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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문의 남보타사로 가다 만난 하문대학

해창대교에서 바라 본 하문시
 해창대교에서 바라 본 하문시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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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하촌을 떠난 우리는 다시 하문으로 돌아간다. 하문으로 가기 위해서는 왔던 길을 되돌아 서양진 토루 관광 서비스 센터까지 가야 한다. 그곳에서 버스를 갈아탄 우리는 지방도를 한 시간쯤 달린다. 그러자 G76 장룡고속 용산 인터체인지가 나온다. 이곳으로 들어가니 하문, 장주, 남정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온다. 이곳에서 하문까지는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다. 이번에는 버스가 시간을 절약하려는지 중간에 휴게소엘 들리지 않는다. 장주를 지나고 하문시 해창구에 들어선 버스는 이내 해창대교를 건넌다.

하문섬으로 들어선 버스는 다시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노강로(鷺江路)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남보타사(南普陀寺)를 찾아간다. 보타는 보타락가(Botalaka)의 준말로 관세음보살이 거처하던 산 이름이다. 인도의 보타(락가)산이 중국으로 와 절강성 동쪽 끝에 있는 섬의 이름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 법우사(法雨寺)를 중심으로 관음신앙이 융성하게 되었다. 이 관음신앙이 더 남쪽으로 내려가 꽃을 피운 곳이 하문섬의 남보타사다.

하문대학
 하문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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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타사로 가려면 연무대교(演武大橋)를 지나 연무로로 들어서야 한다. 바닷가를 따라 세워진 연무대교가 특이하고 아름답다. 연무로를 따라가다 보니 하문대학이 나온다. 하문대학은 중국 남부의 명문대학으로 이공계와 상경계가 유명하다고 한다. 하문대학이 유명해진 것은 1920년 중반이다. 1921년에 세워진 하문대학의 2대 교장이 된 임문경(林文慶)이 명교수들을 초빙했기 때문이다. 1926년 북경으로부터 임어당(林語堂, Lin Yutang)을 초빙해 문과 주임에 임명한다. 그리고 작가 노신(魯迅)도 초빙한다. 당시 이과 주임으로 있던 유수기(劉樹杞)도 유명하다.

그러나 노신은 이듬해 교장 임문경, 이과 주임 유수기와의 갈등으로, 광주(廣州)에 있는 중산대학(中山大學)으로 떠난다. 이에 비해 임어당은 1895년 복건성 장주시에서 태어났고, 평생 복건성 그리고 바다 건너 대만과 인연을 맺으며 살았다. 그는 1916년 상해에 있던 세인트 존 대학(Saint John's University) 영문과를 졸업하고, 청화대학(淸華大學) 영문과 교수가 되었다. 1921년에는 하버드 대학에서 비교문학 석사를 받았고, 1922년에는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언어학 박사를 받았다. 그리고 1923년 귀국해 북경대학 영문과 주임교수가 되었으며 1926년 하문대학의 문학원장이 된 것이다.

1939년의 임어당
 1939년의 임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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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는 중국의 봉건 잔재를 버리고 신문화를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그는 1935년 이후 미국에 거주하면서 중국 철학과 삶의 지혜를 서양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때 나온 중요한 책이 <내 나라 내국민(吾國與吾民: My Country and My People)> <생활의 발견(生活的 藝術: The Importance of Living)>이었다. 1954년 싱가포르에서 남양대학(南洋大學)의 설립에 참여했고, 1966년 이후 고향인 복건성 건너편에 있는 대만에 거주하게 되었다. 1967년부터는 홍콩에 있는 중문대학(中文大學)의 연구교수로 활동했으며, 1976년 홍콩에서 죽었다.  

남보타사는 어떤 절인가?

하문대학을 지나 종고수도(鐘鼓隧道)에서 버스를 내린 우리는 남보타사로 들어간다. 종고수도라는 도로 이름은 남보타사의 종루와 고루가 이곳에 있어 생겨났다. 금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남보타사로 들어가는 길이 인산인해다. 중국 사람들의 소득이 높아지면서 여행객이 늘어났고, 유명 관광지마다 중국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복건성을 여행하면서 중국에도 레저와 여행붐이 조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중국 여행비가 일본이나 동남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싸졌다.

