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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이남 최초의 2층 학교 건물인 계성학교의 아담스관 건물 오른쪽 뒤로 본관 건물이 보이는 풍경
 한강 이남 최초의 2층 학교 건물인 계성학교의 아담스관 건물 오른쪽 뒤로 본관 건물이 보이는 풍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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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중학교 때인지 고등학교 때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음악 시간에 이 노래를 배웠다는 사실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제목은 더욱 분명하게 뇌리에 박혀 있다. <4월의 노래>.

<4월의 노래>를 배운 지 40년 이상이 흘렀다. 지금까지 나의 머리에는 <4월의 노래>가 독일 노래로 각인되어 왔다. '이름 없는 항구' 같은 이국적 표현 탓이기도 하겠지만, 결정적인 까닭은 '베르테르' 때문이다. 베르테르는 괴테나 히틀러만큼이나 유명한 독일인 아닌가.

<4월의 노래>가 독일 노래라고?

하지만 <4월의 노래>는 독일 노래가 아니다. 독일 민요 또는 독일  가곡에 우리말 가사를 붙인 것도 아니다. 작곡자도 한국인이고 작사가도 한국인이다. 6·25가 끝나갈 무렵 세상에 태어난 이 노래는 김순애 작곡, 박목월 작사의 한국 창작 가곡이다.

계성학교의 고색창연한 전통미를 잘 보여주는 풍경. 건물 앞에 3.1운동 기념탑이 보인다.
 계성학교의 고색창연한 전통미를 잘 보여주는 풍경. 건물 앞에 3.1운동 기념탑이 보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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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의 청록파 시인 박목월이 남긴 시에 <계성학교>가 있다. 물론 <나그네>만큼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작품이다. 그러나 대구의 계성학교를 졸업한 동문들에게만은 <나그네> 못지않게 애송되는 걸작이다.

어머니의 학교여, 우리들의 소년기는 고독하였다. 어둡고 부끄러운 하늘 밑에서 벽돌 냄새 시큰하게 풍기는 복도를 서성거리며… 연하고 가볍게 열리는 교실 문만이 우리의 전부였다. (중략)

어머니의 학교여. 개나리가 봉오리를 맺는 3월 초순에 우리는 떠나왔지만, 그날 미나리 냄새 풍기는 바람 속에서 우리가 다짐한 것은 하나의 씨앗이 되었다.

그 오월이면 솜꽃이 날리던 은백양도 젖으며 마르던 농구 코트도 이제는 꿈만 같지만, 꿈 같은 40여 년의 세월 속에서 우리는 늙은 나무로 굳어졌지만. (후략)

계성학교 본관의 성탄절 전후 야경
 계성학교 본관의 성탄절 전후 야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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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은 계성학교를 졸업했고, 잠시 모교에서 교사 생활도 했다. 박목월은 청소년기와 청년기 전반부를 보냈던 계성학교의 추억을 <계성학교>라는 시로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계성문학회는 2006년에 펴낸 <계성문학> 22호(개교 100주년 기념호)에 이 시를 '계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어 전 계성인이 읽고 감동하는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엔 얼룩소가 없다고?

박목월 이야기라면 빠뜨리고 지나갈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동요 <송아지>와 관련되는 논란이다. 손대업이 작곡한 이 노래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한 번도 부른 적이 없노라' 호언할 이가 없을 만큼 애창되는 '국민 동요'이지만, 한때 뜻밖의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우리나라 소는 누렁소인데 얼룩소 운운하였으니 잘못이라는 문제제기였다. 엄혹한 식민지 시대에 탈정치적인 <나그네>류의 음풍농월을 읊은 시인이다 보니 소까지도 민족적 정서를 왜곡한 채 얼룩소를 시에 등장시켰다는 힐난이었다. 그렇다면 정지용의 <향수>는 무엇인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뿐만이 아니다. 거의 1500년 전인 524년(법흥왕 11)에 세워진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2리의 '봉평비'도 얼룩소가 외국의 소가 아니라 우리나라 소라는 사실을 증언해준다. 국보 242호인 봉평비에는 "신라 6부는 얼룩소를 잡고 술을 빚었다"라는 대목이 있다. 물론 한문 표기이므로 얼룩소는 '반우(斑牛)'로 새겨져 있다.

