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7대 대선 이후, 언론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오충일 목사가 인터뷰를 자청해 지난 27일 만난 자리에서 "같은 민족끼리 이게 무슨 짓인가?"라면서 최근 한반도 상황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다.
 17대 대선 이후, 언론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오충일 목사가 인터뷰를 자청해 지난 27일 만난 자리에서 "같은 민족끼리 이게 무슨 짓인가?"라면서 최근 한반도 상황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다.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5년여 만이다. 17대 대선 이후, 언론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오충일 목사가 27일 낮 <오마이뉴스>에 전화를 걸어 왔다. 인터뷰를 자청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살고 있는 강원도 양구의 한 산골마을로 기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긴히 할 말이 있단다. 무슨 일일까.

오 목사는 요즘 휴전선이 그리 멀지 않은 양구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매일 북쪽 하늘을 바라다보며 간절한 염원을 담아 기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휴전선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20여 km 정도 떨어져 있다. 가깝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결코 멀다고 할 수도 없는 거리, 그의 기도가 매일 그 가깝고도 먼 휴전선을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그가 살고 있는 마을은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을 밖을 나서면 북쪽으로는 또 거대한 파로호가 가로막고 있다. 오지에 속하는 마을이다.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의 나이 이제 일흔넷이다. 이제는 세상사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둘 나이다.

밤하늘 둥근 달과 사랑에 빠진 '촌로' 오충일 목사

오충일 목사가 기거하고 있는 양구 한 산골마을, 컨테이너로 만든 집. 그는 이곳에서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
 오충일 목사가 기거하고 있는 양구 한 산골마을, 컨테이너로 만든 집. 그는 이곳에서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그런 그가 이 시점에 인터뷰를 자청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오 목사가 있는 곳은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길은 양구 읍내를 벗어나서는 계속 산길을 오르내려야 했다. 높은 고갯길을 두 개나 넘었다. 길을 잘못 들었다가 되돌아 나오기를 두세 차례, 그러고 나서야 겨우 길을 찾았다.

오 목사는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집에 살고 있었다. 박스 내부를 조촐한 가정집으로 꾸몄다. 집 근처 땅을 사서는 그곳에 농사를 짓고 있었다. 일부 하우스농사도 짓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한국사회 민주화운동의 대부 노릇을 하던 양반이 지금은 휴전선이 멀지 않은 양구의 한 산골마을에 들어와 밭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니….

겉보기엔 세상과 완전히 담을 쌓고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집에 그런 '담'은 없었다. 그의 집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열려 있었고, 그의 지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아직도 예민하게 살아 있었다. 그 깊은 산골에 들어가 살고 있으면서도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꿰고 앉아 있었다.

오충일 목사의 집 뒷편 산비탈에서 내려다본 컨테이너 집. 집 위에 나무판자를 깔고 휴실을 취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오 목사는 때로 이 위에서 야영을 하듯이 텐트를 치고 잘 때도 있다고 했다.
 오충일 목사의 집 뒷편 산비탈에서 내려다본 컨테이너 집. 집 위에 나무판자를 깔고 휴실을 취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오 목사는 때로 이 위에서 야영을 하듯이 텐트를 치고 잘 때도 있다고 했다.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그의 말은 간단명료했다. 메시지가 분명했다. 더하거나 덜어내거나 할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한반도를 들었다 다시 내려놓을 만큼 무거운 것이었다.

지금 이 시점에,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었다. '원로'로서, 이제 한 사람의 '촌로'로 돌아가 살고 있는 오충일 목사의 말은 분명 의미심장한 데가 있었다.

그는 요즘 '달'과의 사랑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달을 올려다보며, 거의 매일 밤 참담한 기분을 곱씹고 있다. 달은 하나인데, 그 달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60년도 넘게 두 갈래로 찢어져 살고 있는 현실을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 하고 있다. 동족이라는 사람들이 틈만 나면 서로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으르렁대는 꼴을 더 이상 지켜보기 힘들다.

기사로 그의 속마음까지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 행간은 물론이고, 말과 글로는 다 드러낼 수 없었던, '지금 한반도가 처한 상황이 너무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그의 마음까지 함께 읽어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아래는 그의 이야기다. 그가 5년여 만에, 언론을 통해 하려고 했던 말을 이곳에 거의 그대로 옮겨 담는다.

7살에는 38선 남쪽으로, 70살에는 38선 북쪽으로

"지난 밤 오전 1시, 잠이 오지 않았다. 창문을 열었더니, 은쟁반 같은 보름달이 산꼭대기 위에 걸려 있었다. 그 달을 보면서 요즘 남북 관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달을 올려다보는 내 마음이 너무나 슬펐다. 그 달님은 나만 보는 게 아니라 이북에 있는 형제도 함께 보고 있었을 것이다. 마음을 달래려고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틀었다.

