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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멀쩡한 책을 왜 찢게 되었나?

한라도서관의 어린이들을 만나기 전부터 할까 말까 오랫동안 망설인 놀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찢고 싶은 책, 찢고 싶은 추억'이라는 놀이였습니다. 말 그대로 화나거나 슬프게 한 추억이나 책들을 불러내 판결을 내리고 책을 찢는 놀이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이미 한 돌만 지나도 분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데, 현실 속 우리 어린이들은 분노를 표현하기 보다는 억누르는 것을 강요받고 있어요. 그러면 어린이들은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 됩니다. 밥 지을 때 김을 빼듯이 아이들의 분노를 적절히 빼주면 아이들은 감정에 대한 통제력이 길러집니다.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한 놀이는 꽤 많은데 두 가지만 소개하면 미국의 임상심리학자 테레사 글랫혼 박사의 '분노의 방패'라는 놀이가 있습니다. 마분지 따위로 방패를 만든 후 어떨 때 화가 나는지, 화가 난 자신이 얼굴을 어떻게 생겼는지, 다른 사람이 화가 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화가 나면 어떤 말을 하는지 등을 그림이나 글, 혹은 잡지에서 오려낸 이미지를 붙이며 표현하게 합니다. 이때 방패를 만드는 과정이나 이미지, 글자를 방패에 오려 붙이는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 도움이 됩니다.

놀이치료사인 리먼 맥마흔이 TV 드라마 속 캐릭터인 녹색 괴물 '헐크'를 이용해 개발한 '몬스터 테크닉'은 마음 속에서 생기는 분노를 몬스터로 이미지화해서 몬스터를 작게 만드는 놀이입니다. 어린이와 분노를 분리하는 효과와 함께 어린이가 자신의 분노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죠.

"나는 화가 나긴 하지만 몬스터처럼 행동하지는 않겠어. 몬스터 너는 절대 내 마음 밖으로 튀어나올 수 없어. 그렇게 해서 몬스터가 나오지 못하게 만들 때마다 네 마음속 몬스터는 점점 작아질 거야." - 상진아, <행복한 놀이대화>, 167-168쪽

화가 날 때마다 몬스터가 튀어나오게 내버려 두면 내 마음 속 괴물은 점점 커지게 되지만 성공적으로 몬스터를 무찌를 때마다 몬스터는 조금씩 작아지고 어린이는 점점 커진다고 설명합니다. 마음 속 몬스터가 강아지만큼 작아지면 몬스터 자격증을 주기도 합니다. 몬스터 자격증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몬스터도 작아지게 도울 수 있습니다.

책을 찢는다는 발상은 사마천의 <사기열전> 중 '혹리열전'에서 차용했습니다. 거기서 한 어린이가 쥐 때문에 공연히 아버지에게 매를 맞자 쥐를 찾아내 재판을 하고 벌을 내리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이렇게 준비는 끝냈지만, 실제로 어린이들에게 책을 찢게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을 할 수 없었습니다. 분노의 감정은 매우 세기 때문에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에 조심스러웠습니다. 책 놀이에 참여한 어린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지내 오면서 화나는 일이 많이 있었나요?"

많은 어린이들이 많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책 찢기 놀이를 소개하며 제안했더니 한 아이가 "선생님, 책 찢으면 우리 엄마한테 혼나요?"라며 깜짝 놀라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재미 있겠다는 표정들이어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찢고 싶은 책, 찢고 싶은 놀이'는 못 쓰는 책에다가 흰 종이를 붙이고 거기에 찢고 싶은 추억이나 책을 쓰고 나서 왜 찢고 싶은지 이유를 친구들에게 설명합니다. 이유가 수긍할 만하면 그 자리에서 책을 찢어서 훨훨 날려 보내는 놀이입니다.

아이들에게도 찢고 싶은 추억이 있다

책 찢기를 하면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친구,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것 같다는 친구, 속 시원하다는 친구도 많았지만 화가 안 풀린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책 찢는 어린이들의 표정은 대체로 후련해 보였습니다.
 책 찢기를 하면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친구,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것 같다는 친구, 속 시원하다는 친구도 많았지만 화가 안 풀린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책 찢는 어린이들의 표정은 대체로 후련해 보였습니다.
ⓒ 오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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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의 참여를 이끌기 위해 내가 먼저 책 찢기 놀이를 시작했습니다. 제목은 '수학의 정석'입니다.

"저는 수학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수학의 정석이란 책이 너무 어려워서 수학을 싫어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수학을 해야 하는 직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수학이 싫다고 했더니 아이들은 "요정에게 수학이 왜 필요해요?"라고 따져 묻습니다. 아이들에게 맨 처음에 '책 요정'으로 인사했거든요. "요정도 빨리 날려면 수학이 필요해요. 좁은 골목을 통과할 때도 수학 지식이 많이 필요하지요"라는 말로 둘러댔습니다. 개구쟁이 군호가 먼저 나섰습니다.

"수영하며 놀고 있었는데 누나가 밑으로 헤엄쳐 와서 제 다리를 잡아서 당겼어요. 10초에서 20초 정도 갇혔어요."(양군호)

처음부터 충격적인 사연이 나왔습니다. 누나가 평소에도 자기한테 장난을 잘 친다고 합니다. 책 찢으면 엄마한테 혼났다고 했던 군호가 신나게 책을 찢더니 "조금 더 찢으면 안 돼요?" 하고 말합니다. 책을 찢으니 기분이 상쾌하고 좋다고 하네요. 저도 마음을 좀 놓았습니다.

