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드무실'. 경상남도 진주시 하촌동(옛 평안동)을 부르는 옛 지명이다. 일제 때는 '항일'과 '친일부역'이 겹치는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어떨까. 정부가 친일파와 관련한 집은 '근대등록문화재'로 지정하여 기리는 반면, 항일투사의 생가는 '방치하다시피 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드무실은 독립운동가 김재화(金在華, 1892~1920) 선생과 '가요황제' 남인수(南仁樹, 1918~1962. 본명 崔昌洙․姜文秀)가 태어난 마을이다. 마을 어귀부터 곳곳에 '예술인 남인수 생가·묘소'라는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남인수 흔적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김재화 선생 흔적은 그렇지 않다.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이기동 지회장이 진주시 하촌동 마을회관 앞에 있는 '3?1운동 발상지 기념비'를 살펴보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이기동 지회장이 진주시 하촌동 마을회관 앞에 있는 '3?1운동 발상지 기념비'를 살펴보고 있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진주시 하촌동 마을 뒷산에는 친일파인 남인수의 묘소가 '가요 황제 남인수 추모비'와 함께 있다. 옛날에는 마을에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 묘소가 있었는데, 2012년 6월 이장했다.
 진주시 하촌동 마을 뒷산에는 친일파인 남인수의 묘소가 '가요 황제 남인수 추모비'와 함께 있다. 옛날에는 마을에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 묘소가 있었는데, 2012년 6월 이장했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지회장 이기동)는 진주시가 계획하고 있는 '남인수 생가 정비사업'을 보류하고, 김재화 선생 생가와 '진주만세운동 최초 모의지'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살리고 기리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순국지사 김재화 선생 생가가 있다"

드무실은 '진주독립만세운동'을 처음으로 모의했던 곳이다. 진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8일에 벌어졌는데, 이 마을 출신인 김재화 선생이 박진환·심두섭·권채근·강달열·조웅래·박대업·정용길 선생 등과 함께 이 곳에서 비밀회합을 했던 것이다.

이들은 3월 13일 의거를 결의하고, 3월 10일 "왜 삼남에는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제목의 격문을 시내 곳곳에 뿌렸다. 이에 일본경찰의 검속이 강화되었고, 이들은 진주시위를 3월 18일로 연기했던 것이다.

진주교회의 종소리를 신호(일부 '비봉산 나팔소리'라는 주장도 있다)로 진주의 만세운동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일본이 작성한 <고등경찰관계적록>을 보면 당시 진주 중앙시장, 촉석공원 등 3~7곳에서 동시에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날 시위 참가자는 최소 1만 명(경찰, 실제 2만명)  이상으로 알려졌다.

김재화 선생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선생은 옥고를 치르다가 병으로 형 집행이 정지되었고, 이듬해 출감하였다가 순국했다. 정부는 그에게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으며, 그는 현재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에 잠들어 있다.

1919년 3월 진주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 김재화 선생의 생가로, 본채와 사랑채의 2개 건물이 있다. 지붕과 일부가 변경되었지만 옛날 초가집 형체를 하고 있다.
 1919년 3월 진주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 김재화 선생의 생가로, 본채와 사랑채의 2개 건물이 있다. 지붕과 일부가 변경되었지만 옛날 초가집 형체를 하고 있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드무실에서 그동안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는데, 2010년 3월 비석이 세워졌다. 독립운동사료연구가 추경화씨가 리영달·김원웅·주형식씨 등과 힘을 모아 "3·1운동 발상지 기념비. 진주와 서부경남 3․1운동 발상지, 의논 장소. 순국지사 김재화 생장지"라고 쓰여진 비석을 세웠던 것이다.

이 비석은 마을회관 화단에 세워져 있다. 정부나 진주시가 아닌 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그를 기린 것이다. 추경화씨는 "이곳에서 진주 3․1운동을 위한 모임이 있었고, 진주시내에 뿌려진 '교유문'을 직접 지으신 곳이니 역사적인 장소"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김재화 선생의 생가가 있다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와 추경화씨는 진주시 하촌동 222번지에 있는 집이 김재화 선생의 생가로 보고 있다.

이 집은 본채와 아래채로 되어 있는데,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 옛날에는 초가집이었는데, 지금은 슬레트 지붕으로 바뀌었고, 벽면은 시멘트로 되어 있다. 집 주인인 강우달(77)씨는 "오래 전부터 들어와 살고 있는데, 이전에는 누가 이 집에서 살았는지 모른다"며 "집은 이전 초가집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지붕을 비롯해 일부만 손을 봤다"고 말했다.

김재화 선생과 같은 문중으로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김재환(81)씨는 "어렸을 때부터 김재화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집에서 말을 키울 정도로 잘 살았다고 한다. 지금 있는 그 집이 김재화 선생의 생가였던 것으로 안다"며 "옥고를 치르고 나서 고문을 당해 쇠약해졌다가 나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떴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추경화씨는 "최근에 '지적도 원부' 등 자료를 살펴보았는데, 지금의 집이 김재화 선생의 주소와 일치하고, 생가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남인수는 대표적인 친일파... "생가 아니다"

남인수 흔적은 어떤가. 정부는 '남인수 생가'를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제153호)으로 지정했으며, '예술인 남인수 생가·묘소'라는 안내판은 곳곳에 세워져 있다.