그런데도 울적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7살 때,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고향인 황해도 봉산을 떠나 어머니 손을 잡고 38선을 넘었다. 먼저 남하한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아 결국 어머니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야 했다. 7살이 되다 보니 어머니 등에 업히지 못했다. 발이 부르터 울면서 내려온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다 이제 일흔이 넘어 다시 38선을 넘어와 살고 있다. 7살 때는 38선 너머 남쪽으로, 70살이 넘어서는 38선 너머 북쪽으로. 이 무슨 묘한 운명인가? 그러고 보니, 다시 38선을 넘어 양구에 정착하게 된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양구는 한국전쟁 당시 한때 김일성 치하에 있었다. 휴전이 되면서 남쪽 땅이 됐다.

양구는 한반도의 정중앙에 있다. 그 가운뎃점에 살아서 그런지 남북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채 살고 있고, 남북 관계와 관련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요즘 이상하게도 밤에 달이 뜰 때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저 달 밑에 내가 고향에 두고 온 친척들이 살고 있겠지. 그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버리고 '탈북'을 하며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세상을 살고 있는데. 끼니를 거르고 사는 일은 없는지. 게다가 최근에는 전쟁 분위기마저 고조돼 더 심한 고통을 겪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들, 이런 저런 생각들이 무수히 떠오른다. 이대로 가서는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통일 베트남의 행복 지수는 2위, 분단 한국은 63위

밤하늘 달을 보면 울적했던 마음을 털어놓는 오충일 목사
 밤하늘 달을 보면 울적했던 마음을 털어놓는 오충일 목사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얼마 전 하노이에 다녀왔다. 베트남은 가난한 나라다. 그런데 그 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 없었다. 그 나라 사람들의 '행복한 지구 지수'가 세계 2위다. 그런데 잘 먹고 잘 산다는 한국은 63위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그들은 프랑스·미국 등의 강대국과 싸워 나라를 되찾았다.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다시 하나로 합치는 데 성공했다.

당연히 자긍심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다. 그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데 그보다 더 큰 이유가 또 무엇이 있겠나. 그때 나는 그들이 몹시 부러웠다. 한편으로는 또 부끄러웠다. 그들이 한 일을 우리는 해내지 못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우리는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을까, 북한을 내 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날은 언제가 돼야 올 수 있을까. 답답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갈 수가 없었다. 가지 않았다. 어머니 손잡고 파주 고랑포를 지나 걸어서 내려온 그 길을 금강산 관광 가듯이 동해로 배를 타고 올라갈 수는 없었다. 나는 언제고 통일이 되리라는 믿음을 갖고 살고 있다.

그때 내 손자들의 손을 붙잡고 걸어서 고향 길을 더듬어 올라가는 게 내 소망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북한에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살아서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게 될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통일은 고사하고 이러다 동족 간에 다시 전쟁이라도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그 바람에 잠이 오질 않는다. 위에서는 서울을 불바다를 만들겠다고 하고, 밑에서는 바로 대북 제재에 나서는 한편 북한이 도발하면 '도발 원점'을 응징하겠다고 맞대응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한국 상공에 B52 전략 폭격기를 띄웠다. 이 비행기는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다. 한때 북한을 겨냥해 모의 핵폭격 훈련까지 실시한 적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미 미군의 폭격을 경험한 적이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B52는 또 다른 공포다. 그 비행기를 보면서 북한 주민들은 당시 하늘에서 우박처럼 쏟아지던 폭탄을 떠올렸을 것이다. 기겁할 노릇 아닌가.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 보자.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남북한의 새 정부에 이 '나라'를 어디로 가져갈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7·4 남북공동성명, '민족대단결'을 기억하자

오충일 목사
 오충일 목사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남쪽과 북쪽 모두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민족을 위험한 상태에 빠트리는 국가 안보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민족이 있고 나서 안보가 있는 것이다. 국가 이전에 민족이 있고, 혈족이 있다. '분단'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정치 체제' 역시 한 번 왔다 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민족은 영원하다.

남북한 정부 모두 긴 안목에서 깊고 넓게 생각해야 한다. 이 상황에서 남북한 정부 모두 가장 우선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민족이다. 민족적 양심을 가지고 생각해야 한다. '민족'은 결코 멀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은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남북한은 '자주' '평화' '민족적 대단결'이라는 3대 통일 원칙에 합의했다. 남북 모두 그때 이미 '민족'이 갖는 중요성을 충분히 공감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3대 통일 원칙에 따라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해,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대화 기구를 마련했다. 우리는 이 원칙을 다시 살려야 한다.

1991년에는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해 상호불가침에 합의했다. 그리고 2000년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갖고 6·15 남북공동선언에 합의했다. 이 선언문에는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하고,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켜나가자'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민족이 가장 먼저 거론됐다.