꼭 좋게 끝나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석이는 책을 찢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나 봅니다.

"동생을 찢어버리고 싶어요. 동생이요. 막요. 제가요. 제가 공 놔뒀는데, 동생이 넘어가려다가 자기 공을 밟았다고요. 갑자기 동생이 넘으려다가 넘어진 건데 걸려서 엄마한테 저 혼자 혼났어요. 동생이 잘못했는데 억울하게 혼났어요." (임우석)

책을 찢어도 마음이 안 풀린다 길래 그러면 어떻게 해야 풀리겠느냐 물어봤더니 "동생 때려야"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제가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때려주세요"라고 했더니 "동생 아닌데요" 하고 말합니다. 책으로 배를 막고 한 번 시원하게 맞아주고 나서 "기분 좋아졌나요?"라고 물었더니 이번에도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책을 가져갔다며 자신을 막 때렸다던 동생이 생각난다는 현기 역시 책을 찢어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책을 좀 더 찢어야겠다며 한참을 더 찢었습니다.

채은이의 경우는 기분이 좋아진 경우입니다. 채은이는 이름이 '김채은'이라 오빠가 자꾸 '김치'라고 놀려서 기분 나쁘다고 말했습니다. 오빠의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김민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즉석에서 오빠에게 응수할 별명을 짜내 보았습니다. 김만석, 김밥, 만두, 분식집도 나왔습니다. 김치도 있고 만두도 있으니 분식집이라고 했더니 채은이가 재밌다고 웃습니다. 그리고는 "기분이 완전히 좋아졌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책을 찢는 동작뿐만 아니라 분노했던 상황을 잘 듣고 여러 가지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기분을 풀어주니 효과가 있었습니다.

찢고 싶은 책 "잃어버린 오 분이 돌아오는 것 같아요"

아이들에겐 찢고 싶은 추억이 많았지만, 찢고 싶은 책도 많았습니다. 태완이는 "도서관에서 인체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야해가지고 찢어버리고 싶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부분이 나왔는지 물어봤더니 너무 야해서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태완이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빨간 얼굴을 보니 장난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어느 부분이 제일 야했는데요?"라고 민망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린이들이 "거시기!"라고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난감한 태완이는 더욱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나중에 학년이 올라가면 생물학 시간에 다시 배울 테니 예방 주사 맞았다고 생각하라고 위로하면서 책을 찢게 했습니다.

"시원해요. 기분 나쁘게 했던 책들이 다 날라갈 것 같아요."(김태완)

서현이는 책이 너무 재미없었던 나머지 읽는데 쏟아 부은 시간이 아깝다며 하소연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걸 반쯤 읽었는데 너무 지루해서 책을 덮고 시계를 봤는데 5분이 지난 거예요. 저는 아까운 시간이 지나서 아쉬웠어요. 중간쯤 지나니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거 다른 몇 마디만 많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지루하고 싫었어요."

오 분이라는 시간은 길지 않지만 오 분이 스무 번 모이면 100분이라며 서현이의 생각에 동조를 해주었습니다. "아까운 오 분을 날려버린 책을 찢어서 오 분을 지켜주세요. 다음에는 좋은 책을 만나서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래요"라고 격려를 해주고 책을 찢게 했습니다. 서현이의 기분을 물었더니 멋진 대답을 들려줍니다.

"5분이 다시 돌아오는 것 같아요."

다영이는 나처럼 수학을 찢고 싶은 책으로 선정했습니다.

"제가 수학을 잘 못하거든요. 그래서 재미없고요. 수학 때매 엄마한테 혼날 일이 많았어요."

즉석에서 다영이의 수학 고민을 함께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수학 잘 하는 사람 있어요?" 하고 어린이들에게 물었더니 민재가 제일 잘 한다고 추천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대답했지만 좀 있으니 사뭇 진지하게 답변해줍니다.  어린이가 추천한 수학을 잘할 수 있는 비법입니다. 공감이 가시나요?

"과학을 잘 하면 수학을 저절로 잘 하게 돼요."
"물건을 상상하면 쉬워져요."
"덧셈 뺄셈 잘하면 곱셈 나눗셈도 잘 하게 돼요."

찢고 싶은 책, 찢고 싶은 추억 놀이를 한 결과 여자 아이들의 만족감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남자 아이들도 대부분 만족스럽다는 반응이었지만 책을 찢어도 화가 풀리지 않은 어린이들은 대부분 남자 어린이였습니다. 특히 남자 어린이들은 화가 나도 참아야 한다는 압력을 많이 받기 때문에 감정 제어가 잘 되지 않고, 쉽게 공격적인 언어와 행동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형제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아이들의 분노가 무척 커 보였습니다.

이 놀이는 순간적인 피드백을 많이 해야 합니다. 대화를 많이 나누면서 지지를 해주고 적절한 조언을 해주거나 고민을 함께 나눠 줍니다. 다른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면 어린이는 분노를 통제하는 힘을 얻게 됩니다. 우정과 사랑, 관심의 에너지만큼 분노를 잘 다스릴 수 있는 건 없으니까요.

여러 날 동안 고민했던 분노 놀이 '찢고 싶은 책, 찢고 싶은 추억'을 실제로 진행하면서 얻은 것도 많았고, 내 맘 같지 않았던 점도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분노를 잘 표현하지 못하는 어린이를 위해서 건강하게 분노 배출하는 '찢고 싶은 추억, 찢고 싶은 책' 한 번 해보면 어떨까요?


태그:#책놀이책, #한라도서관, #찢고 싶은 책 찢고 싶은 추억, #분노, #책 찢기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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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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