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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대학교에 나붙은 통폐합 반대 대자보
 배재대학교에 나붙은 통폐합 반대 대자보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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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과를 폐지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언론보도를 보고 처음 알았어요"(배재대 학생)

배재대학교(총장 김영호, 대전시 서구 도마동) 일부 학과 학생들이 통폐합 대상학과와 기준을 공개해 달라며 반발하고 있다. 특히 국문과 학생들은 "국문학의 스승인 주시경 선생과 민족시인 김소월을 배출한 학교에서 전통 국문과를 없애는 것은 학풍을 망가트리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학교 측은 최근 일부 학과 통폐합 등 구조 조정안을 마련했다. 이에 따르면 국문과와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과'(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개설)를 통합해 '한국 어문학과'로 개편한다. 또 독일어문화학과와 프랑스어문화학과를 폐지하고 해당 학과 교수들은 신설되는 '항공승무원학과'(가칭)로 자리를 옮긴다. 사회학과와 공공행정학과는 통합해'정책학과'로 변경된다. 이밖에 사이버보안학과(가칭)가 신설된다. 음악학부도 클래식 전공을 없애고 피아노 전공을 신설할 예정이다. 하지만 학교 측은 구체적인 구조 조정안에 대해 반발여론을 의식, 함구하고 있다. 

폐과 대상으로 선정된 독일어문화학과와 프랑스문화학과 학생들은 수일 전부터 학내 곳곳에 학과 폐지에 반대하는 대자보를 붙이고 학우들의 의견개진을 독려하고 있다. 해당 학과 학생들은 "학생들 의견은 전혀 반영하지 않고 일방 통보식의 구조조정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통폐합 해당 학과 학생들 "대자보 떼어내고... 왜 몰래 추진하나"

2일 해당 대학에서 만난 학생들은 학교 측이 통폐합을 몰래 추진하고 있다며 불만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정지홍 국문과 학회장(3학년)은 "지난 달 29일, 통폐합 학과로 선정됐다는 소문을 듣고 놀라 인문대학 해당 학회장들과 학교 관계자를 찾아 갔다"며 "하지만 학교 관계자들은 궁금한 것은 서면으로 질의하라며 자리를 피했다"고 말했다. 이어 "곧장 통폐합 대상 학과와 선정 기준 등을 묻는 서면질의서를 전달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답변이 없다"고 덧붙였다.
일방적 학과통폐합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학교 측이 떼어냈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 학생은 "지난 1일 학교 청소직원들이 건물 곳곳에 붙여 있던 대자보를 모두 떼어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청소직원은 "학교 측에서 대자보를 철거하라고 해 떼어냈다"고 밝혔다.    

일부 학과학생들은 긴급회의를 갖고 향후 대응 방안을 논의하는 등 집단행동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또 다른 학과 학생들은 집단농성을 계획하고 있다.

총장 만난 졸업생들 "인문학 기초 국문과 살려야 경쟁력 산다"  

배재대 일부 학과 학생들이 학과 구조조정에 반대의견을 밝히고 있다.
 배재대 일부 학과 학생들이 학과 구조조정에 반대의견을 밝히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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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 이 대학 국문과 일부 졸업생들은 총동창회 임원과 함께 김영호 총장을 면담하고 학교구성원들에게 통폐합 계획과 잣대를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이들은 "주시경 선생의 국문학연구사에 한 획을 긋는 첫 단추가 배재학당 학생시절 시작됐다"며 "선생의 얼을 지켜온 배재대에서까지 국문과를 폐지하는 것은 국어교육의 맥을 끊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민족시인 김소월, 시인 박팔양, 소설가 나도향 등이 모두 배재 출신인 것은 주시경 선생의 자주적 교육 정신과 대학의 민족적 학풍과 연관돼 있다"며 "국가백년대계를 내다보고 학교 경쟁력을 높이려면 국문과를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김 총장은 "정부의 대학평가지표와 별도의 전문 컨설팅 업체의 용역자료 등을 종합해 방향을 설정했다"며 "일부 학과가 아닌 대학이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김 총장은 그러나 "구체적인 통폐합 대상 학과 등에 대해서는 구성원들의 감정으로 볼 때 아직 공개하기 어렵다"며 자료공개를 꺼렸다. 

한편 배재대는 학제조정위원회와 교무위원회, 교수평의회를 잇달아 갖고 오는 중순경까지 구조조정 계획을 최종 확정할 예정이다.


130년 이어온 '주시경 선생'의 흔적마저 지워야 하겠는가
[성명] 배재대의 '국문과 폐지'는 대학교육의 '사망선언'이다.


