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12년 2월 일본 도쿄 부근의 오다와라(小田原)역 주변. 동백꽃이 피었고, 매화꽃도 여기저기서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으며, 때를 앞서 핀 벚꽃도 보였다. 인구 20만의 작은 도시인 오다와라는 국제적인 관광지 '하코네' 부근에 있어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다. 역 앞 동백꽃은 만발해 아름다움을 선사해 주었지만, 딸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늘 기대면서 가까이 했던 엄마가 옆에 없어서였다.

2004년 유방암 선고를 받고서 한쪽 가슴을 수술한 아내는 5년 뒤 재발하여 항암치료 등을 계속해오다 결국 2011년 8월 초순, 집과 가까운 호스피스 병동에서 48세를 일기로 저세상으로 떠났다. 생을 마감하기 이틀 전, 물 몇 방울 정도만 겨우 목구멍으로 넘기는 등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친구들이 와도 눈을 뜬 다음에 바로 감고서 끊임없이 잠만 잤다.

그러다가 자신의 핸드폰 소리가 나자 무의식 중에도 집어들었다. 일본에서 걸려온 어머니의 전화였다. 3분여에 걸친 모녀지간의 대화, 모깃소리로 통화를 했지만 발음만은 비교적 또렷했다. 마지막으로 의식이 돌아온 것이다. 울음 섞인 음성을 내지는 않았으나 눈물이 계속 흘러 딸은 손수건으로 연신 닦아주고 있었다. 그렇게 통화를 한 다음, 하루 정도 있다가 아내는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1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일본에 있는 아내의 집에 도착한 첫날, 장인과 장모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7년 5개월의 투병 기간 동안 최선을 다했노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흔을 앞둔 두 분 또한 무릎을 꿇은 채로 장기간 고생이 많았다며 내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 주었다. 생전의 아내 도움으로 일본어회화를 아빠보다 잘하는 딸은 때에 따라 통역을 해주며 아빠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기도 했다.

여러 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내의 고향에 갈 때마다 가족 세 명이 손을 잡고 아내의 추억이 깃든 장소를 거닐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이번에는 딸과 단 둘이 사카와 강, 긴지로 기념관, 오다와라 역 등을 찾아 그때를 회고하며 자주 한숨을 쉬었다. 그때마다 딸의 얼굴에는 그늘이 졌다. 저녁 식사 후에는 장인·장모와 같이 거실에 앉아 녹차를 마시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는데, 그때 딸은 외할머니에게서 뜨개질을 배우고 있었다.

아내가 떠난 후 딸아이와 찾은 아내의 고향

엄마와 딸
 엄마와 딸
ⓒ sxc

관련사진보기


장인댁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긴지로 기념관 입구의 안내원은 방문객을 살갑게 맞이하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집안이 가난한데다 부모님마저 편찮아서 주경야독한 긴지로는 남의 집 아기를 돌보기도 하고 짚신을 삼아서 살림을 꾸려나가기도 했다. 비가 많이 내리면 인근의 강이 자주 범람해서 어떻게 이를 막을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소나무 묘목을 구입해 강둑에 심었다는 것이다.

긴지로가 심은 소나무들은 사카와 강 제방 쪽에서 아직도 잘 자라고 있으며, 따라서 이쪽 지방 학교에는 긴지로가 지게를 멘 채 독서하는 모습의 동상이 있다고도 안내원은 말했다. 설명을 들은 다음 딸의 손을 잡고 긴지로와 같은 의지의 인간이 돼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지금 중학교 2학년인 딸은 사춘기의 정점을 찍고 있다. 이마 주위에 만발한 여드름꽃이 그 증거이다. 마치 상전(上典)을 모시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매달 초 용돈을 주면 "다른 친구들에 비해 용돈이 너무 적다"고 투덜대고, 청소기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면 "절대 들어오지 마, 내 방은 내가 청소할 거야"라며 문까지 잠가버리기 일쑤다.

현재 우리 집의 아침식사는 바나나 한 개 그리고 빵 하나와 우유 한 잔이 전부인데, 동네빵집으로 빵을 사러 갈 때는 딸을 데리고 가서 맛있어 보이는 걸 고르라고 한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답은 이렇다. "아무 거나 골라." 아빠와의 대화가 귀찮다는 뜻이다.

얼마 전에는 딸이 다니는 학교에서 담임선생님 이름으로 가정통신문이 왔다. 학교에서 하는 정서행동발달 관련 검사 결과 '주의군'으로 판정을 받았기에 가정에서의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더 필요하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정서불안과 우울 등의 증상도 있어서 상담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엄마란 존재가 딸의 인성(人性)교육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절절히 느끼는 순간이었다. 어떤 유명인사는 예순을 넘겨 자기 어머니를 여의었는데도 천애고아라는 느낌이 들고 그 따스한 품에 안기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으니, 아직 철도 덜 든 딸의 마음이야 그 그리움이 오죽하랴.

