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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분을 넘게 걸어 길을 묻고 물어 겨우 금하굴을 찾았다. 이곳은 후백제의 시조인 견훤왕의 출생과 관련된 설화가 전한다. 석회암층에 발달한 석회동굴로 깊이는 23m이며 안타깝게도 동굴 내부와 바닥에는 두껍게 진흙이 덮여 있어 석순, 종유석 등의 동굴생성물은 확인할 수 없다.
 
가은읍
▲ 금하굴 가은읍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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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동굴처럼 보이는 이 굴이 후삼국의 영웅 중에 하나인 견훤왕의 출생과 관련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에 나는 잠시 경건해진다. 이곳 금하굴에는 전주 견씨(全州 甄氏)의 시조인 견훤왕의 탄생설화가 전한다.

갈전리 아차마을의 한 규수 방에 밤이면 이목이 수려한 초립동이 나타나 정을 통한 후 새벽이면 사라지기를 여러 번, 처녀는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모가 놀라 규수에게 초립동의 옷자락에 실을 꿴 바늘을 꽂도록 시킨 후, 실을 따라가 보니 금하굴에 커다란 금빛 지렁이가 있었다. 그 후로는 초립동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10개월이 지나 남자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견훤이다.
  
견훤왕
▲ 금하굴 안내석 견훤왕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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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서기900~935년까지 후백제의 왕으로 재위했으며, 관제를 정비하고 중국과의 국교를 맺고, 궁예의 후고구려와 충돌하며 세력 확장에 힘썼다. 후에 고려 왕건에게 투항했다. 왕건에게 자신의 아들인 신검왕의 토벌을 요청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는 본래 이(李)씨이며, 상주의 호족 아자개(阿慈介)의 장남이다. 상주군 가은현에서 태어났다. 신라 백성으로 공을 세워 장군이 되었는데,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892년 반기를 들고 일어나 여러 성을 공략하고, 무진주를 점령한 이후부터 독자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900년 완산주에 입성하여 국호를 후백제라 하고 정치체제를 갖추었다. 927년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함락하여 경애왕을 살해한 후, 효종의 아들인 김부를 경순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경순왕은 친 고려 정책을 고수하였으며, 신라의 민심은 고려의 왕건에게 기울어져갔다. 929년 고창에서 왕건의 군사에게 크게 패한 후부터 차츰 형세가 기울어 유능한 신하들이 계속 왕건에게 투항하고, 934년 웅진 이북의 30여 군현, 동해연안의 110여 성이 고려에 귀속했다.

이듬해 왕위 계승 문제로 맏아들 신검왕이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했으나 탈출했다. 그리고 스스로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여 상부 칭호와 양주를 식읍으로 받았다. 936년 왕건에게 아들인 신검왕의 토벌을 요청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나는 금하굴을 둘러 본 다음, 마을 안쪽에 있는 견훤의 옛 집터를 살펴보았다. 마을 입구에 있는 안내판에는 분명 금하굴, 금하정, 숭위전, 견휜의 집터를 알리는 문구와 표시가 있었지만, 도저히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변변한 표지판도 안내문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마을 주민들에게 길을 묻고 물어 겨우 찾아간 옛 집터에는 소를 키우는 우사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안내문도 없는 곳에 조금 큰 바위가 하나 있어 '이곳이 옛 집터에 있던 바위구나'라고 상상을 해 볼 수 있었다.

바위만 남아 있다
▲ 견훤왕의 집터 바위만 남아 있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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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전 영웅은 가고 없고 그 흔적은 어디에도 없으니 세상사 얼마나 허무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마을 입구에 금하굴이 있고, 그 앞에 지난 2002년 문경시가 건립한 사당인 '숭위전(崇威殿)'이 있어 추가로 그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숭위전에서는 매년 4월 10일에 전국에서 유일하게 견훤의 향사가 열린다. 사실 견훤왕릉은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있으나 그의 혼을 모신 사당은 그 동안 전국 어디에도 없었다,

가은읍
▲ 숭위전 가은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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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의 출생지인 문경시에서 그의 탄생설화가 있는 가은읍 금하굴 주변에 사당을 세운 것이다. 사당은 정면3칸, 측면1.5칸의 맞배지붕 형식이며 부지면적 6.6평에 건평 5평 정도의 작은 건물이다. 비록 볼품은 거의 없는 작은 건물이지만, 이곳에 있어 의미가 있는 곳이라 난 지금은 잊혀진 영웅 견훤왕을 향해 묵념을 하고 돌아 나왔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금하굴 주변은 너무 초라했고, 숭위전 역시도 규모가 생각보다 작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입구의 안내판에는 옛 집터가 있다는 표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안쪽 어디에도 구체적인 안내판도 표식도 없어 집터를 찾아서 헤매야했다. 어렵게 찾은 집터는 우사로 변해있어 황당했다.