남보타사
 남보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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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의 일주문에 해당하는 석패방(石牌坊)을 들어가면서 보니 노도명산(鷺島名山)이라고 썼다. 그러고 보니 하문섬의 또 다른 이름이 노도인 모양이다. 남보타사를 감싸고 있는 뒷산의 이름은 오노봉(五老峰)이다. 남보타사 앞으로는 큰 연못이 있고, 그곳에 정자와 탑이 세워져 있다. 이 연못은 연지 겸 방생지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연꽃이 피어 있고, 연못에는 방생된 물고기와 남생이가 많이 보인다. 연못 옆의 만수탑(萬壽塔)은 11층으로 라마식으로 보인다.
   
남보타사는 당대(唐代) 말기에 창건되었으니 그 역사가 1100년쯤 된다. 청대(淸代) 초기에 전란으로 폐사되었다가 강희 22년(1684년) 다시 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때 절강성 보타산의 관음도량과 유사하게 관세음보살을 모시게 되었다. 남보타사가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1924년 회천법사(會泉法師)가 방장으로 부임하면서다. 그는 1925년 천왕전을 중건했고, 1930년 태허법사(太虛法師)가 대비전을 중건했으며, 1935년 전봉법사(轉逢法師)가 대웅보전을 중건했다.

천왕전
 천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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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타사에는 현재 세 개의 전각과 일곱 개의 당우가 있다. 광장을 지나 첫 번째 만나는 천왕전의 입구 좌우에는 한 쌍의 사자와 코끼리가 지키고 있다. 전각으로 들어가면 용화삼회(龍華三會)라는 현판이 보인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곳이 미륵보살을 모신 용화전 역할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전각의 양쪽에 4대천왕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의 천왕은 우리 절에서 보던 사대천왕과 유사한 점이 있다. 천왕전 뒤쪽에는 천불응신(千佛應身)이라는 현판이 보이고, 그 아래 위태보살(韋駄菩薩)을 모셨다. 위태보살은 불법을 수호하는 군신(軍神) 역할을 한다.

천왕전을 통해 마당으로 나오면 또 하나의 전각이 나타난다. 대웅보전이다. 법당의 이름은 안 보이고, 전면에 묘상장엄(妙相莊嚴)이라고 썼다. 자료에 의하면 이곳에 삼세불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삼세불이라면 과거 연등불, 현세 석가모니불, 미래 미륵불을 말하는데, 상호를 통해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안에 동방, 중앙, 서방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삼계불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대웅보전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대비전이 나온다. 대비전은 8각형으로 된 3층 전각이다. 관음보살을 모셨다.

불(佛)자가 새겨진 마애(磨崖)
 불(佛)자가 새겨진 마애(磨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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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세 전각을 지나면 법당(法堂)이 나온다. 일곱 개의 당우 중 하나다. 그 외 당우로는 종루, 고루, 나한당, 공덕루, 보조루 등이 있다. 나는 이제 산 쪽으로 올라간다. 불(佛)자가 새겨진 마애(磨崖)를 보기 위해서다. 이 길은 오노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이기도 하다. 중간에 '불법무변 오도중생(佛法無邊 普渡衆生)'이라는 각자도 보인다. 부처님의 법은 끝이 없어서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다. 이를 지나자 금칠을 한 불(佛)자가 벽에 크게 새겨져 있다. 가로 세로가 4m는 되겠다. 우리는 여기까지 올라간 다음 다른 길로 내려간다.

부처님께 드리는 공양물
 부처님께 드리는 공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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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인도식과 라마식을 결합한 이형석탑 두 기를 볼 수 있다. 내려오면서 나는 오를 때 보지 못한 당우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다시 대웅보전 옆을 지나 부처님께 드릴 공양물을 준비하는 대중들을 볼 수 있었다. 밥에다 둥근 원을 만들고 만(卍)자를 쓴 공양미가 있다. 복건 지방의 주먹밥 쫑즈(粽子)도 있다. 과일과 빵 그리고 꿀도 역시 공양물이다. 채소와 버섯, 견과류도 공양물이다. 최근에는 또한 과자도 공양물이 되고 있다. 그리고 꽃도 화환 또는 부케의 형태로 공양되고 있다. 정말로 화려한 밥상이다. 아니 공양상이다.

