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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산복도로에서 매일 아침 어린이 통학지도를 한다는 남성의 사진을 찍어올렸다. 이번 취재의 시작이었다.
 누군가 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산복도로에서 매일 아침 어린이 통학지도를 한다는 남성의 사진을 찍어올렸다. 이번 취재의 시작이었다.
ⓒ facebook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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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선배가 페이스북에서 가져왔다며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은 횡단보도에 아이들이 건너는 모습. 버스가 멈춰서 있었고, 아이들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책가방과 준비물 가방을 보아서는 등굣길로 짐작됐다. 한쪽의 남성은 손을 번쩍 들고 차를 세우라는 듯 손짓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사진 밑에는 설명도 달려있었다.

"아침 등굣길에 스님께서 하루도 빠짐없이 건널목에서 길을 건너는 학생들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지질 않습니다. 그 사연을 들어보았습니다. 스님이 한 아이가 이 건널목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현장을 목격하셨다고 합니다. 참혹한 현장이었다고 합니다. 스님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이 건널목에서 아이들을 보호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궁금하긴 엄청 궁금했는데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단서라고는 이곳이 부산의 산복도로라는 것 뿐이었다. 사진의 배경만을 갖고 넓은 산복도로 일대를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멈춰선 버스 번호가 보였다. 매일 통학지도를 한다면 같은 노선을 수시로 운행하는 버스기사들은 그를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38번을 운행하는 부일여객으로 전화를 했더니 전화를 받은 기사가 이 남성을 안다고 말했다.

"스님인지는 모르겠지만, 매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나와서 초등학생들 지나갈 때 교통정리를 하시는 분이 계세요. 시간은 보통 오전 7시 30분정도부터 나와 있던데, 장소는 부산 서중학교와 동일초등학교 인근에 위치한 횡단보도입니다."

27일 오전 7시 30분에 버스 기사가 말해준 횡단보도를 찾았다. 사진에서 보던 그 횡단보도가 분명했다. 횡단보도는 평범해 보였다. 교통 신호등이 있었고, 사람이 없으면 차들은 신호를 어기고 지나갔다. 산을 깎아 만들어 구불구불한 산복도로에서 그나마 곧게 뻗은 길이라 차량들은 다른 곳 보다 조금 더 속도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오전 7시 50분에 나타난 남성... "혹시 스님이세요?"

부산 산복도로 '배트맨 아저씨' 김명섭씨의 모자에는 '어린이는 희망입니다'란 글귀가 붙어있다.
 부산 산복도로 '배트맨 아저씨' 김명섭씨의 모자에는 '어린이는 희망입니다'란 글귀가 붙어있다.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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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간을 맞춰서 온 것 같은데 통학 지도를 하는 남성의 모습은 없었다. 지나가는 주민이 보였다. 주민에게 그를 아냐고 물어보자 반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가 오전 8시쯤이면 어김없이 나타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후 정확히 오전 7시 50분이 되자 그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 남자 특이했다. 나타나자 마자 횡단보도에 선 아이들과 악수를 나눴다. 지나가는 버스기사와 환경미화차량 기사들도 아저씨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특히 아이들과는 뭔가 반갑게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아이들과 하루이틀 본 사이가 아닌 듯 했다. 아이들 이름을 일일이 다 부르며 형제자매, 선생님, 학교 시험, 아침 반찬 등 매번 다른 이야기를 아이들과 나눴다. 신발끈이 풀린 아이는 무릎 꿇어 신발끈을 묶어주고, 그를 보자마자 "오줌"이라고 말하는 초등학생 1학년을 들고 화장실로 달렸다. 그런 뒤는 항상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사랑한다"고 잊지 않고 말했다.

아이들도 그에게 "아저씨, OO이는 벌써 학교 갔어요?" 내지는 "시험이 어려워서 잘못 쳤어요"라고 말했다. 그에게 다가섰다. 짧은 머리였지만 스님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먼저 "혹시 스님이시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그의 이름은 김명섭. 55세 남성인데 기자가 "김 선생님은…"하며 계속 질문을 던지자 "그냥 아저씨라고 하세요, 여기선 다들 그렇게 부릅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아저씨는 1985년 3월부터 이곳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통학지도를 하고 있다. 사람들 말처럼 눈이 오고, 바람이 불어도 통학지도는 꼭 한다는 아저씨는 "28년 동안 아픈 적이 없단 말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아파도 합니다, 저한테는 이곳에 서 있는 게 더 편안하고 기쁩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횡단보도를 28년째 지키고 선 이유는?