경북 울진 봉평의 신라비. 법흥왕 때 세워진 이 비석에 '얼룩소를 빚고 술을 빚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사진은 경주박물관에 전시된 모형을 찍은 것이다.
 경북 울진 봉평의 신라비. 법흥왕 때 세워진 이 비석에 '얼룩소를 빚고 술을 빚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사진은 경주박물관에 전시된 모형을 찍은 것이다.
ⓒ 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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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소는 대부분이 황소이기 때문에 빛깔이 누렇다. 하지만 흑소도 있고 칡소도 있다. 몸체가 갈색이고 검은 줄무늬가 얼룩덜룩한 칡소가 바로 얼룩소이다. 따라서 어릴적 들판에서 본 얼룩소를 글감으로 삼아 아이들을 위한 시를 쓴 박목월에게 쏟아진 '얼룩소는 외국 소인데 그것도 모르고 동시 소재로 삼았냐?' 하는 비난은 근거 없는 힐난이라 할 것이다.

동네에서 제일 가는 어린 음악대

계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한 이가 창작해낸 또 다른 '국민 동요'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역시 <송아지>처럼,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그 제목만 듣고도 한결같이 기억해내는 이 노래는 바로 <어린 음악대>이다. 

따따따 따따따 주먹손으로
따따따 따따따 나팔 붑니다
우리들은 어린 음악대
동네 안에 제일 가지요

쿵짝짝 쿵짝짝 둥근 차돌로
쿵짝짝 쿵짝짝 북을 칩니다
구경꾼은 모여드는데
어른들은 하나 없지요

김성도가 작사, 작곡한 <어린 음악대>는 그가 연희전문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20세에 만들어졌다. 연희전문 졸업 이후 계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한 김성도는 안데르센 전집과 그림 동화집을 우리나라에서 처음 번역 소개하여 아동문학계에 지대한 공로를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 동화작가이다. 강소천이 노랫말을 쓴 <보슬비의 속삭임>도 김성도가 작곡했다.

나는 나는 갈 테야, 연못으로 갈 테야.
동그라미 그리러 연못으로 갈 테야.
나는 나는 갈 테야, 꽃밭으로 갈 테야.
꽃봉오리 만지러 꽃밭으로 갈 테야.

계성학교 본관의 모습. 김성도 선생은 이 건물 3층에 자리잡고 있던 계성도서관의 관장으로 근무했다.
 계성학교 본관의 모습. 김성도 선생은 이 건물 3층에 자리잡고 있던 계성도서관의 관장으로 근무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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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학교 교정에는 1908년에 건축된 아담스관이 있다. 이 건물은 한강 이남에서는 최초로 지어진 2층 교사(校舍)로 대구시 유형문화재 45호로 등록되어 있다. 아담스관 건축 직후에 세워진 맥퍼슨관과 핸더슨관도 각각 유형문화재 46호, 47호로 지정되어 있다. 개교한 지 107년을 맞는 이 학교의 역사는 세 건물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될 만하다.

이 학교 교정에는 3·1운동기념탑도 세워져 있다. 계성학교에 3·1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는 것은 1919년 3월 8일부터 일어난 대구 지역의 독립만세운동 때 일제의 감옥에 갇힌 76명 중 44명이 이 학교 전·현직 교사이거나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1919년 독립만세 때 대구 투옥자 76명 중 44명이 계성학교 출신

그런가 하면, 이 학교 교정에는 보일듯 말듯 나무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기념비도 있어 눈길을 끈다. '2軍 創設地(2군 창설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다. 이 비석은 1954년 10월 31일, 계성학교 교정에서 2군사령부가 창설된 사실을 말해준다. 박목월과 김성도의 노래가 교정을 맴도는 계성학교는 이래저래 사람들의 발길을 끌 만한 훌륭한 답사지인 셈이다.


태그:#김성도, #박목월, #계성학교, #어린음악대, #4월의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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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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