엄마를 위해 목도리를 뜬 아이... 가슴이 뭉클

일본에서 배워 온 뜨개질로 딸은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한 달여의 시간이 흘렀을까 폭 20㎝, 길이 1m 정도의 그럴 듯한 목도리가 완성됐다. 누구한테 선물할 거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있는 봉안당(奉安堂)의 함 위에 올려놓을 거라고 대답했다. 딸의 눈에 어리는, 이내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면서 목이 멨다. 사실 아내는 겨울을 싫어했다. 내리는 눈은 좋아했지만, 추위 앞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딸은 엄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목도리로 표현해낸 것이었다.

부모의 사랑 부족에 따른 정서불안.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딸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기로 작정했다. 한 달 전에는 잠실구장으로 프로야구를 보러 갔다. 준비한 치킨과 음료수를 나눠 마시며 막대풍선으로 소리 높여 응원을 했다.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부르며 3시간 이상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 후에는 인근 음식점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며 모처럼 환하게 웃는 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딸의 모습이 내 마음을 울컥하게 했다. 이제부터 매달 한 번이 어렵다면, 1년에 네 번 정도 영화 구경, 콘서트 관람 등과 같은 문화생활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렇게 한다면 딸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겠기에.

사랑하는 아내와 작별한 지도 어느새 2년 정도 지났다. 직장일은 기본이고 각종 집안일까지 해야 해서 피곤함의 연속이지만, 쓰러지지 않고 굳게 일어서련다. 삶이 힘들다고 해서 절대 주저앉지 않을 것이다. 예전보다 지인들의 전화도 뜸하기에 나는 요즘 무척이나 외롭다. 이럴 때면 염량세태(炎凉世態)라는 단어가 생각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어찌하겠는가. 그들에게 줄 관심을 열정으로 바꿔서 딸에게 쏟아붓는 수밖에.

커가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품을 것이다

아내가 투병했던 7년여 동안 나는 아내의 건강 회복을 위해서 모든 걸 쏟아부었는데 2004년 당시 PET검사(양전자단층촬영) 비용만 100만 원 넘게 나왔다. 다행스레 발병 몇 년 후부터 많은 부분에서 보험이 적용돼 비용 부담은 훨씬 줄었지만, 병원비 때문에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없었다. 딸아이가 친구의 생일에 초대를 받아 그 집에 다녀온 뒤 자기보다 넓고 깨끗한 방을 봤을 텐데 아빠 앞에서는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8천만 원 짜리 전셋집의 코딱지만한 딸의 방을 생각하면서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의식주는 인간의 3대욕구이다. 전셋집이나마 방이 있기에 쉴 수 있고, 기존의 옷들이 있어서 입을 수 있으나, 먹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이다. 매일 외식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도 한계이다. 때문에 2주일에 한 번꼴로 마트에 들러 장을 보게 되는데 이때 반드시 간편 미역국와 간편 북엇국을 구입한다. 5개들이 1박스인 제품은 끓는 물만 부으면 바로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최근에는 우거지 된장국과 시금치 된장국이 출시돼 기쁘기 그지없다.

딸이 할 수 있는 요리라고는 라면 끓이기와 계란 프라이가 전부여서 직장일 때문에 늦게 귀가할 때면, 시장통에 있는 반찬가게에서 3팩에 5천 원 하는 반찬을 사 햇반에 밥을 먹으라고 전화를 한다. 즉석 밥이 있고 즉석 찌개가 있으며 무려 3가지의 반찬이 준비됐으니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 아니겠는가.

1인2역 이상의 일을 해내야 하기에 몸은 힘들지만, 커가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품을 것이다. 아직 사춘기여서 아빠에게 내뱉는 말이 곱지는 않지만, 잘 다독여주면서 의미 있는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도록 독려하련다. 엄마를 향한 그리움으로 만들어낸 목도리의 의미를 각인하리라. 매달 20만 원씩 적금을 부어 주면서 2년에 한 번꼴로 외갓집을 찾아가 허전함을 달래도록 해주련다.

딸의 소망처럼 동시통역사가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못다 한 일을 이어받아 완수하게끔 아빠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련다. 이렇게 한다면 이마 주위에 가득한 여드름꽃이 환한 웃음꽃으로 바뀌어 필 날이 머지않아 다가오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가족인터뷰> 공모글입니다.



태그:#가족 인터뷰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