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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영산강변. 나주배 외엔 별다른 게 없는 지역이라 여겨졌던 나주엔 옛 문화유적이 즐비하다. 역사문화의 고장이다.
 나주 영산강변. 나주배 외엔 별다른 게 없는 지역이라 여겨졌던 나주엔 옛 문화유적이 즐비하다. 역사문화의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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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나주는 한동안 여행객들의 마음에서 조금 밀려나 있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녔으면서도 크게 단장하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금세 생각이 달라진다. 고대 영산강문화를 꽃피웠던 나주는 크고 작은 문화유적을 곳곳에 품고 있다.

'천년 목사고을' 나주로 간다. 지난 14일이다. 나주는 고려 성종(983년) 때 설치한 12목 가운데 하나였던 나주목(羅州牧)이 설치됐던 곳이다. 1896년 나주관찰부가 폐지될 때까지 1000년 동안 이어졌다. 이 기간 나주목사 306명이 부임해 와 호남지방을 다스렸다. 나주를 '천년고도', '목사골'로 부르는 이유다.

먼저 찾아간 곳은 금성관. 나주목의 객사로 사신과 관리들이 묵어가던 곳이다. 1487년부터 3년 동안 재임했던 나주목사 이유인이 세웠다. 일제강점기 땐 나주군 청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1976년 해체하고 다시 지었다.

나주목의 객사였던 금성관. 사신과 관리들이 묵어가던 곳이다.
 나주목의 객사였던 금성관. 사신과 관리들이 묵어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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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화루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박석이 깔린 너른 공간이 펼쳐진다. 그 너머에 객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툭 트인 공간으로 산들바람이 지난다. 객사 마루에 앉아 잠시 여유를 맛본다.

지척에 정수루가 있다. 2층 누각에 북이 매달려 있다. 읍성의 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려주던 북이다. 그 옆으로 나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나주목문화관이 있다. 나주목사의 행차 장면을 모형으로 실감나게 재현해 놓았다.

목사내아. 나주목사의 관저이면서 살림집이었다. 지금은 여행객들의 숙박시설로 개방되고 있다.
 목사내아. 나주목사의 관저이면서 살림집이었다. 지금은 여행객들의 숙박시설로 개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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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목문화관 옆에 있는 목사내아(牧使內衙)는 나주목사의 관저이면서 살림집이다. 거문고 소리에 학이 춤을 추는 곳이라고 금학헌(琴鶴軒)이라 불린다. 지은 지 200여 년 됐다. 세월의 더께가 묻어난다. 그만큼 아늑하고 평온한 느낌을 준다. 건물이 호두나무를 중심으로 ㄷ자로 배치돼 있다.

관선시대 군수들의 관사로 쓰이면서 변형됐던 것을 최근 복원했다. 그것도 관광객들이 문화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숙박시설로 바꿨다. 문화재청의 승인을 얻고 전문가의 고증을 거쳤다. 여기서 하룻밤 묵으면 몇 백 년을 거슬러 나주목사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것 같다. 선인들의 지혜도 배우며 상큼한 기운도 얻을 수 있겠다.

목사내아 내부. 고풍적인 멋이 묻어난다.
 목사내아 내부. 고풍적인 멋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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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내아의 벼락맞은 팽나무. 행운을 가져다 주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목사내아의 벼락맞은 팽나무. 행운을 가져다 주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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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아 담장과 나란히 선 나무가 압권이다. 덩치도 덩치지만 수령이 500년이나 됐다. 나주의 역사와 함께 내아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지켜봤을, 벼락 맞은 팽나무다. 벼락을 맞아 파인 곳을 황토로 봉합하고 사슬로 묶어 지탱하는 수술을 받았다.

벼락 맞은 이 나무가 예부터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전해진다. 나도 살짝 눈을 감고 나지막이 소망을 빌어본다.

목사내아에서 나와 남고문으로 간다. 천변에 오래 된 집이 눈길을 끈다. 청태 낀 돌담에 능소화가 활짝 피어있다. 뜨거운 햇살에 반짝이는 꽃이 볼수록 요염하다.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돌로 쌓은 성인 남고문은 늠름해 보인다.

