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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했다가 보름 만에 학교로 돌아온 한 아이에게 방황과 타락의 차이점을 설명해준 적이 있다. 휘어졌다가도 돌아올 탄성이 남아 있으면 방황이지만, 그 탄성을 아예 잃어버리면 타락의 길로 들어선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가출에서 돌아온 아이를 혼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나름대로 애써 머리를 굴려 해준 말이었다. 아이는 돌아올 탄성이 남아 있었던지, 아니면 담임의 말을 듣고 탄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을 한 덕인지, 그 뒤로는 학교생활을 그럭저럭 잘 해냈다.

갑자기 그때의 일이 떠오른 것은 요사이 세월이 수상쩍다 못해 타락일로에 접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 타락 여부를 재는 시금석은 앞에서 말한 탄성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우리 사회(특히 학교)의 퇴행국면이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의 진보를 믿는 편인 나로서는 상당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런 절망적인 생각에 빠지게 한 것일까?

최근에 교육(혹은 교사)과 관련된 두 권의 책을 읽었다. 두 권 모두 책머리에 쓴 저자의 글이 어둡고 비장하다. 흥미로운 것은 그 어둡고 아픈 환부를 지루할 만큼 오랫동안 응시한 뒤에 찾아온 어떤 현상이다. 그걸 지금 당장 언어로 표현할 재간이 나에게는 없다. 두 권의 책을 소개하다보면 희미하게나마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을까?

퇴행국면에 놓인 학교, 탄성 회복할 수 있을까

윤지형의 <다시 교육의 희망을 묻는다면> 책 표지
 윤지형의 <다시 교육의 희망을 묻는다면> 책 표지
ⓒ 교육공동체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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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형의 <다시 교육의 희망을 묻는다면>(교육공동체 벗)은 제목이 다소 상투적이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상투적이듯이. 그런데도 왜 그런 제목을 붙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을 말해서는 안 되는 저자(혹은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긍정적 세계관 때문이리라. 하여, 나는 책머리에서 드러난 그의 절망이 다소 당혹스러웠다.

'학교의 변화는 가능할까? 10년 전, 20년 전이라면 나는 대답했을 것이다. 변화 가능하고 변화시켜야 한다, 고. 그러나 이제 내 대답은 그렇지 못하다. 나는 회의적이고 비관적이 되었다. (…) 바람직한 변화의 가능성이 희망이라면 그렇지 못한 변화 가능성은 절망이며 저주인 것이다. 나는 갈수록 절망이며 저주로서의 학교의 변화를 현실로 경험한다. 희망은 허상이고 절망만이 진실임을 시시각각 확인한다고 해야겠다. 어쩔 것인가. 이리 되고 말았다.(8쪽)'
     
다행히도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캄캄한 밤길이 내 앞으로 뻗어 있다. 대낮에도 캄캄한 길. 캄캄함. 이것만이 지금 내겐 가장 리얼리티이고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느낀다. 캄캄함 속에서 나는 겨우 안심한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캄캄한 길 저편에서 반짝이고 있는 불빛 하나를 발견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불빛은 홀로 그렇게 서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나를 길을 갈 수 있다. (…) 이 세상 어딘가에 스스로 불을 밝히신 선생님이 별처럼 존재하고 스스로 샘물이 된 선생님이 거짓말처럼 존재한다는 것.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건 안다.(12쪽)'

세상의 어둠은 그대로인데 어둠 속에서 그가 돌연 안색을 고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스스로 불을 밝히신 선생님들이 별처럼 존재하고', '스스로 샘물이 된 선생님들이 거짓말처럼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그는 절망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결국 그는 희망이라는 상투적인 말을 다시 쓸 수밖에 없게 된 건 아닐까. 

이 책은 저자가 수년에 걸쳐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발품을 팔아서 만난 '한 점의 불빛'과 '옹달샘'이 된 13명의 교사들의 삶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그들의 눈물겨운 활약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학교는 여전히 그 모양 그 꼴이지만 말이다. 이 책은 저자 윤지형의 르포 형식의 글과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 교사가 저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태로 직접 쓴 '그 후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첫 주인공은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의 저자 이상석(부산 신도고) 선생님이다.

'어느 가을 문학 시간, 이상석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책걸상이 모두 뒤로 밀쳐진 교실 바닥에는 노랗고 붉은 나뭇잎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눈빛 맑은 여고생들은 그 낙엽 위에 삼삼오오 앉아 그의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30대 중반의 청년(!) 교사였던 그는 저 예쁘기 그지없는 처녀 아이들에게 큰 절을 올린다. 너무도 고맙고 행복해서.(26쪽)' 

그 '사랑'과 '행복'이 크디컸던 만큼 해직 사태를 맞은 이상석과 처녀 아이들은 엄청난 슬픔과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음은 두말이 필요치 않다. 또한 쫓겨난 스승과 스승 잃은 제자들의 학교 밖에서의 '만남'까지 감시하고 방해하고 불온시하고 폭력까지 행사했던 타락한 언론, 교육청관료들, 한심한 몇몇 교사들 때문에 아이들이 겪은 슬픈 혼란과 오직 그로 인한 이상석의 아픔과 절망도…(27쪽)'