2007년에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0·4 남북공동선언에 합의했다. 당시 두 정상은 '남과 북은 6·15 남북공동선언을 고수하고 적극 구현해 나간다'는 데 동의했다. 그리고 '군사적 적대 관계를 종식시키고 한반도에서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결국 우리가 마지막까지 숙고해야 할 것은 '민족'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29일 오전 0시 30분 전략미사일 부대의 화력타격 임무에 관한 작전회의를 긴급 소집하고 사격 대기상태에 들어갈 것을 지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김 제1위원장이 심야에 최고사령부 회의를 소집하고 이를 북한 언론매체가 신속히 전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 북한 김정은, 작전회의 긴급소집... "미사일 사격대기" 지시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29일 오전 0시 30분 전략미사일 부대의 화력타격 임무에 관한 작전회의를 긴급 소집하고 사격 대기상태에 들어갈 것을 지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김 제1위원장이 심야에 최고사령부 회의를 소집하고 이를 북한 언론매체가 신속히 전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이후 불과 7년여가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대북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당장 전쟁이라도 불사할 것 같은 지경에 다다랐다. 힘을 과시하면 될 것 같지만, 남북 간에는 결코 힘의 논리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남과 북에는 '가슴 속 장벽'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38선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외세를 등에 업고 동족 간에 전례 없이 잔인한 전쟁을 벌인 탓이다. 그때 남과 북을 불문하고,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가슴에 엄청난 증오가 싹텄다. 그 후로 툭하면 서로 싸우고 미워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이 문제는 전쟁을 불사해 휴전선을 무너뜨린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한 민족이라는 감정을 되살리지 않는 한 결코 해결하기 힘들다. 김정은 위원장은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 일은 기억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자신의 아버지가 한 일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 선대가 '우리끼리 잘 살아보자'고 약속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짚어봐야 한다.

북한에서는 '유훈정치'를 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자주·민주·민족대단결'은 지켜야 한다. 남한 역시 다를 게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가 했던 약속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가. 지금 이 상황이 평화로 가는 것인가. 이렇게 해서 어떻게 민족이 대단결을 할 수 있나. 선대가 했던 약속, 그 뜻 버리고 너무 부끄러운 일 아닌가.

어떻게 해서 그때보다 한 발자국도 더 앞으로 못 나가고 있는 것인지 답답하다. 결국 우리가 마지막까지 숙고해야 할 것은 '민족'이다. 이웃 나라하고도 잘 지내야 할 판에, 남북 대결은 동족끼리 할 짓이 아니다. 수천 년 같은 말을 쓰면서 이 무슨 창피한 일인가? 한국전쟁 때 그렇게 피 흘려 싸웠으면 됐지, 왜 또 그 일을 되풀이해야 하나?"

남과 북은 '3대 통일 원칙' 아래 다시 만나야 한다

집 뒷편 산비탈을 오르는 산책로, 오 목사를 찾아온 방문객들의 손을 빌어 만들었다.
 집 뒷편 산비탈을 오르는 산책로, 오 목사를 찾아온 방문객들의 손을 빌어 만들었다.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오후 4시께 시작한 대화는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됐다. 산골마을에 다시 어둠이 내리고, 산 능선 위로는 다시 둥근 달이 떠올랐다. 그런데도 오충일 목사는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눈동자는 여전히 형형한 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인터뷰가 끝나가면서 목소리는 점점 더 낮은 톤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회한에 잠겼다. 그처럼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은데, 자신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즘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걸 보면서 지난 생애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아온 게 아닌가, 자책했다. 그런데 자책을 해야 할 사람은 그뿐만이 아닌 것 같다. 다음은 인터뷰 말미에 오 목사가 꺼낸 말이다. 이 말은 사실 오 목사가 자신에게 한 말이라기보다는 분단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는 말로 받아들이는 게 더 합당하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양구의 이 후미진 산골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이러다 전쟁이 나는 거 아니냐'며 불안해 하고 있다. 인류 사회에 우리처럼 불쌍한 사람들도 없다. 남이든 북이든 한 사람의 생명,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우리 민족의 자산 아닌 것이 없다. 진정한 국가 안보를 위해서라면 그걸 지켜야 한다.

남이든 북이든 그저 내 것만 지키자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자면 남과 북은 자주·민주·민족대단결이라는 3대 통일 원칙 아래 다시 만나야 한다. 진정 우리 민족의 안보와 생명과 자산을 지키는 큰 틀에서 다시 만나야 한다. 이것이 양구의 한 산골마을에 들어와 살고 있는 이 촌로의 간절한 소망이다.

지나간 날들을 되짚어 보니,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만 불렀지 실제 통일을 위해 한 게 아무것도 없다. 헌신한 게 없다. 그래서 이렇게 양구 땅에서 지금과 같은 불안한 세상을 바라만 봐야 하는 내 마음이 몹시 괴롭다. 민족 문제·분단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어떻게 '크리스찬'이 될 수 있나. 동족이 서로를 증오하는 마당에 어떻게 예수를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나. 이런 상태에서는 크리스찬이라는 이름도 붙일 수 없다. 분단 시대에 진정한 크리스찬으로 못 살아보고 죽는 게 한이다."


태그:#오충일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