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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관술을 거기 모인 사람들은 혁명가라 칭 했습니다.
 이관술을 거기 모인 사람들은 혁명가라 칭 했습니다.
ⓒ 행사 전단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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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안재성과 함께가는 울산역사기행.'

한 페이스북 친구가 선전물을 하나 올렸습니다. 제 눈에 띈 건 소설가 안재성 작가가 아니라 그 아래 쓰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잊혀진 울산의 혁명가 이관술.' 그 문장에 제 마음의 시선이 머물렀습니다. 소설가 안재성 작가도 누군지 모르지만 혁명가의 삶을 살았다는 이관술에 대해서도 몰랐습니다. 아니, 어떤 삶을 살아야 혁명가가 되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이관술 이란 인물이 어떤 인물이기에 혁명가였고, 수많은 혁명가들이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는데 그는 왜 잊힌 걸까'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참가비 1만 원을 준비해 모임 장소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범서읍 선바위 휴게소로 오라고 했습니다. 동구에서 같이 승합해 가실분 없으신가 찾아봤습니다. 문의를 하니 행사 담당이 동구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잘 됐습니다. 지난 14일 낮 12시 30분 함께 갈 분을 만나 승용차를 타고 기행할 장소로 갔습니다. 30여 명 정도 되는 인원이 모였습니다. 울산에는 선바위라는 유원지가 있습니다. 흐르는 강 한가운데 산 높이 만큼 우뚝 솟은 바위로 된 섬. 그곳을 그곳 분들은 선바위라 불렀습니다. 그 옆에 선바위 휴게소가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안재성입니다. 저는 그동안 수많은 인물을 탐구하고 책으로 엮어보기도 했는데요. 그중에 이관술 선생이 가장 마음에 남는 분 입니다. 처음엔 '조국엔 나의 감옥 밖엔 없었다'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가 더 보강해 '이관술'이란 제목으로 다시 펴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후텁지근한 날씨였습니다. 간혹 비가 내리기도 했습니다. 안재성 작가는 말을 이어 갔습니다.

"이관술 선생은 이곳 범서읍 입암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관술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기로 소문이 나있었습니다. 선생은 겸손하고 성실한 분이 셨습니다."

휴게소 자리 하나를 빌려 모두 앉아 잠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생가를 방문하러 갔습니다. 생가는 집터에 새로 지은듯한 현대식 건물로 돼 있었습니다. 그 동네는 300여 년간 이씨 집성촌이라 했습니다. 이관술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관술의 친척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이관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친척은 이야기하면서도 조심스러워 했습니다. 혁명가의 삶을 살아 그런가 생각됐습니다.

"저는 가족이지만 작고하신 그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조심스럽습니다. 우리 동네는 예로부터 유림활동을 많이 한 동네입니다. 어느 분들은 독립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광복이 맞다고 봅니다. 독립은 떨어져 나오는 뜻을 가졌고 광복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독립보다는 광복이 맞지 않나 생각됩니다."

1930년대에 '주 40시간 노동' 주장

나무숲 사이에 방치된 비석터 선바위 휴게소가 있는 주변에 이관술 선생의 비석 터가 있었습니다. 비석도 없었고 관리가 안되다 보니 나무와 잡초만 우거져 있었습니다.
▲ 나무숲 사이에 방치된 비석터 선바위 휴게소가 있는 주변에 이관술 선생의 비석 터가 있었습니다. 비석도 없었고 관리가 안되다 보니 나무와 잡초만 우거져 있었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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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은 아버지가 애써 반대함에도 사범대와 일본으로 유학까지 다녀와 여고 교사가 돼 교직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이관술은 일본 유학시절 만난 사회주의자에게 영향을 받아 유학을 끝내고 고향에 잠시 인사하러 들렀다가 곧장 서울로 가서 반일운동에 가담했다고 합니다.

그는 1932년부터 조직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관술은 주로 노동자와 학생운동을 조직하는데 힘을 쏟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일제의 탄압으로 와해됐고, 그 과정서 일제에 체포돼 온갖 고초를 겪게 됐습니다. 1934년 출소 후 그는 주로 노동자의 권리를 찾는 데 주력합니다. 요즘 대기업을 중심으로 주 40시간 노동제가 시행되고 있는데 이관술은 이미 그때 주 40시간 노동제에 대해 주장했다고하니 정말 놀라웠습니다. 노동운동에 주력하다가 1936년 12월 하순께 같이 활동하던 이재유가 검거되고 맙니다. 다행히도 이관술은 강원도 산속으로 숨어 위기를 모면합니다.

