 초당으로 예전에는 죽각(竹閣), 지각(池閣), 서각(書閣), 지정(池亭)으로도 불렸다.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원래는 띠집이었으나 보존회의 지나친 배려인지 폐가가 된 것을 기와집으로 고쳐지었다.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될 예정이다.
▲ 다산초당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원래는 띠집이었으나 보존회의 지나친 배려인지 폐가가 된 것을 기와집으로 고쳐지었다.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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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것으로 추사의 명성이 낳은 작위적 구성으로 보인다
▲ 다산초당 현판 추사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것으로 추사의 명성이 낳은 작위적 구성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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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은 '보정산방(寶丁山房)', '다산동암(茶山東菴)'의 편액이 달려 있는 두 칸 집으로, 다산이 글을 읽고 책을 쓰고 잠을 자던 주 생활공간이고, 서암은 제자들이 기거하던 기숙사와 같은 곳이었다.

다산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현판이다. 힘 있고 유려한 글씨체로 맑고 깨끗한 느낌이다.
▲ 다산동암 현판 다산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현판이다. 힘 있고 유려한 글씨체로 맑고 깨끗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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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가 다산을 존경한다는 의미로 썼다는 현판이다. 추사가 중년에 쓴 것으로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능숙한 예술적 경지를 보인 글씨다. 개인적으로 이 글씨가 너무 좋아 방문 앞에 인쇄해서 붙여 놓았다.
▲ 보정산방 현판 추사가 다산을 존경한다는 의미로 썼다는 현판이다. 추사가 중년에 쓴 것으로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능숙한 예술적 경지를 보인 글씨다. 개인적으로 이 글씨가 너무 좋아 방문 앞에 인쇄해서 붙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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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옆에 네모난 연못을 파고 가운데 세 봉우리 석가산을 만들었다. 도교의 신선사상이 투영되어 있는 석가산을 만든 것은 다른 정원과 다른 점이다. 다산은 이 연못이 초당의 얼굴이라 하였다. 연못물은 산중턱 샘물을 끌어온 것인데 연못에 이르러 대나무 통을 통해 연못으로 떨어지게 하였다. 연지 위에는 화계를 쌓고 거기에 꽃과 나무를 심었다.

다산은 연못은 초당의 얼굴이라 하였다. 다산에게 연못은 정원의 구성요소인 동시에 채소나 물고기를 기르는 저수지였다.
▲ 초당 연못 다산은 연못은 초당의 얼굴이라 하였다. 다산에게 연못은 정원의 구성요소인 동시에 채소나 물고기를 기르는 저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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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도>에는 두 개의 연못이 보이는데 하나는 담 아래에 있다. 초당 옆 연못물이 넘치면 담 구멍을 통해 아래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하였다. 담 아래 경사면에는 돌로 구층의 단을 쌓아 '세금 없는 밭'을 일궈 채마밭을 만들었다. 단마다 무, 배추, 파, 쑥갓, 가지, 아욱, 상추, 토란, 미나리 등 여러 채소를 심었다.

다산은 물을 헛되이 쓰지 않고 남새밭을 가꾸는데 이용하였다. 연못은 다산에게는 정원의 구성요소인 동시에 채소를 기르기 위한 저수지였다.

이처럼 다산은 정원의 요소를 실용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빈 공간에 채마밭을 조성하여 채소를 기르고 물을 가두어 미나리를 심거나 물고기를 길렀다. 보통의 사대부와는 다른 정원관(庭園觀)을 갖고 있었다.  

초당 앞에는 차 끓이는 조그만 부뚜막인 다조(茶竈)가 있고 초당 서북쪽 모서리에는 우물인 약천(藥泉)이 있다. 약천은 처음에 웅덩이에 지나지 않았으나 다산이 더 파고 주위에 돌을 쌓아 만들었다.
 
