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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살아가는 데에 계획이 중요하다고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계획이 그대로 실현되는 일은 잘 없다. 경우엔 상상하지 못했던 수확을 찾곤 한다. 선교사인 곽상호(56·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목사와의 만남도 그랬다. 친구에게 "이곳에 한인 목사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엔 왜 이곳에 있는지를 듣고 싶었다. 첫 만남에서 "말라가(Málaga)는 잠시 4개월 거쳐 가는 길"이라는 말을 들었다.

실망하려던 찰나에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아비장(Abidjan)에서 15년 동안 선교를 했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동안 말라리아에 걸려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러면서도 "아프리카는 오지라 생각하는데 사실이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친다. 늦은 나이에도 바르셀로나에 교회 사역을 하러 간다며 이곳 말라가에서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었다. 녹록치 않은 삶을 산 이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특히 말라가를 어떻게 보고 느끼고 있을까.

곽상호(56) 선교사를 지난 달 말라가 메르세드 광장(Plaza de la merced)에서 만났다.
 곽상호(56) 선교사를 지난 달 말라가 메르세드 광장(Plaza de la merced)에서 만났다.
ⓒ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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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무신론자인 내가 신을 믿는 이들의 내면을 이해하고 진솔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 망설여졌다. 하지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그가 말라가에 남아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마음을 편히 먹었다.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인생의 가르침을 얻는다는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자는 생각으로 다시 만났다. "무엇이 당신의 삶을 그렇게 끌어 당겼는지"를 맨 처음 물었다.

"여자는 사랑을 먹고 살고, 남자는 꿈을 먹고 산다"

고신대 신학대학 1학년을 다니다 군대에 간 1976년으로 돌아간다. 정말로 좋아하던 사이였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연애하는 게 너무 좋아서 결혼까지 생각했을 정도였다.

휴가를 나와서 연애를 하면 고민거리가 있었다. 소득 차이였다. 돈이 없던 그에 비해 여자친구는 동대문시장 포목상 집 딸이었고, 돈이 많았다. 그는 군대에서 짤짤이를 해서 500원을 모아서 나왔단다. 커피 한 잔에 230원이라 커피를 사고 나면 돈이 남질 않는다. 그래서 여자 친구에게 많이 얻어먹곤 했다. 한 번은 부끄러워서 "남자가 돈 내야하는데 보기가 안 좋으니 가진 돈을 나에게 주면 내가 내면 되지 않냐"고 부탁해서 그렇게 '결제만' 하고 다녔다고.

한번은 내기를 했다. 개종을 시킬 목적으로 "네가 이기면 절에 가고, 내가 이기면 교회에 가자"고 했다. 절대 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내긴데, 졌다. 그래서 태릉 불암사를 찾았다. 경내를 가서 절을 거닐다 보니 법당에 있는 종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여자친구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스님에게 물으니 '절에 시주를 많이 해서 그렇다'고 하더라. 그때 딱 흔들리더라. 부자가 될지, 목자가 될지. 여자 친구도 "목사부인은 자신이 없다. 할 거 없으면 가계를 물려받으면 된다"고 말했지. 정말 고민이 많았지."

군대에서 있었던 일, 대학생활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웃음지었다.
 군대에서 있었던 일, 대학생활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웃음지었다.
ⓒ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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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에게 계속 빚지는 게 미안했다. 당시 군 월급 3천 원을 꼬박꼬박 모아 3만 원을 만들었다. 어느 날, 내무반에서 자고 일어나 보니 돈이 없어졌다. 도둑을 맞은 것이다. 하지만 낌새를 챌 수 있었다. 인사과에서 복무하던 그는 누가 돈을 훔쳐갈지, 손버릇이 나쁜 사람을 알고 있었다. 잡아서 추궁했다. 훔쳐간 사람이 만원을 돌려주면서 "나머지는 갚겠다"고 말했다.

무슨 이유일까. "내가 쓰려던 것도 아니고 애인에게 주려고 그랬던 거니 가져가라"고 했다. 상대방은 울면서 미안하고 감사하다고 했다. 그 길로 뒷산에 올라갔다.

"그때 하늘을 보니 푸르고 좋던데, 그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 용서할 만큼 기쁘고 희열이 넘칠 때가 없더라. 자연스럽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아프고 쓰라리지만 환희가 넘치시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 그러면서 나도 다른 길 안 보고 내 길 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됐어."

여자 친구와 헤어지면서 말했다. 사귄 지 2년 남짓 되는 날이었다. "여자는 사랑을 먹고 살지만 남자는 꿈을 먹고 산대." 제대 후, 목사 안수를 받고 '편한 길'인 국내 교회 목사의 길보다는 고된 선교사의 길을 택했다. 지금까지는 '꿈'을 좇아 살아왔다. 35살에 불어를 배우고 아프리카로 갔다. 말라리아로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다시 나이 55살에 스페인으로 왔다. 스페인어도 새로 배우고 있다.

