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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선 투표일을 사흘 앞둔 12월 16일. 수서경찰서에서 국정원 댓글 공작 의혹(혹은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 수사와 관련한 보도자료가 나왔다. 한밤중인 오후 11시였다. 공교롭게도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3차 TV토론회를 마친 직후였다. 

보도자료는 '중간수사 결과 발표'의 성격이 짙었다. 경찰은 이날 보도자료에서 "국정원 직원의 대선 관련 댓글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민주통합당에서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씨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는 점을 헤아린다면 경찰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관한 한 '무혐의'를 이날 예고한 셈이다. 실제로 지난 4월 18일 최종수사결과 발표에서는 김씨 등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빠졌다.

대선 투표일 사흘 앞두고 배포된 '국정원 댓글공작 의혹 사건 중간수사 결과' 보도자료.
 대선 투표일 사흘 앞두고 배포된 '국정원 댓글공작 의혹 사건 중간수사 결과' 보도자료.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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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검색 100개→4개로 축소, 축소·은폐 경찰수사의 출발점

지난 2012년 12월 11일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씨의 오피스텔 앞, 경찰관이 벨을 누르며 문을 열어 협조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지난 2012년 12월 11일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씨의 오피스텔 앞, 경찰관이 벨을 누르며 문을 열어 협조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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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댓글 공작 의혹 사건이 터진 것은 지난 2012년 12월 11일. 민주통합당에서 "국정원 직원이 서울 강남구 역삼동 소재 S오피스텔에서 불법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다"며 선거관리위원회와 경찰에 신고한 것이 발단이었다. 같은 날 권은희 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 현장을 방문해 나중에 국정원 직원으로 확인된 김씨와 대치하기도 했다.

다음 날(12월 12일) 민주통합당에서 김씨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하자 12월 13일부터 경찰의 공식수사가 시작됐다. 수서경찰서는 김씨의 범죄수사 개시를 국정원에 통보했고, 김씨도 노트북 1대와 데스크톱 컴퓨터 1대를 증거물로 제출했다. 경찰은 이를 바탕으로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 디지털 증거분석팀에 디지털 증거분석을 맡겼다.

그런데 증거로 제출된 김씨의 노트북에는 보안이 설정돼 있었다. 12월 14일 경찰은 국정원으로부터 협조받아 노트북의 보안을 해제했다. 이후 서울경찰청은 이날 오후 7시 20분부터 김씨의 노트북과 데스크톱 컴퓨터를 대상으로 디지털 증거분석작업을 벌였다. 여기에는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와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 근무하는 전문증거분석관 10명이 투입됐다.

그런데 최초의 문제가 '키워드 검색'에서 일어났다. 디지털 증거분석작업에서 키워드 검색은 매우 중요하다. 키워드 검색은 증거분석 범위와 직결되기 때문에 검색의 범위에 따라 분석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애초 수서경찰서는 1차 78개, 2차 20여개 등 총 100여개의 키워드 검색을 서울지방경찰청에 의뢰했다(12월 14일). 하지만 서울지방경찰청은 '신속한 수사'를 이유로 키워드 검색을 '박근혜, 문재인,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등 4개로 줄였다(12월 16일). 명백한 축소·은폐수사의 출발이었다.

12월 14일부터 16일까지 '무슨 일'이 있었나?

국정원 댓글 공작 의혹 사건 경찰수사에서 '12월 14일부터 16일까지'는 아주 중요한 시기다. 경찰에서는 이 시기에 키워드 검색을 4개로 줄여 디지털 증거분석작업을 벌였고, 이를 바탕으로 "대선 관련 댓글 흔적이 없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특히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3차 TV토론회가 예정된 12월 16일, 경찰수사는 아주 긴박하게 흘러갔다. '키워드 검색을 100여 개로 해 달라'는 수서경찰서의 요구를 묵살하고 키워드 축소(4개)를 관철한 서울지방경찰청은 이날 오후 9시 15분 디지털 증거분석작업을 마쳤다. 수서경찰서는 오후 10시 30분 그 분석 결과를 건네받았다.