또 하나 금하굴 앞에 있는 '금하정'이라는 정자는 이곳에 살던 순천 김씨들의 정자인데, 견훤과도 금하굴과도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위치도 그렇고 이름도 그렇고 약간의 불협화음(不協和音)을 내는 악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재미난 곳이다.

마을을 살펴본 나는 시냇물을 따라서 다시 가은읍내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6월 초순의 더운 날씨에 아주머니 두 명이 다슬기를 잡고 있었다. 물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도구로 조금씩 잡고 있는데, 온 식구가 한 끼의 식사량은 될 정도로 잡히는 것을 보니 이곳 물이 맑기는 맑은가 보다.   
 
다슬기 잡기
▲ 가은읍 다슬기 잡기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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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신발을 벗고 같이 잡아보고 싶었지만, 어린 남자아이도 하나 없는 곳에서 추태를 보이는 것 같아 사진만 찍고는 돌아서 다시 길을 걸었다. 아침에 잠시 걸었던 영강을 따라서 30분 넘게 걸어서 읍내에 닿았다. 정말 덥고 힘들다.

사무소
▲ 가은읍 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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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은읍사무소를 잠시 둘러 본 다음, 점심을 먹을까 고민을 하다가 시장으로 가서 약간의 과자와 음료수를 사서 먹고 마시고는 잠시 쉬었다. 더워서 힘들었지만, 저녁까지 행군을 하기 위해서는 쉬면서 에너지 보충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일단은 석탄박물관 가는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잠시 가다가 작은 찻집이 있어 들어갔다.

더운 날에 최고의 주전부리 중에 하나인 팥빙수를 시켜 시장에서 사온 과자랑 같이 먹으면서 한참을 쉬었다. 팥을 무척 좋아하는 나는 빵이나 빙과류는 언제나 팥이 든 것을 찾는다. 이곳의 팥빙수도 시원하고 맛있다. 많이 쉬었다. 이제 다시 길을 걷자
 
가은읍
▲ 팥빙수 가은읍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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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보이는 곳이 '가은역(加恩驛)'이다. 가은역은 가은선의 종착역이다. 개업 당시에는 가은면과 마성면에 걸쳐 있다고 하여 은성탄광(恩城炭鑛)으로 불리던 광업소 앞쪽에 있다고 하여 은성역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지난 1959년에 가은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4년에서 가은선 폐선으로 폐역이 되었고, 이후 문경시가 가은선을 매입했다. 현재는 문경시와 한국모노레일이 지난 2007년 업무협약을 맺고 기존 가은선 노반과 선로를 보수하여 가은-진남역 간 9.6㎞ 구간에 한꺼번에 200여명이 탈 수 있는 1대의 미니관광열차(도록코 열차, 광산이나 토목공사장에서 사용되던 광차(鑛車),mine tub)를 운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역사는 지난 2006년 등록문화재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1955년 건립한 역사는 출입구에 박공지붕을 올리고 측면에 대합실을 배치한 당시의 전형적인 간이역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출입구 양쪽으로는 기다란 수직 창을 배치했다. 그래서 작지만 아름다운 역사 중에 하나다.
  
문화유산이다
▲ 가은역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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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주거지로 용도가 바뀌면서 건립 당시의 원형이 다소 훼손되었다. 석탄 산업과 관련된 역사로 희소가치가 있으며 8·15광복 이후 건립한 철도 역사의 건축 기법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 건축적·철도사적 가치가 있다.

난 이런 간이역이 무척 좋다. 간혹 쓰이지 않는 간이역이나 학교 교실을 보면 개조하여 갤러리나 공연장, 찻집, 혹은 집으로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옛 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무척 중요한 일이지만, 현실에 맞게 쓰임새를 조금만 바꾸어 고전미가 있는 새로운 시설로 용도를 변경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가은역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덧붙이는 글 | 6월 9일 문경시 가은읍을 걷다



태그:#가은읍, #문경시, #후백제 , #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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