배재대학교(이하 배재대)가 국어국문학과를 폐지하려 하고 있다. 130년 가까이 지켜온 배재학당(설립 1885년)의 교육정신의 맥을 끊으려 하고 있다. 

배재학당이 낳은 우리 글 연구의 개척자요 완성자인 주시경 선생을 잊었는가. 선생은 19세 되던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학우들과 함께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했다. 맞춤법을 연구하고 국어말 사전을 편찬했다. 국어문법을 연구했다. 국문학연구사에 한 획을 긋는 첫 단추가 배재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는 배재에서 영어를 배우면서도 "한글 전용과 한글 연구야말로 독립운동이요 나라의 명예를 세계에 빛나게 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우리글을 멸시하고 남의 나라 글에만 집착하는 문화사대주의를 질타했다. 그가 배재에 입학한 지 3년째 되던 해 발표한 글을 통해서다.

선생은 배재를 졸업한 후에도 정부에 상소를 올려 '국문학 연구소'를 설립하게 했다. 국문학강습소를 개설해 국문법을 강의하고 후학들을 기르는 일에 전념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고, 주시경 선생은 한글을 연구하고 보급했다. 선생은 국문학의 스승이요, 겨레의 스승이었다.

배재학당의 설립자인 선교사 아펜젤러는 고종황제로부터 교명을 하사받던 1887년 그해, 학생들에게 한국어 설교를 시작했다. 배재학당의 첫 과목은 한글과 한문, 영어였다. 영국의 유명한 수필가이자 여행가였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16년 전(1897년) 조선반도를 둘러보고 "배재대학(배재학당)에는 국한문과가 있어서 고전을 가르치고 있다. 서재필 박사 등이 역사와 기독교의 가르침을 한국어로 알려 학생들 사이에 애국심이 일고 있다"고 썼다.

실제 배재학당 내에서 한글로 새긴 <독립신문>이 발간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회라 불리는 협성회를 조직했다. 배재학생들은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에 적극 가담해 토론하며 민주주의를 훈련하고 민중들을 각성시켰다. 일본이 본격적인 식민교육정책을 준비하던 1909년에도 국어독본과 작문은 배재학당의 주요 과목이었다. 배재고등보통학교로 개명한 일제강점기에 일본어 과목이 신설됐지만 국어를 없애지는 못했다.

국민시가 된 <진달래꽃>을 쓴 김소월, 시인 박팔양, 당대 현실 문제를 파헤친 소설가 나도향(벙어리 삼룡이 저자), 소설가 방인근 등이 모두 배재 출신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배재학생들이 3.1운동에 앞장서고 광주학생의거 당시 배재선배학생들이 서울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주시경 선생 등의 자주적 교육정신으로 각성되고 성장한 때문임은 물론이다. 이후 대전보육대학을 거쳐 1981년 거듭난 배재대학도 국어국문학과와 함께 시작됐다.    

그런 배재대에서 국문과를 없애고 짝퉁 축에도 못 끼는 '한국 어문학과'로 명패를 바꾸기로 했다. '한국 어문학과'의 주축은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개설된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과'다. 결국 국문과를 족보에서 지우겠다는 것이다.
이유는 돈의 논리다. 전통적 국문과는 입학생도 적고 취업도 안 돼 돈벌이가 안 된다는 게 학교당국의 시각이다. 학교가 존폐 위기에 몰리고 있는데 잘난 학문 타령만 하겠냐고 타박한다. 그래서 국문과는 없애고 항공승무원학과는 새로 만들겠단다.

인문학의 기초인 국문과의 소멸은 대학교육의 사망선언이다. 이미 새로 생긴 대학에서는 처음부터 아예 국문과를 만들지 않고 있다. 다른 대학에서도 몇 해 전부터 기존에 있던 국문과를 없애고 있다. 주시경 선생의 얼을 지켜온 배재대에서 국문과를 폐지하는 것은 국어교육의 맥을 끊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대학의 미래를 돈을 중심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배재대 정체성의 요체 중 하나는 주시경 선생의 자주적 교육정신이다. 배재대의 국문과는 이를 계승해야 할 후학들의 무대가 되어야 한다. 학교에서 수십 년간 '청소년 소월문학상'을 통해 청소년들이 문학의 꿈을 펼칠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도 국문과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학교당국이 국가백년대계를 내다본다면 국문과를 폐지해서는 안 된다.  39년의 삶을 송두리째 우리 글 연구와 보급에 바친 주시경 선생의 자주적 교육 정신과 배재의 민주적 전통, 민족적 학풍을 이렇게 망가트려서는 정말 안 된다.

                             2013년 5월 2일,    배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생 일동 




태그:#배재대, #구조조정, #학과통폐합 , #국문과,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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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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