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어릴 때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꾸중 중에 "밥 한 그릇이 어떻게 맹글라 진지나 아나?"라는 것이 있다. 공부나 일, 심부름이나 형제간의 다툼에 대해서는 꾸중 들은 기억이 전혀 없고 보면 내 잘못이 없어서라기보다 어머니의 관심은 오로지 '밥 한 그릇'이지 않았을까 싶다.

밥 한 그릇의 이치를 알기에는 너무도 어린 나이였지만 수도 없이 이 꾸중을 들으면서 '밥 한 그릇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꼭 알아야 할 숙제라는 생각을 숙명처럼 하게 된 듯하다. 사실 어머니는 밥상 앞에서만 이 꾸중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내 잘못을 발견 할 때마다 모든 원인과 과정을 생략하고서 이 말로 뭉뚱그려 나무라셨다.

내가 공부를 안 하고 장난이나 칠 때도 어머니는 밥 한 그릇을 가지고 시비를 다투었고 시키는 일을 안 하고 빈둥거리면 이때도 밥 한 그릇을 들고 나오셨다. 막내인 내가 형들한테 대들 때도, 실수로 도시락에 밥풀을 딱 한 개 남겨 왔을 때도, 차비가 없어 학교를 못가고 징징 울고 있을 때도 어머니는 내 코앞에 늘 밥 한 그릇을 디밀었다.

19살의 장남 밑으로 6남매를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둔 채 산더미 같은 빚만 남기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이 7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느라 어머니는 한 끼 밥 한 그릇 장만하는 고달픈 현실을 한 순간도 피할 수 없었으리라. 모든 관심과 결정은 결국 밥 한 그릇으로 귀착되었으리라.

청년이 되어 동학공부 하면서 어머니의 꾸중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만사지(萬事知)는 식일완(食一碗)이니라>는 해월 선생의 말씀에서다. 해월 최시형의 <천지부모>편에 나오는 말이다. 어머니가 해월선생의 경전을 읽었다기보다 해월 선생이 삶의 근본을 갈파하신 것이리라.
세상만사를 아는 것은 단지 밥 한 그릇의 이치를 아는 것과 같다고 하신 해월선생은 하늘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데 의지한다(천의인 인의식 天依人 人依食)고 설명하던 끝에 이 말을 했으니 필경 밥 한 그릇은 하늘의 이치를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밥 한 그릇을 들여다보자. 먹어야 살 수 있는 게 사람이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조화를 나타 낼 수 있는 게 하늘이다.(인의식이 자기생성 천의인이 현기조화 人依食而資其生成 天依人而現其造化 -천지부모 편) 참 무서운 말이다. 사람 없이는 하늘도 없고, 밥 없이는 사람도 없다는 혁명적인 말이다.

다시 우리 앞에 놓인 밥 한 그릇을 들여다보자. 오늘의 세상만사 요지경이 담겼는가. 체제와 인심과 사람관계가 다 보이는가. 내 진실 된 땀도 담겨 있는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장수군 귀농귀촌인 협의회 기관지 <뜸봉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해월, #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농(農)을 중심으로 연결과 회복의 삶을 꾸립니다. 생태영성의 길로 나아갑니다. '마음치유농장'을 일굽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