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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웅 장편소설 <야색계>(전3권)
 정현웅 장편소설 <야색계>(전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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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봄. 25살 한 여성이 서울 마포의 절두산 근방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한국의 정치권과 재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를 비롯해 국무총리 정일권,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를 포함한 최고위층 정부 관리와 재벌 총수들은 사건 진행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한국이 시끄러웠다. 입을 가진 이들은 모두가 한마디씩 했다.

총에 맞아 살해된 여성의 이름은 정인숙. 당시로선 드물었던 고학력의 인텔리 접대부였고, 3살 난 아들이 있었다. 수사를 진행하던 경찰은 그녀의 집에서 명함 33장을 발견한다. 그중 26장의 명함에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정·재계 실력자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머리와 가슴에 총탄을 맞아 20대 중반에 요절한 고급 요정 선운각 여급 정인숙. 활기를 보이는 듯했던 수사는 곧 지지부진해진다. 상부의 압력이 있었다는 풍문이 돌았지만, 당시의 분위기에선 확인이 불가능했고, 정인숙이 낳은 아이가 "누구누구의 아들"이라는 소문만 무성했다. 범인으로 지목된 이는 정씨의 오빠인 정종욱. 그는 "여동생의 행실이 불량해 내가 죽였다"고 자백했지만, 설득력이 떨어졌다.

증거도 증인도 없는 해괴한 재판. 혐의를 입증할 만한 것이라곤 정종욱의 자백밖에 없는 꼴사나운 법정공방 끝에 사건은 유야무야 됐다. 19년의 옥살이 끝에 세상으로 나온 정인숙의 오빠는 "내가 죽인 게 아니다. 고위층의 회유에 거짓을 말했다"는 일종의 양심고백을 했고, 2010년엔 공중파방송의 시사고발 프로그램도 이 사건을 재조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때 뿐. 아직도 '정인숙 살해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문화·예술을 전공한 학자들은 말한다.

"소설은 현실을 모사(模寫)한다."

이 명제가 틀리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서 보자면 최근 출간된 정현웅의 장편소설 <야색계>(L&BBOOKS)는 (현실에서 발생했던) 정인숙 사건의 (소설을 통한) 세밀하고, 사실적인 모사다.

1970년의 정인숙과 2013년의 나인숙은 어떻게 다른가?

여기 한 여인이 있다. 출세욕과 물욕에 가득 찬 아름다운 20대 나인숙. 그 역시 탐욕스런 매니저 박운종과 손잡은 그녀는 정치권과 재계의 실력자들을 특유의 아름다움과 젊은 매력을 이용해 제 편으로 만들어간다.

욕망은 제어판이나 브레이크를 작동시키지 않는 법. 수십 억을 담배 한 갑 건네듯 사용할 수 있는 부동산재벌과 국회의원을 손가락 하나로 부리는 정치판 실력자들을 구워삶은 후엔 러시아로 건너가 전직 KGB 출신의 마피아사업가를 쥐락펴락하고, 내친 김에 미국에서도 매혹적인 육체를 이용한 인맥 넓히기를 지속한다.

가진 것이라곤 젊고 아름다운 얼굴밖에 없었던 한미한 집안의 여성 나인숙은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100평이 넘는 강남의 고급 주상복합아파트를 사고, 러시아 사업가의 전용기를 타고 국경을 넘나든다. 보통 사람들 서너 달 월급에 육박하는 무궁화 5개 호텔의 스위트룸 역시 안방처럼 이용한다. 육체를 이용한 끝 모를 신분 상승.

그러나 모래 위에 지어진 황금의 성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당연한 수순처럼 견고하게 보였던 성(城)은 허술하게 무너지고, 공주(나인숙)는 프랑스혁명 당시 단두대에 오른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목이 잘린다. 현실 속 정인숙의 죽음과 판박이인 소설 속 나인숙의 죽음.

인체실험이란 만인공분의 악행을 저지른 일본군 731부대를 소재로 한 <마루타>라는 소설로 독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정현웅은 왜 <야색계>를 썼을까. 아마도 '소설보다 더 극악한 현실'에 무언가를 발언하고 싶었던 작가적 욕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반복되는 권력의 성 스캔들, 단죄할 수 있을지

다음 주인 4월 18일. 한 젊은 여성 탤런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언필칭 '연예계 성 상납 관행'을 정면에서 다룬 영화 <노리개>(연출 최승호)가 개봉한다.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선명한 이름 장자연. 그녀는 왜 29살 한참 나이에 자살이란 극단적 방법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을까? '장자연 사건' 이후에도 한국사회 고위층들의 리스트가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떠돌았다. 거대 방송사와 신문사의 유력인사 이름도 숱하게 거명됐다. 그러나 정인숙 사건과 마찬가지.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1970년 봄이 그랬던 것처럼 2013년 봄이라고 다를까. 입에 담기도 민망스러운 동영상과 함께 수면 위로 불거진 고위공직자의 섹스스캔들이 또 한 차례 서민들을 경악케 했다. 이른바 '원주 별장 성 접대 사건'

사기성 농후해 보이는 건설업자에게 접대를 받았다는 명단이 고구마줄기처럼 줄줄이 딸려 나왔다. 알게 모르게 떠도는 전·현직 고위공무원의 이름들. '법과 정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으스대던 대한민국 법무부의 2인자는 이 사건과 관련해 스스로 옷을 벗었다. 이번엔 진실이 제대로 규명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도 힘들 것 같다. 벌써부터 언론의 취재 열기는 식고 있고, 수사의 방향도 본질을 향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현실과 소설 속에서 반복되는 역사.

<야색계>엔 장르소설이 가져야 할 스릴과 서스펜스, 재미가 넘친다. 그러나 본격문학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가슴 밑바닥을 치는 감동과 삶과 세상에 관한 새로운 해석은 발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소설을 어느 순수문학 못지않게 진지하게 읽었다. 때론 분노하고, 가끔은 슬퍼하며 작가의 문장에 동화되는 체험을 했다.

왜 그랬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겠다. 정현웅이 모사한 현실이 너무나 서글펐고, 도통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국사회가 환멸스러웠기 때문이다. 서글픔과 환멸의 이유? 앞서 이미 설명하지 않았는가.  

덧붙이는 글 | 야색계 | 정현웅 (지은이) | L&B북스 | 2013년 3월



태그:#야색계, #정현웅, #정인숙, #장자연, #원주 성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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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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