27일 부산 수정동 산복도로에서 김명섭씨가 초등학생들의 등교시간에 맞춰 횡단보도에서 통학지도를 하고있다.
 27일 부산 수정동 산복도로에서 김명섭씨가 초등학생들의 등교시간에 맞춰 횡단보도에서 통학지도를 하고있다.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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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궁금했다. 정말 아이가 교통사고로 죽는 모습을 지켜봐서일까. 그의 대답은 달랐다. 1985년 봄, 산을 다녀오던 그는 좁은 길을 쌩쌩 달리는 차들 사이로 위태롭게 학교를 오가던 아이들을 봤다. 경찰이라도, 하물며 어른이라도 있어서 아이들이 안전하게 학교를 가게해주지 않을까 했는데 그런 사람들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하기로 했다.

뒤에 1990년대 들어 구청이 길을 조금 넓히고, 2001년에는 그가 학교에 건의해서 신호등도 만들어졌지만 그는 계속 같은 자리에 서 있다. 그럼 스님이란 소리는 어떻게 나온걸까. 추측은 이렇다. 그가 통학지도를 하는 곳 앞에 절이 있다. 매년 그 길에서 한두 명씩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은 아이들은 위해 제를 올려왔는데 어느 해부터인가 죽는 아이들이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스님이 알게 됐단다. 

이후 절의 노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매일 아침 통학지도를 하는 아저씨를 위해 이것저것 많이 챙겨줬다고 한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아저씨가 스님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을 수 있다. 하지만 아저씨는 직업이 없다.

"저는 '배트맨 아저씨'입니다"

28년째 부산 수정동 산복도로에서 어린이 통학지도를 하고 있는 김명섭씨. 김씨는 자신을 '배트맨 아저씨'라고 부르는 아이들이 좋다고 했다. 사진을 찍던 기자가 "이명박 전 대통령 닮으셨다"고 하니 "사실 그렇게 놀리는 애들도 있습니다"라며 웃었다.
 28년째 부산 수정동 산복도로에서 어린이 통학지도를 하고 있는 김명섭씨. 김씨는 자신을 '배트맨 아저씨'라고 부르는 아이들이 좋다고 했다. 사진을 찍던 기자가 "이명박 전 대통령 닮으셨다"고 하니 "사실 그렇게 놀리는 애들도 있습니다"라며 웃었다.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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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아저씨는 통학지도가 끝나면 매일 20km가 넘는 마라톤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28년을 해온 통학지도처럼 서예도 20여 년째 하고 있고, 마라톤은 5년째 하고 있다. 수익은 오미자차를 끓여 필요한 사람들에게 파는 돈인데,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전거로 배달하고 한 주에 3만5000원을 받는다.

그것도 오미자차를 끓이기 위해 약수를 길어 나르고, 약수에 하루 종일 오미자를 달여 만든단다. 대충 만들면 안 되니깐 그런다는데 걱정이 됐다. 걱정을 하는 기자를 아저씨는 오히려 이상하게 쳐다봤다.

"욕심 부리지 않고 딱 쓸 만큼만 채워가면서 사는 거지요. 원자력발전소를 보세요.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눈 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서 인의를 생각하지 않고 이익만 쫓다보니 국민이 불안해지는 겁니다.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면 만 백성이 행복한 거라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아저씨가 행복하다니 더 이상 물어볼 것도 없었다. 다만 무엇이 그리도 그를 행복하게 하는지가 궁금했다. 대답은 역시 "아이들"이었다. 그는 28년간 통학지도를 해오면서 봤던 꼬마가 어른이 된 후 아이를 데리고 와선 "엄마 학교 다닐 때부터 횡단보도 건너게 해주셨던 아저씨야" 하면서 인사시킬 때 말할 수 없는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어떤 사람이세요"란 질문에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배트맨 아저씨"라고 말했다. 자기도 모르겠는데 동네 유치원 꼬마들이 그를 그렇게 부르는 게 듣기가 좋단다. 그러면서 그는 "'커서 로봇과 배트맨이 되고 싶다'는 어린이들과, '개미는 왜 우리보다 작아요'를 물어오는 아이들을 위해서 끝까지 횡단보도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부산 산복도로 '배트맨 아저씨' 김명섭씨는 아이들이 건너는 횡단보도를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고 말했다.
 부산 산복도로 '배트맨 아저씨' 김명섭씨는 아이들이 건너는 횡단보도를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고 말했다.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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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산복도로, #배트맨 아저씨, #김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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