묘소도 있다. 지금은 마을 뒷산에 있는데 '생가'라는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다. 이전에는 마을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묘소가 있었는데, 2012년 6월 '진주 강씨' 문중과 남인수팬클럽에서 이곳으로 이장했던 것이다.

남인수 묘소 앞에 있는 '가요 황제 남인수 추모비' 뒷면에는 약력을 기록해 놓았다. '진주 강씨' 문중 묘역인데, 다른 사람들은 같은 규격으로 배열해 놓았지만 남인수 묘소는 별도로 크게 해 놓았다.

그런데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남인수 생가'는 남인수가 태어나지도 자라지도 않은 곳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남인수 생가'라는 집은 남인수 계부의 본처가 살았던 집이라는 것이다. '남인수 생가'는 문화재청이 남인수팬클럽의 신청만 받아들여 2005년 문화재로 지정했던 것이다.

경남 진주시 하촌동에 있는 '남인수 생가' 안내판과 집.
 경남 진주시 하촌동에 있는 '남인수 생가' 안내판과 집.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는 "남인수라는 이름은 예명이고, 원래 이름은 '최창수'였는데, 생모(장화방)가 강씨 문중(아버지 '강영태')으로 개가하면서 이미 출생한 남인수를 데리고 들어갔다"며 "지금 생가라고 하는 집은 남인수 계부의 본부인만 거주했던 것이고, 남인수는 다른 데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게 마을 출신 인사들의 증언"이라고 밝혔다.

진주시청 관계자는 "당시 문화재로 지정할 때 문화재청에서 일방적으로 했고, 당시 진주시에서 신청하거나 관련 자료를 냈던 사실이 없다"고 했으며, 문화재청 관계자는 "남인수 생가의 가치에 대해서는 다시 확인해 보고 난 뒤에 판단해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남인수는 대표적인 '일제 부역 가수'였다. 그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활약상을 찬양한 노래인 <강남의 나팔수>와 징병제 실시를 축하․기념하는 <남쪽의 달밤> <낭자일기> <이천오백만 감격>, 조선인들이 혈서를 쓰서 징병제에 지원한다는 내용의 <혈서지원> 등을 불렀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해 놓았다.

'남인수 생가' 위상 확인 다시... 김재화 선생 생가는?

김재화 선생의 생가라는 집과 '남인수 생가'라는 집은 바로 인근에 있다. 두 집 사이는 공터가 있고 집이 서너 채 있는 거리다. 정부는 독립운동가의 생가는 보전하지 않고, 일제 부역자는 생가도 아닌데도 문화재로 지정해 보전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드무실'로 불리는 경남 진주시 하촌동 마을 모습으로, 이곳에는 독립운동가 김재화 선생의 생가와 친일파 남인수의 묘소 등이 있다.
 '드무실'로 불리는 경남 진주시 하촌동 마을 모습으로, 이곳에는 독립운동가 김재화 선생의 생가와 친일파 남인수의 묘소 등이 있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추경화씨는 "드무실은 친일과 항일이 겹치는 마을이다"며 "김재화 선생 생가를 보전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기동 지회장은 "같은 마을에 독립운동가의 생가가 있고, 출생과 거주 사실에 대한 시비가 있는 일제부역자 '남인수 생가'에 대한 비상식적인 대처는 국가관의 혼란을 초래할 소지가 매우 크다"며 "친일행위와 독립운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관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규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남인수 생가'의 문화재 지정 경위와 문화재로서의 정확한 위상을 확인한 뒤 그에 따른 후속 조치가 필요하고, 김재화 선생의 생가와 드무실이 진주만세운동 최초의 모의지로서 상징성을 살리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제시했다(관련기사: '친일가수' 생가가 문화재?... "그는 여기 안 살았다").

경남 진주시 하촌동 마을어귀에 있는 '예술인 남인수 생가.묘소' 안내판.
 경남 진주시 하촌동 마을어귀에 있는 '예술인 남인수 생가.묘소' 안내판.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진주시 하촌동 마을 뒷산에는 친일파인 남인수의 묘소가 '가요 황제 남인수 추모비'와 함께 있다. 옛날에는 마을에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 묘소가 있었는데, 2012년 6월 이장했다.
 진주시 하촌동 마을 뒷산에는 친일파인 남인수의 묘소가 '가요 황제 남인수 추모비'와 함께 있다. 옛날에는 마을에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 묘소가 있었는데, 2012년 6월 이장했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진주시 하촌동 마을 뒷산에는 남인수 묘소가 있는데, 사진은 '가요 황제 남인수 추모비' 뒷면의 모습이다.
 진주시 하촌동 마을 뒷산에는 남인수 묘소가 있는데, 사진은 '가요 황제 남인수 추모비' 뒷면의 모습이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태그:#드무실, #남인수, #김재화 선생, #근대문화유산, #민족문제연구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