이 책의 장점은 그가 만난 교사들의 다양한 면면에 있다. 저자가 탁월한 필력으로 복원해 놓은 주인공들의 감동적인 내면의 모습과 함께 우리 교육의 지형도를 한 눈에 읽을 수 있다. 몇 편 제목만 열거해도 속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순결한 양아치들이 나는 좋다(조영선)'
물만골 처녀선생은 무엇으로 사는가(김정애)
학교는 혁신이 될 수 있을까?(이범희)
교실에서 행복하시나요?(박현숙)
'교사-교장' 그 오래된 경계를 넘다들다(고춘식)
'작고 아름다운 학교'를 위한 연가(조영옥)
'우리는 '국가보안법의 나라' 교사였다.(한경숙 외)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위안 보다는 아프다

엄기호의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책 표지
 엄기호의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책 표지
ⓒ 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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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엄기호는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따비)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교사들이 반길 만한 제목 같지만 꼭 그런 건만은 아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그는 동종업자(?)의 의리(?)상 교사들을 몰아세우지는 않지만 학교의 속살을 여지없이 파헤친 이 책을 읽고나면 학교(의 순기능)를 망가뜨린 죄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만큼 그의 증언은 치밀하고 현장성이 강하다. 그는 책머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교육에 대해, 학생들을 만나는 것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교육현장에 뛰어든 교사들이 어떻게 소진되며 고립되고 있는지를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이를 통해 우리 교육현장이 얼마나 반교육적이며 교육이 불가능한 파국적 상태로 치닫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 이 폐허를 응시해야 한다. 희망은 그 폐허에 대한 응시에서 나온다. 나는 그 폐허를 같이 응시하며 희망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분들과 이 책을 같이 읽고 싶다.(11쪽)
    
그가 말한 '열정을 가지고 교육현장에 뛰어든 교사들'은 앞에서 소개한 윤지형의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문제는 그들이 학교 현장에서 '소진되고 고립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로 인해 '교육이 불가능한 파국적 상태로 치닫고' 있다는 슬픈 현실이다. 그는 이 지점에서 폐허를 함께 응시하자고 제안한다. 그의 제안은 그 폐허에 일조한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설득력을 얻는다. 그가 그려놓은 학교(혹은 교사)의 사실화는 생각보다도 음습하고 부정적이다.  

'사실 교사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 중 하나가 학생들은 개별교사를 학교에 대한 총체적인 경험 속에서 만난다는 사실이다. 대다수의 학생에게 학교와 교사에 대한 경험은 부정적이고 상처투성인 경우가 많다. 대학생들에게 교사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해서 글을 써보라고 했다. 그런데 한 학생은 자기를 기억하는 교사가 한 명도 없을 텐데 자기는 교사를 기억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또 다른 학생은 자기에게 교사가 어떤 존재인지가 아니라 교사에게 자기가 어떤 존재였는지가 더 궁금하다고 했다.(98쪽)   

이 책은 교실이라는 <정글>(1부), <교무실, 침묵의 공간>(2부), <성장 대신 무기력만 남은 학교>(3부)로 구성되어 있다. 소제목으로만 보아도 책의 내용이 대강 손에 잡히는 듯하지만, 우리 교육의 폐허를 진단한 기존의 다른 책과는 사뭇 다른 결이 느껴진다. 그 다른 결이란 앞에서 언급한 '어둡고 아픈 환부를 지루할 만큼 오랫동안 응시한 뒤에 찾아온 어떤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책을 읽다가 덮고 싶은 충동이 들만큼의 크고 묵직한 아픔 뒤에 찾아온 평화 같다고나 할까? 물론 그 평화는 뭔가를 끝낸 이의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이제야 비로소 출발점에 서 있는 자, 그럴 수 있는 용기를 얻은 자가 누릴 만한 평화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나는 이 글을 읽는 '가르치는 사람'들이 깊게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자신의 교직 인생에서 자신을 교사로 성장시킨 학생들이 과연 누구였는지를 말이다. 이 책에 나오는 교사들을 만나는 내내 내가 들었던 말이 그것이다. 그들은 전문계 고등학교에서 혹은 왕따가 된 학생이나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학생들을 만나면서, 한 편에서는 '멘붕'을 겪으며 자신의 경험과 언어의 한계와 부족함을 절감했다. 그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선배와 동료 사이에 지혜를 구하고 공부하면서 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다. 그러는 과정에서 가르치는 이로서의 정체성을 세우고 성장해왔다고 그들은 말한다. 타자로서의 학생, 타자인 학생을 만나지 않고서는 교사로서 성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301쪽)

가출했다가 보름 만에 돌아온 아이는 그 후 내게서 책 한 권을 빌려갔다. 느닷없이 읽을만한 책을 소개해달라고 한 것은 자신의 탄성을 유지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때 내가 느낀 기쁨은 이런 것이었다. 타락하고 싶지 않는 사람은 이미 타락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거. 그렇다. 타락은 마음을 놓아버린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세상이 미쳐서 돌아갈수록,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수록,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정신을 굳건하게 붙잡고 있어야 한다. 방황에서 타락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도 가깝고 빠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두 권의 책을 교사만이 아닌 학부모(시민)들도 꼭 읽어보길 권한다.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의 영혼을 책임질 만한 올곧고 아름다운 교사들이 소진되고 고립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다시 교육의 희망을 묻는다면

윤지형 지음, 교육공동체벗(2013)


태그:#윤지형, #엄기호, #교육공동체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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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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