사람이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과연, 신앙이라는 추상적인 힘 덕분일까. 한국에서 우리는 신앙의 이름 아래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종교인들을 많이 만난다. 곽 목사 그 자신도,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한다. 인터뷰 당시는 그와 동년배인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사건이 막 한국을 뒤흔들 때였다. 욕망이라는 주제 앞에서 자연스레 생각났다.

"확실히 나이가 들면 사람이 변한다. (동년배라는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윤창중씨가 갖고 있던 생각이나 그런 행동은, 본능이다. 일반인은 그걸 다른 방법으로 풀지만 그 사람에겐 권력이 있었으니…. 그 나이에 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본다면 '그냥 재수 없게 걸렸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나도 본능이 있다. 하지만, 젊을 때 만든 가치관이 바로 돼 있어 흔들리지 않는 것 같다."

15년 아프리카 생활... "아프리카 사람들은 동적(動的)이다"

15년 동안 아프리카에 있으면서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을 던지니 곽 목사는 손사래를 쳤다. 코트디부아르 아비장 시는 '아프리카의 파리'라 불리는 곳으로 월세가 2~3백 달러 하며 높은 빌딩이 솟아 있다고 말했다. 다만, 빈부격차가 극단적으로 심한데 미디어에는 못 사는 측면만 의도적으로 부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에 살면 (세계가) 잘 안 보인다. 가끔 한국의 친구들이 '한국 물정을 모른다'고 하는데 우리가 (한국) 들어가서 보면 친구들이 우물 안 개구리다. 아프리카에 있으면 유럽과 세계가 보인다. (아프리카는) 유럽과 중동의 지배를 받아서 문화와 종교의 짬뽕이다."

단적인 예로 곽 목사는 "한국 사람은 돈은 많은데 시간과 여유가 없다"고 한다. 반면 "아프리카 사람은 시간은 많은데 돈은 없다"고 말한다. 아프리카에 있을 당시, 차가 고장 날 때면 동네의 무허가 수리점을 찾는다. 정품 가게에는 수리할 부품이 없어서 폐차장에서 부품을 구해오는 무허가 수리점에 가는 것이다.

여기서 아프리카 특유의 문화가 나타난다. 정품이 정가로 10만 원이라면, 수리점에선 "폐차장에서 구해온다"고 처음에 12만 원을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작위다. 다른 날에 가면 같은 부위 같은 증상인데도 7만 원을 부르고, 어느 날은 5만 원을 부른다. 어떤 논리적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기분 따라 상대방 따라 바뀌는 것이다.

"내공이 쌓이니까 협상의 기술이 생긴다. 이 사람이 처음에 5만 원을 불러. 그러면 난 2만 원밖에 없으니 다음에 돈 모아서 오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이 불안해지니까 고민을 하다가 말해. 부속이 지금 없으니 부잣집 차에서라도 빼와서 고쳐 주겠다고. 그렇게까지 말하면서 2만 원을 받으려고 어떻게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쳐 오지."

대신 이런 호언장담을 한다는 건 내 차를 수리하다가도 사기를 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차를 맡기는 일이 절대 없다. 이 사람이 차를 수리해서 줄 때까지 끝까지 함께 동행한다. 안 그러면 부품이 어디가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니 말이다.

그는 한국은 물론 유럽, 아프리카의 장로교 교회를 전부 경험했다. 한국의 교회는 다 같이 찬양하고 기도하는 문화가 있고 그게 사람들에게 편하게 받아들여진다고 했다. '정적'이라고 표현했다. 유럽의 교회는 정말 아무것도 없이 조용하게 기도만 한다고 한다. '지적'이라고 표현했다. 아프리카의 교회는 어떨까. '동적'이라고 말한다.

"5년 동안 한인 교회를 맡다가 원주민 교회로 갔지. 예배시간이 모두 3시간이나 돼. 기도시간은 1시간이고. 그런데 이 사람들이 보니 기도를 하는데 춤을 추면서 하더라고. 그리고 1시간은 교회 안에서 물건을 팔거나, 간증을 하고 있었지. 한국 사람들이 유럽 교회에 가면 적응을 못하고 한국 교회를 찾지. 한국 사람에게 편한 교회 문화 때문인데, 이 사람들도 이 사람들에게 맞는 문화를 (교회 안에) 갖고 있었어."