"이 안에 비석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역 활동가 한분이 건설 자재가 놓여 있는 곳을 가리키며 그곳에 비석이 묻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 "이 안에 비석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역 활동가 한분이 건설 자재가 놓여 있는 곳을 가리키며 그곳에 비석이 묻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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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은 대전·대구·서울을 다니며 조직운동에 참여합니다. 그러다 1941년 1월 다시 감옥에 갇히고 감옥에서 폐결핵을 얻게 됩니다. 1943년 11월 가석방돼 울산 고향집에 내려와 요양하다 일본 순사의 감시망을 따돌리고 피신하게 됩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이 됐고 일제가 물러나 더 자유로이 활동할 줄 알았는데 이번엔 미군정이 그의 활동을 감시합니다. 미군정은 위조지폐 사건에 이관술을 엮어 조작해 체포합니다. 그는 노동자 파업과 대구항쟁을 주도하지만 미군정 통치 아래서 열린 재판을 그를 무기징역형에 처하고 맙니다.

"이관술 선생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보름이 지난 즈음에 갑자기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48세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형이 집행됐고, 그후 이관술 가족의 삶은 매우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역사기행 현장에는 이관술 선생의 외손녀도 있었습니다.

"우리 어머니 소원은 할아버지 명예 회복과 땅에 뭍혀있는 비석을 파내 다시 세우는 겁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많이 도와 주십시오."

안재성 작가에 의하면 뜻있는 지인들이 힘을 모아 비석을 세웠지만 1992년 광복회란 관변단체가 와서 자진 철거하지 않으면 부숴 버리겠다고 해서 집 앞 밭에다 묻어뒀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관술 생가를 방문한 뒤 다시 선바위 휴게소로 갔습니다. 선바위 휴게소 옆 우거진 나무숲 안에 이관술 비석 터가 있었습니다. 방치된 지 오래 됐는지 비석 터 주변으로 온통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서 비석 자리로 들어서지 않고서는 밖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곳에는 비석 터만 있고 비석은 없었습니다.

"사회주의 운동가의 덕목은..."

안재성 작가가 이관술 선생 생가에 대해 설명 사진기를 든 분이 안재성 작가 입니다.
▲ 안재성 작가가 이관술 선생 생가에 대해 설명 사진기를 든 분이 안재성 작가 입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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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을 처음 보는 저로서는 참 답답한 현실을 어찌 이해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자유 대한민국 이라는 우리나라에, 민주주의라는 조국에 해방이 된지 68년, 휴전된 지 6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면서 이념논쟁이 지속되고 있으니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국가 아닙니까? 헌법에 사상의 자유란게 없습니까? 어째서 일제시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부분을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핍박할 수 있나요. 일제 36년 세월이 있었고 45년 해방과 동시에 미군정이 통치했었고 지금까지 한반도는 분단돼 있는 상태로 6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관술 선생은 학습과 융통성을 중요 시 했습니다. 선생은 사회주의 운동가는 소박하고 정결하며 너그럽고 성실해 대중들에게 신뢰를 얻어야 한다고, 부드럽고 공손한 태도야말로 사회주의 운동가의 기본 덕목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을 자본주의 사회구조 체제라 여깁니다. 여기서 1964년 태어났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 가진 사람들만이 사람답게 살수 있는 구조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모릅니다.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저도 몰랐고 많은 사람들이 몰랐던 이관술이라는 사람의 일생을 잠시나마 살펴봤습니다. 자신의 삶의 안위보다는 핍박받는 노동자 입장에서서 헌신했던 그런 사람이야말로 저는 존경받아야 할 사람이라 여깁니다. 사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품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십수 년간 불법파견 하청업체를 회사 안에다 무분별하게 두고서 노동자를 간접고용 상태로 착취하면서도 처벌받지 않는 현대차라는 대기업 총수보다 이관술이라는 사람의 인품이 훨씬 더 높게 평가됩니다.

다른 지역에서 오셨다는 이관술 선생의 외손녀의 말처럼 그의 늙은 딸이 생의 마지막 소원은 아버지의 명예회복과 땅에 붙혀있는 비석이라도 파내 그냥 거기다 세워 두는 것이라 합니다. 비석 하나 세워 두는 것도 어떤 단체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그건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나라에서 살고있는 사람들 끼리 이제 그만 헐뜯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관술 선생의 외손녀 그는 다른 지역에서 이런 행사가 있다고 해서 소식듣고 찾아왔습니다.
▲ 이관술 선생의 외손녀 그는 다른 지역에서 이런 행사가 있다고 해서 소식듣고 찾아왔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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