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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직원은 100대 1의 경쟁률을 뚫은 사람들이다. 100대 1! 이 도저한 경쟁의 시대에 잘 어울리는 수치다. 그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전사'들이다. 100대 1이라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싸워 이길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안보과 존망을 그들 손에 맡겨도 되는 이유다.

그런 빼어난 전사 1만여 명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닌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자본주의의 '실탄', 돈은 1조여원에 육박한다. 전사 한 사람이 1억 원 정도를 굴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액수다. 그 실탄으로 그들이 하지 못할 일은 거의 없다. 한 마디로 그들은 막강하다. 그 누구보다 힘이 세다.

그 막강한 전사들이 이번에 '폭탄'을 터뜨렸다. 폭탄의 이름은 고색창연하다. '내란 예비 음모'. 거의 사문화한, 그래서 형법 교과서에서도 몇 줄 설명으로 끝나는 죄목이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죄다. 서슬 퍼렇던 1970~1980년대의 유신·군사 독재 시대에나 어울릴 '폭탄'이다. 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내란 예비 음모의 주인공에는 국회의원이 포함되어 있다.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이 그 주인공이다. 장차 내란을 이끌 '반란군'은 130여명이다. 이들 '반란군'으로 구성된 'RO(Revolutionary Organization)'라는 '헐' 소리 나는 조직도 주인공 자리 한켠을 차지한다.

이들이 세운 음모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방불케 한다. 총기 준비와 유류시설 타격이 있다. 국가 통신망이 집중된 전산 기지와 경부선·호남선 등 기간 철도망 공격도 빠지지 않았다. 이 의원과 '예비 반란군'들은 회의 때마다 북한의 군가이자 혁명 가요인 '적기가'까지 불렀다. 나는 영화 <쉬리>에서 최민식이 이끈 북한 특수부대원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데 국정원 전사들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 130여명이 그 엄청난 일을 어떻게 준비하나. 우리나라는 전국이 15개 광역 시도로 나뉘어 있다. 그 각각에 8명씩이다. 이들 '특별 전사 요원'들을 활용하면 되나. 총기는 또 어떻게 마련하나. 영화 <26년>에서처럼, 재야의 총기 장인이라도 물색해야 하나.

통합진보당은 작년 총선 국면에서 부정경선 시비에 휘말려 인심을 많이 잃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한 언론과 국민의 시선도 별로 좋지 않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을 후원하는 '큰손'도 거의 없는 것 같다. 한 마디로 그들은 끈 떨어진 연 신세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국토의 일부를 점령하고(형법 내란죄상의 '국토 참절'), 국가 제도와 기관을 무력화(형법 내란죄상의 '국헌 문란')하나. 그들의 내란 음모 계획은 그토록 조직적이고 구체적이었나. 주요 국가시설에 타격을 줘 피해를 입힐 만큼 그들의 실행 계획이 실제적이었나. 반란을 실행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까닭이다.

상상해 보자. 대통령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갑식'이라는 한 사내가 있다. 어느 날 그가 친구 '을식'이와 거하게 술을 마신다. 그러다가 흥분하여 "대통령 죽여버리겠어" 하고 외친다. 술꾼들이 그를 흘깃 쳐다본다. 그러고는 엉망으로 취한 그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는다.

친구 을식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을식이는 눈에 검은 색안경을 낀다면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내다. 을식이가 갑식이에게 묻는다. "대통령을 어떻게 죽일 거야?" 그의 말에 가시가 박혀 있다. 갑식이는 개개 풀린 눈으로 그를 맞바라본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며 접시에 담긴 무언가를 집어들고는 흔들며 외친다. "이 오이로라도 죽여야지."

이석기와 그의 '예비 반란군'들은 능력이 없다. 요컨대 그들은 갑식이와 비슷하다. 그들이 내뱉었다고 떠돌고 있는 말들인 '전쟁 준비'니 '총기 제작'이니 하는 말들은 술 취한 갑식이가 내뱉은 '대통령 죽여버리겠어'나 '이 오이로라도 죽여야지'와 다르지 않다. 요컨대 그들은 내란 음모를 실행할 구체적인 계획이나 실행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국정원 전사들이 이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다. 그들은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이석기 의원과 RO를 내란 예비 음모죄로 몰아부치기에는 혐의 입증이나 증거 확보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점도 모르지 않았을 게다. 그런데도 그들이 내란 예비 음모라는 '폭탄'을 떠뜨린 이유가 무얼까.

무엇보다 '폭탄'이 터진 시점과 그 강도를 이해해야 한다. '폭탄'이 터진 지 48시간이 지났다. 그전까지 국정원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그들은 '셀프'이긴 하지만 '개혁'하는 시늉이라도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대 조직의 감축이나 구조 조정은 불가피한 수순이었다. 이석기 의원 등이 포함된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공공연히 국정원 해체까지 외치고 있었다. 조직의 '미친' 존재감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들은 '폭탄'을 메가톤급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론은 악화할 대로 악화한 상태였다. 국가보안법으로 무장한 '공포탄' 정도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메가톤급 '폭탄'이 아니면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일이 요원했다. 그들은 '내란'과 '음모'라는 음습한 말이 불러올 후폭풍이 간절했다.

마침내 그들은 '폭탄'을 터뜨렸다. 모든 상황이 그들의 계산대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은 '내란', '음모', '총기', '파괴', '타격' 등의 전시를 방불게 하는 말들로 도배되었다.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국정원이 터뜨린 '폭탄'의 후폭풍이 어디까지 불어닥칠지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다. 그들의 작전은 완벽한 성공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왜 국정원 전사들은 3년을 기다렸을까. 그토록 숭고한 마음으로 나라를 보위하려는 그들 아닌가. '반란의 씨'가 보이면, 바로 그 순간 단호하게 그 씨를 척결해야 하는 게 그들의 임무 아닌가. 그러니 그들에게 '내란 방조죄'라도 물어야 하는 게 아닌가. 3년을 기다린 끝에 '폭탄'을 터뜨린 시점이 고도로 정치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국정원 전사들은 지금 하나다. 작년, 그들은 한 덩어리로 똘똘 뭉쳤다. 하나가 된 그들은 자판기를 두드리며 '종북 좌파'와 싸우는 데 여념이 없었다. 단축키 'Ctrl+X'와 'Ctrl+V'가 그들이 쓴 강력한 무기였다.

지금 나는 또 다른 국정원 전사들을 상상한다. 날카로운 이빨을 앞세운 보수 언론과 앵무새 방송 덕에 이석기 의원과 RO의 '내란 음모'는 점점 기정 사실화하고 있다. 그들 '반란군'은 소탕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종북 좌파의 씨를 말리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러니 부지런히 '폭탄'을 퍼날라야 한다.

자, 저 아름다운 '내란'과 '음모'와 '총기'를 'Ctrl+X'로 잘라내자. 그렇게 잘라낸 음모의 말들을 인터넷 포털과 언론사 누리집의 자유게시판에 'Ctrl+V'로 붙여넣기 하자. 조직의 명운이 우리 전사들의 손가락 끝에 달려 있다. 손가락 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날 때까지 '반란군' 섬멸에 전심 전력을 다 하자.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소탕 당한다. 전사들이여, 이를 악물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내란 예비 음모, #국가정보원, #이석기, #통합진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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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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