이로부터 30분 뒤인 오후 11시 수서경찰서는 "대선 관련 댓글 흔적은 없다"는 내용이 담긴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애초 경찰에서는 "김씨 컴퓨터를 분석하는데 1주일 정도 걸릴 것이다"라고 밝혔지만, 김씨가 경찰에 노트북과 데스크톱 컴퓨터를 제출한 지 사흘 만에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40여분 뒤에는 국정원의 반박자료도 나왔다.

수서경찰서가 처음으로 '키워드 검색 관련 수사협조'를 서울지방경찰청에 의뢰한 것은 지난 12월 14일이었다. 당시 수서경찰서는 78개 키워드 검색을 요청한 데 이어 20여개를 추가했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추적하기 위한 요구였다. 하지만 서울경찰청은 4개의 키워드 검색을 요구했고, 수서경찰서도 이를 받아들여 지난 12월 16일 기존의 '키워드 검색 관련 수사협조 의뢰' 공문을 수정해 서울지방경찰청에 보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이렇게 축소된 키워드 검색으로 디지털 증거분석작업을 벌였고, 이를 바탕으로 "대선관련 댓글 흔적은 없다"고 발표했다.  문제는 수서경찰서에서 키워드 검색을 처음으로 요구했던 지난 12월 14일부터 키워드 검색을 4개로 축소한 지난 12월 16일까지 '어떤 일'이 있었느냐다.

'실세' 김용판 서울청장이 경찰수사에 압력을 행사했나?

이광석 서울 수서경찰서장이 4월 18일 오후 지난해 대선기간 발생한 국정원 직원 선거개입 의혹 사건 수사 결과 국정원 직원과 공범인 일반인을 국가정보원법 위반(정치개입) 혐의로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송치했다고 밝혔다.
▲ 경찰, 대선기간 '국정원 정치개입' 확인 이광석 서울 수서경찰서장이 4월 18일 오후 지난해 대선기간 발생한 국정원 직원 선거개입 의혹 사건 수사 결과 국정원 직원과 공범인 일반인을 국가정보원법 위반(정치개입) 혐의로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송치했다고 밝혔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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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미 민주통합당 의원은 "서울지방경찰청은 수서경찰서에서 의뢰한 키워드로 검색해보고 문제가 되지 않은 검색어만 추렸고, 이를 수서경찰서에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주장했다. 지난 12월 16일 수서경찰서가 '키워드 검색 관련 수사협조 공문'을 수정해 보내야 했던 데에는 이러한 압력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수서경찰서에서 요구한 대로 100여 개의 키워드 검색으로 디지털 증거분석작업을 벌였다면 김씨가 국내정치나 대선에 개입한 흔적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다. 국정원 직원의 국내정치 개입을 확인한 경찰의 최종수사 결과(4월 18일)나 현재 진행중인 검찰수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결국 누군가가 당시 경찰수사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와 관련해 김용판 서울지방경찰청장이 경찰수사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상태다.

실제 김용판 청장이 권은희 과장에게 직접 전화한 사실이 검찰수사로 드러났다. 김 청장이 권 과장에게 전화한 시기는 수서경찰서에서 보도자료를 통해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한 지난 12월 16일 직전으로 알려졌다. 권 과장도 지난 5월 8일 검찰의 참고인 조사에서 "김용판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직접 전화했고, 수사방향에 전반적으로 개입하려고 했다"고 진술했다. 이는 "권 과장에게 외압을 가한 적이 없다"는 김용판 전 청장의 주장을 뒤집은 것이다.

일각에서는 권은희 과장이 지난 2월 4일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으로 전보조치되기 전까지 윗선의 지속적인 압력 행사가 있었다고 본다. 김씨를 다시 소환한 지난 1월 4일 경찰청의 한 고위관계자가 권 과장에게 "(언론에) 한 마디라도 더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통합당에서는 이 고위관계자가 김용판 청장이라고 의심한다.

민주통합당의 한 인사는 "당시 경찰청장은 김기용이었지만 경찰의 실세는 김용판 서울청장이었다"라며 "김용판 서울청장이 여당에 불리한 판세를 우려해 경찰수사에 압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다.
 