고택과 어우러진 능소화. 꽃이 요염해 보인다.
 고택과 어우러진 능소화. 꽃이 요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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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고문.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성이었다.
 남고문.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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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햇살이 아직 짱짱하다. 급할 것도 없다. 하늘하늘 걸었는데 금세 나주시청 앞이다. 발걸음이 자연스레 완사천으로 향한다.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의 얘기가 서린 샘이다. 태봉국 궁예의 장군으로 있던 왕건이 이 샘에서 처녀에게 물 한 그릇을 청했는데, 처녀가 버들잎을 띄운 물 한바가지를 건넸다는 얘기다.

그날의 인연으로 왕건이 나중에 이 처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가 장화왕후 오씨부인이다. 완사천의 물이 사랑과 꿈을 이뤄준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것도 이런 연유다. 이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옆에 서 있다.

왕건과 오씨처녀 조형물. 완사천 옆에 있다.
 왕건과 오씨처녀 조형물. 완사천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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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이제부터 영산포로 접어든다. 옛날 영산포는 호남 최대의 포구였다. 영산강을 따라 뱃길이 이어져 홍어와 젓갈의 집산지였다. 하루 수십 척의 배가 드나들면서 선창도 북적거렸다. 밤엔 휘황찬란했다.

그러나 1976년 영산강하구언 건설을 위한 둑막이 공사가 시작되면서 뱃길이 끊겼다. 중개인들의 발길도 뜸해지고 점포도 하나씩 문을 닫았다. 형형색색의 불빛도 꺼졌다.

영산포의 옛 영화를 영산포등대가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이 등대는 일제강점기인 1915년 세워졌다. 우리나라 내륙 하천가에 있는 유일한 등대다. 영산강에 뱃길이 끊긴 수위 관측시설로 사용됐다. 이 등대 앞으로 영산강을 유람하는 황포돛배가 정박해 있다.

홍어. 고려시대 공도정책이 강변마을인 영산포를 삭힌 홍어의 본고장으로 만들었다.
 홍어. 고려시대 공도정책이 강변마을인 영산포를 삭힌 홍어의 본고장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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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포는 또 삭힌 홍어의 본고장이다. 고려 말 왜구를 피해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으로 이주해 온 섬사람들을 따라 홍어가 들어왔다.

흑산도 근해에서 잡히던 홍어가 뱃길을 따라 오는 동안 변질됐다고 버릴 수는 없는 일. 어부들이 조심스럽게 먹어봤더니 탈이 나지 않았다. 톡 쏘는 알싸한 맛도 매력이었다. 오늘날 좋고 싫고가 확연히 갈리는 삭힌 홍어의 등장배경이다.

영산포 벽화거리. 지난해 고종석 사건 이후 지역 이미지 쇄신을 위해 변신을 꾀하고 있다.
 영산포 벽화거리. 지난해 고종석 사건 이후 지역 이미지 쇄신을 위해 변신을 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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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철도공원의 증기기관열차. 폐선 된 역사를 활용해 공원으로 꾸몄다.
 나주철도공원의 증기기관열차. 폐선 된 역사를 활용해 공원으로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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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포 거리도 최근 많이 변했다. 건물 곳곳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옛 영산포역에는 나주철도공원이 들어섰다. 한때 고속열차까지 다니던 철길이 옮겨지면서 가능했다. 일부 구간에 폐철도가 남아있고 증기기관열차도 전시돼 있다. 애틋하다.

더 이상 기차가 지나지 않는 철길을 뉘엿뉘엿 걸으며 옛 영산포를 추억하기에 그만이다. 폐선 부지를 따라 놓인 산책길도 예쁘다.

발길 닿는 곳마다 역사의 숨결이 오롯이 스며있고 옛 추억의 실타래도 하나씩 풀어 새록새록 떠오르게 하는 나주다.

나주철도공원. 폐선부지에 산책로가 예쁘게 놓여 있다.
 나주철도공원. 폐선부지에 산책로가 예쁘게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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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포구 전경. 옛 영화는 사라지고 영산포등대와 관광용 황포돛배가 서 있다.
 영산포구 전경. 옛 영화는 사라지고 영산포등대와 관광용 황포돛배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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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찾아가는길
호남고속국도 광산나들목에서 나주로 간다. 광주-목포간 1번국도를 타고 나주대교를 건너 나주중앙요양병원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금성관과 목사내아로 연결된다.



태그:#목사내아, #금성관, #남고문, #완사천, #영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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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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