"아프리카는 대신 인건비가 없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확실한 서비스 대신 인건비가 비싸더라" 흥미로운 정보가 많이 오갔다
 "아프리카는 대신 인건비가 없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확실한 서비스 대신 인건비가 비싸더라" 흥미로운 정보가 많이 오갔다
ⓒ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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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물론 아프리카, 아시아까지 말라가 안에

스페인에서 굳이 말라가로 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럴듯한 이유는 아니다. 말라가의 어학원 수업이 가장 저렴했기 때문이다. 실제 '어학원이 저렴해서' 이곳을 찾는 사람이 꽤 있다. 그런 경우 대개, 잠시 거쳐 가는 곳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곽 목사도 4개월을 거쳐갈 예정이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안달루시아 지방)가 지금 보면 유럽사람,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모든 민족과 종교와 문화가 어우러져 있다. 그런 게 눈에 보인다. 줄을 설 때는 유럽 같다가도 노는 걸 봐. 아프리카 같단 말이지. 거기다 오랫동안 중동에서 지배했다며. 중동의 문화와 인종도 있고. 종교(이슬람)도 있지. 가톨릭이 주 종교라지만 한국에서의 불교처럼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다. 종교가 없는 외국인도 많다."

본래 스페인을 선택한 것은 선교적인 측면이 강하기도 했다. 아프리카에 가려면 영어와 불어를 배워야 한다. 남미에 가려면 스페인어를 배워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에게 말라가, 세비야(Sevilla)를 중심으로 하는 스페인 안달루시아는 선교센터 입지로서 최상의 장소라는 의미다. 그래서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인류학적으로나 흥미로운 도시"라고 강조한다.

그가 말하던 중간, 한 사람이 다가왔다. 어두운 표정에 수염 아래엔 주름이 져 있었다.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등 뒤편에서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고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몇 사람들은 동전을 흔쾌히 내 주었다. 환경에 자극을 받아서일까. 대화 주제가 바뀌었다.

"(내 생각엔) 스페인은 저력이 있다. 잘 버틴다. 한국가면 스페인이 한국보다 못 사는 걸로 아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이곳 사람들도 한국이 잘 산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내가 볼 때 이곳 사람들은 기독교 문화 바탕으로 남을 배려하고 베풀고 하는 것이 습관적으로 배어 있다. 우리는 급성장해서 그런지 빈부격차가 크지 않은가."

국가보조금으로 운영되는 대학등록금 제도, 27유로를 내면 한 달에 무제한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교통카드, 집의 겉을 고치지 않고 속만 고쳐서 사용해 옛 유적을 보존하는 풍습에서도 곽 목사는 "유럽의 합리적인 문화가 기억난다"고 말했다.

스페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스페인을 물으면 "합리적인 면모가 인상깊었다"고 답한 이는 몇 없다.
 스페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스페인을 물으면 "합리적인 면모가 인상깊었다"고 답한 이는 몇 없다.
ⓒ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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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스페인을 생각한다면 시에스타(낮잠시간)로 대표되는 여유를 넘어선 '게으름', 부실하고 빈틈이 많은 법과 제도를 떠올린다. 스페인이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당신들 문화가 장애물이라고 쓴 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누군가는 스페인에서 게으름을 읽고, 비판적으로 배운다. 곽 목사는 스페인에서 합리와 배려를 읽고, 긍정적으로 배우고 있었다. 어떤 건 옳은 관점이고, 어떤 건 틀린 관점이라는 게 있을까. 단지 이렇게도 다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곽 목사는 인터뷰 후 1주일 뒤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그곳 교회의 목사에게 문서사역(성경번역 등으로 이뤄지는 선교활동)을 배우겠다고 했다.

그는 말라가에 4개월 있었던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두 시간 만에 끝난 것도 아쉽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에 오늘 한 이야기는 순전히 자신의 관점이라고, 이곳을 더 경험해봐야 알 수 있다며 말했다.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서 이야기를 자주 한다. 아프리카에서도 대학생들과 많이 (이야길) 했다. 그런데 내게 이런다. '선교사님은 자신을 모른다'고. 그래도 난 15년 살았으니 아프리카에 안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모른다니? 생각해보면 그 말은 '자기들의 가난함과 억울함과 마음 속 응어리는 경험해보지 않고는 모른다'는 의미일 거야."

덧붙이는 글 | 본 인터뷰 시리즈는 '말라가 교환학생 적응분투기'의 부록입니다. 말라게뇨(Malagueño : 말라가 사람)의 속에서 저와는 다르게 말라가를 보는 다른 시각, 그리고 그 사람들의 살아온 삶을 조명합니다.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인 또바기미디어(ddobagimedia.tistory.com)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말라가, #교환학생, #목사, #아프리카 ,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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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씁니다. 세상을 봅니다. http://ddobag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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