권은희 과장 전보조치된 이후 '경찰수사'는 없었다

지난해 대선 당시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 수사 실무책임자였던 권은희 서울 송파경찰서 수사과장(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 5월 8일 자정 무렵 '국정원 대선개입·정치개입 의혹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윤석열)에서 10시간 넘게 참고인 조사를 받은 뒤 귀가하고 있다.
▲ 참고인 조사 받은 권은희 수사과장 지난해 대선 당시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 수사 실무책임자였던 권은희 서울 송파경찰서 수사과장(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 5월 8일 자정 무렵 '국정원 대선개입·정치개입 의혹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윤석열)에서 10시간 넘게 참고인 조사를 받은 뒤 귀가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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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경찰서에서는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한 직후인 지난 12월 18일 서울지방경찰청에 디지털 증거분석자료를 반환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서울지방경찰청은 이날 일과시간이 끝난 뒤인 오후 8시~9시께 분석자료를 수서경찰서에 넘겼다. 선거운동이 다 끝난 직후에서야 분석자료를 수사팀에 넘긴 것도 정치적 의도를 의심케한다.  

그런데 최근 검찰수사 결과, 서울지방경찰청은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한 직후에도 증거를 인멸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지난 5월 20일 서울지방경찰청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노트북 컴퓨터 1대를 확보했다. 수서경찰서의 의뢰로 김씨의 하드디스크를 분석할 때 사용한 컴퓨터였다. 하지만 이 노트북 컴퓨터는 이미 초기화되어 있었다.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증거분석 자료를 전부 없애버린 것이다.

하지만 대선이 끝난 이후 수사초기 때부터 꼼꼼하게 수사해온 '권은희 수사팀'에 의해 중요한 사실이 확인됐다(1월 3일). 김씨가 인터넷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오유) 등에 올라온 대선관련 게시물에 99차례 추천이나 반대의사를 표시한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수서경찰서에서 지난해 12월 24일 '오유'를 압수수색한 결과였다. 경찰은 지난 1월 4일과 25일 연달아 김씨를 소환조사했다. 이어 지난 1월 31일 <한겨레>보도를 통해 김씨가 직접 쓴 게시물 91건이 공개됐다. 대부분 정부와 여당에 유리한 글이었다.

이에 수서경찰서는 "김씨가 지난해 8월 28일부터 불법선거운동 의혹이 불거진 12월 11일까지 인터넷 사이트 '오늘의 유머'와 '보배드림'에 각각 49개, 29개의 글을 작성해 게시했다"고 밝혔다. 국정원 직원이 국내정치에 개입해온 명백한 증거가 확인된 것이다.

이에 따라 경찰의 축소·은폐수사 비판 여론이 거세졌다. 다급해진 경찰은 지난 2월 4일 권은희 과장을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으로 전보조치했다. '압력행사 의혹'을 받고 있던 김용판 청장이 주도한 인사였다. 그는 경찰이 최종수사결과를 발표하기 전인 지난 4월 2일 퇴임했다.

적극적이고 꼼꼼하게 수사했던 권은희 과장이 전보조치된 이후부터 최종수사결과가 발표된 지난 4월 18일까지 이루어진 경찰수사에는 '진전'이 없었다. 언론에서 제기한 의혹을 뒤쫓는 정도에 그쳤다. 그 2개월여간 경찰수사는 없었다. 이는 "국정원 직원들이 국내정치에는 개입했지만 대선에는 개입하지 않았다"는 최종수사결과로 이어졌다. 

정치경찰, '경찰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차버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시작한 경찰수사는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막을 내렸다. 물론 경찰수사에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정원 직원들이 인터넷을 통해 국내정치에 개입해온 사실을 공식 확인한 점은 성과라면 성과다.

하지만 수사의 첫단추였던 키워드 검색을 축소하지 않았다면, '권은희 수사팀'에 '경찰실세'의 압력이 가해지지 않았더라면 경찰수사 결과는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다. 결국 '정치경찰'이 "경찰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권은희 과장이 지난 1월 23일 <한겨레> 기자에게 했다는 말)를 스스로 차버린 셈이다. 

진선미 의원은 "선거 결과가 바뀔 수 있는 국면에 경찰 실세가 주도해 무리하게 '혐의가 없다'고 발표하고 황당한 수사결과를 내놓으며 국민들에게 '믿으라'고 한다"며 "검찰이 철저하게 수사해야 하고, 경찰 내부에서도 자성과 문제제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태그:#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국정원 댓글 공작 의혹, #국정원, #경찰, #김용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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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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