환도로 풍경구 황조해변의 저녁

"일국양제 통일방안" 입간판
 "일국양제 통일방안" 입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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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타사를 나온 우리는 버스를 타고 환도남로로 들어선다. 환도로(環島路)는 하문섬을 고리처럼 일주하는 도로고, 그 남쪽 부분을 환도남로라 부른다. 도로 바깥으로 가로수와 정원이 조성되어 있고, 그 바깥 바닷가를 따라 해수욕장이 펼쳐져 있다. 버스는 호리산(胡里山)과 백석(白石)을 지나 황조(黃厝)해변에서 멈춘다. 이곳에서 바다 건너 소금문도(小金門島)를 가장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금문도까지 거리가 7㎞ 밖에는 안 되지만 소금문도는 대만 땅이다.

그래서 황조해변에는 '일국양제 통일중국(一國兩制 統一中國)'이라는 커다란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나는 해수욕장으로 내려가 본다. 저녁나절이라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바다를 지켜주는 여신 마조 동상이 있다. 복건성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신이다. 물때가 썰물인 것 같아 나는 바다 쪽으로 더 들어가 본다. 해수욕장의 길이는 길지만 폭은 좁은 편이다. 그래도 애들은 더위를 식히며 즐겁게 놀고 있다.

황조 해변 너머로 보이는 소금문도
 황조 해변 너머로 보이는 소금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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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조해변과 소금문도 사이로 국경이 지나지만, 양안 사이에 긴장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다. 이제 중국과 대만은 대결이 아닌 협력의 길을 걷고 있다. 우편과 통신이 가능하고, 상품 교역이 이루어지며, 상호 왕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대만과 복건성은 역사적으로 왕래와 교류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현재 정치적인 이유로 그러한 교류가 전보다 줄기는 했지만, 바다를 마주보고 있는 두 지역은 통일의 교두보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해변을 나와 공원지역을 지나다 나는 마라톤 주자 동상들을 볼 수 있었다. 유명 마라토너들을 조소상 형태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 환도로의 명물이 되었다. 하문 국제 마라톤은 2003년 시작되었으며, 매년 1월 이곳 환도로에서 펼쳐진다. 참가자수는 5만에서 7만 명 정도다. 해변구경을 마친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국제회의전시장 앞으로 간다. 실내와 실외 전시장을 합쳐 15만㎥에 이르는 대규모 회의 전시 공연 컨벤션 센터로, 15개의 전시관, 20개가 넘는 회의실, 리조트 호텔, 콘서트 홀 등이 있다.

마라톤 주자 동상
 마라톤 주자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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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보고 저녁을 먹은 다음 우리는 하문공항으로 향한다. 무이산으로 가기 위해서다. 하문공항의 공식 명칭은 하문 고기국제기장(高崎國際機場)이다. 길은 해안을 따라 환도동로로 이어진다. 벌써 어둠이 깔려 하문의 야경이 아름답다. 공항에 도착해 우리는 수속을 밟는다. 밤 9시 30분 비행기로, 40분이면 무이산 공항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비행기가 1시간 반이나 지연되어 11시에 떠날 수 있었다. 그들의 표현으로 하면 뇌전(雷電, Bad Weather) 때문이었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 때문에 이륙이 늦어졌던 것이다. 나중에 무이산에 도착해 보니 활주로에 물기가 흥건하다. 비가 꽤나 많이 온 모양이다. 공항을 나와 짐을 찾으니 11시 50분, 버스를 타고 호텔에 도착하니 12시 반이 다 되었다. 무이산 천유봉 등반이 아침 8시부턴데, 정말 큰일이다. 시간에 맞추려면 아침 7시 반에는 호텔을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강행군 여행이다.


태그:#하문시, #하문대학, #임어당, #남보타사, #황조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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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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