 아궁이와 굴뚝은 없어지고 평평한 바위만 남아 있다.
▲ 차 부뚜막, 다조 아궁이와 굴뚝은 없어지고 평평한 바위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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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조는 평평한 부뚜막만 남아 있고 '물고기 목 같은' 아궁이며 '짐승 귀' 같은 굴뚝은 온데간데없다. 어떤 이는 이를 보고 예전에 있던 다조가 아니라 새로 갖다놓은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나 지금의 것은 아궁이와 굴뚝이 없어지고 평평한 부뚜막만 남은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치장(details)

다산은 치장은 정교하게 하여야 한다고 했다. 초당 곳곳에 꽃과 나무를 심고 즐겼다. 화목(花木)을 보고 자신의 감정과 처지, 과거를 회상하고 더 나아가 강진 사람들의 애환을 꽃에 이입시키며 시로 읊었다.

연못가에 국화를 비롯한 온 갖가지 꽃을 심어 물속에 어른거리게 하였고 연못 안에는 잉어를 길러 '저녁밥 두세 덩이' 남겨 물고기 밥으로 주기도 하였다.

봄날이면 샘 곁 복숭아나무는 바람에 일렁이고 밭 근처 붉은 작약 싹은 백성의 아우성을 대변하듯 성을 내며 돋는다. 잔돌 쌓아 만든 담 아래 미나리 밭에서는 미나리 잎이 파릇이 돋고 산 복숭아 두세 가지는 산허리 담에 기대어 꽃을 피워 꽃담을 이룬다.

여름에는 지치가 한얀 꽃을 피우고 그 사이 호장은 줄기를 뻗기 시작한다. 산허리에서는 목백일홍이, 창 앞에서는 모란이 꽃을 피운다. 초당 지붕 위까지 뻗은 버드나무 옆에는 해바라기가 임 계신 곳을 향하듯 태양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가을이면 붉은 단풍이 푸른 바위손 위에 얼굴을 붉히고 '생계에 도움이 안 되는' 국화가 잡초 속에 꽃을 피운다(다산은 국화를 가난한 선비의 생계수단으로 보기도 하였다). 한겨울이면 담 곁 매화나무가 꽃을 피워 '매화 꽃필 때 거듭 모이자던' 옛 벗을 그리워하게 하였다.

산언덕 대나무의 신비한 소리, 깍깍대는 꿩 소리며 붉은 비늘 같은 소나무 솔바람과 구강포에서 들리는 습한 물소리는 백성의 아우성처럼 들려 마냥 즐겁지만 않은데 강진의 백성마냥 어린 가지 못 내리는 화분 속 월계화는 바람 맞고 눈과 비바람에 잘 견딜지 다산의 마음을 타게 한다.

심서(心書)

다산은 귀양살이 하는 동안 좌절하지 않고 자신이 거처하는 공간을 기름지게 다져 나갔다. 다산은 이런 집이라면 문 밖에 임금이 부른다는 글이 이르더라도 씩 웃으며 나아가지 않는다 하였다. 그러나 다산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목민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는 처지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바를 심서로 드러내었다.

남명 조식은 자발적 유인이고 다산은 비자발적 유인이다. 그러나 두 분 모두 난세에 소극적으로 살지는 않았다. 조식은 알면 실천해야 한다는 실천적 지성인이었고 다산은 얽매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심서로 사회에 깊숙이 참여하였다. 

지금 '다산'과 '조식' 사이에 엉거주춤하고 자발적 은둔을 하며 심서로 자위하는 글쟁이, 지식인들이 많다. 왜일까? 곽재구의 시 <귤동리의 일박>에서 다산의 죄를 '기민시(飢民詩), 애절양(哀絶陽) 등의 애민을 빙자한 유언비어 날조로 민심을 흉흉케한 천주학 수괴'라고 했던 것처럼 터무니없는 억지와 강압으로 죄인이 되는 이 땅의 논리가 무섭고 더러워서 그럴 게다.

어지러운 세상, 유인으로 살며 다산의 초당처럼 집을 짓고 살아야 할 사람은 바깥세상을 고집하고, 굳이 운둔하지 않아야 할 사람이 심서로 만족하고 운둔하려는 세상이다. 지금은 심서로 만족하지 말고 스스로 바깥세상으로 나와 목민관이 되어야 할 어지러운 세상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pressianplu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정약용, #다산초당, #다산, #동암, #보정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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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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