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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의 대표적인 광고 카피인 'Just do it'.
 나이키의 대표적인 광고 카피인 'Just do it'.
ⓒ 나이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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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0월 18일, 미국 뉴욕 주에 있는 나이키 타운 앞에 흑인 청소년들이 모여들었다. 주로 흑인과 히스패닉이 거주하는 빈민가 브롱크스의 복지관 친구들과 함께 온 에이미도 무리에 섞여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들던 아이들이 어느새 200여 명이나 됐다. 아이들은 저마다 나이키 운동화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가져온 운동화를 거침없이 쓰레기봉투에 집어넣었다.

운동화들은 나이키 매장 경비원들의 발 앞에 쏟아 부어졌다. 운동화 수백 켤레가 매장 앞에 작은 언덕을 이뤘다. 지나던 행인들과 기자들은 아이들의 행동을 호기심에 가득 차 쳐다봤다. 살아오면서 좀처럼 주목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행동했다. 그들이 바로 나이키의 핵심 고객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이들에게 나이키 운동화는 한때 보물 1호였다. 나이키는 단순히 스포츠 브랜드가 아닌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열두세 살의 흑인 청소년들에게 나이키 제품은 유니폼이나 다름없었다. 에이미 역시 우정의 표시로 친한 여자아이들과 나이키 티셔츠를 색깔별로 맞춰 입은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텔레비전 광고를 잘 보지 않았지만, 나이키만은 예외였다. 빠르고 리듬감 넘치는 나이키 광고에 열광했다. 특히 광고 마지막에 나오는 'Just do it(그냥 한번 해봐)'이라는 문구를 보며 자신들도 마이클 조던이나 타이거 우즈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으며 자랐다.

지금 아이들은 그런 나이키를 기꺼이 품에서 떠나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나이키 매장 앞에서.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나이키, 우린 널 무너뜨릴 수 있어"

에이미와 친구들은 복지관에서 시청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나이키가 지독한 아동노동 착취를 일삼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 소년이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축구공을 꿰매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상은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줬다. 완벽한 원형을 이루는 축구공을 만들기 위해서는 조각들을 손으로 바느질해야 하는데, 하나를 만드는 데 1620번의 손바느질이 필요했다. 바로 그 작업을 파키스탄에 사는 자신과 동갑인 소년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상을 보는 아이들과 축구공을 만드는 아이들은 나이가 같았지만 생활은 전혀 달랐다. 에이미와 친구들이 졸음을 참으며 지루한 수업시간을 보내는 동안, 파키스탄의 아이들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축구공을 꿰맸다. 학교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축구공을 만든 대가로 고작 60센트를 받았다.

나이키가 지구 반대편에서 어린아이들을 혹사시켜 제품을 만들고 있었다니. 아이들의 배신감은 너무나 컸다. 자신들의 문화를 이끌어줬던 나이키가 다른 나라에서는 비윤리적인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다. 바로 이 울분이 아이들을 행동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수백 개 인권단체들도 감히 하지 못해온 말을 빈민가의 청소년들이 당차게 대신해줬다. 에이미는 폭스 방송국 카메라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

"나이키! 우리가 널 만들었으니, 우리가 널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걸 잊지마!"

현명한 소비자-책임 있는 기업의 상관 관계

<고장 난 거대 기업 - 우리 시대 기업에 따뜻한 심장 달기> 겉표지
 <고장 난 거대 기업 - 우리 시대 기업에 따뜻한 심장 달기> 겉표지
ⓒ 김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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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이야기는 기업을 감시하는 시민단체인 좋은기업센터에서 기획한 책 <고장 난 거대기업>에 소개된 사례를 재구성한 것이다.

기업들이 만들어 내놓는 브랜드 이미지 광고는 밝고 긍정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윤리경영이 화두가 된 이후로는 더욱 그렇다. 당장 기업들의 누리집에 들어가 봐도 사회적 책임을 앞세우며 봉사활동을 하는 사진들이 가득하다. 기업들의 노력과 시도는 좋다. 그러나 보이는 좋은 면이 다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책 <고장 난 거대기업>은 바로 이 점을 꼬집는다.

"많은 기업들이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제품을 출시하기에 앞서 검사를 하고,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입니다. 제품이나 서비스가 완벽하지 못한 경우 리콜을 합니다. 또한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내고, 낙후된 지역의 복지를 위해 돈을 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으로 기업이 저지른 잘못이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러한 행동이 기업의 잘못을 숨기는 방편이 되기도 합니다. 그 사실을 이 책의 사례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니, 소비자들의 참여와 행동만이 기업을 사회적 책임의 길로 이끌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본문 6쪽)

아프리카의 아기들을 죽음으로 내몬 네슬레, 무리한 확장으로 지역사회와 갈등을 겪고 있는 홈플러스, 불법 파견 문제로 몇 년째 노사가 대립하고 있는 현대자동차, 성차별적인 고용행태를 보인 월마트, 제3세계 국가에서 지독한 노동 착취를 했던 나이키, 독점을 통한 빅브라더를 꿈꾼 마이크로소프트, 10%도 안 되는 공정 무역 커피를 사용하면서 마치 전부를 사용 하는양 마케팅을 벌인 스타벅스, 나이지리아의 환경과 지역사회를 파괴하며 석유를 채취한 쉘, 콜라를 만들기 위해 인도의 식수를 훔친 코카콜라, 아프리카를 다이아몬드로 인한 분쟁에 휘말리게 한 드비어스, 최악의 참사를 내놓고 보상 금액을 줄이기에만 급급했던 삼성중공업, 회계부정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엔론.

'부조리' 가득한 제품, 사고 싶으세요?

이 책에 소개된 열두 가지 이야기는 모두 지나치게 이윤에 치우쳐 소비자·인권·노동·환경·공정 거래·지역사회·지배 구조는 뒷전인 기업들의 잘못을 다루고 있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묻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기업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이제 기업이 책임져야 할 것은 주주의 이익만이 아니라, 노동자·지역사회·환경 등 기업을 둘러싼 이해 관계자들 모두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 길을 이끌어야 하는 것이 바로 행동하는 현명한 소비자다. 책에 실린 스타벅스의 사례를 보자.

스타벅스 로고.
 스타벅스 로고.
ⓒ 스타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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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앞장서서 공정 무역 커피를 판다고 홍보했던 스타벅스가 2005년 공정 무역 커피 판매와 관련해 새로운 발표를 했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21개국의 매장에서 '오늘의 커피'를 공정 무역 커피로 만들어 판매한다는 것이었다. 스타벅스는 만약 '오늘의 커피'에 공정 무역 커피를 쓰지 않을 경우, 고객이 요구하는 즉시 공정 무역 커피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두 명의 블로거가 '스타벅스 챌린지'를 제안했다. 가까운 스타벅스 매장으로 달려가 오늘의 커피에 공정 무역 커피를 사용하고 있는지 실제로 확인해 보자는 것이었다. 만약 스타벅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면 공정 무역 커피를 달라고 주문했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지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곧 13개국 300여 명의 소비자가 이 제안을 실행하고 경험담을 올렸다. 그들은 스타벅스의 호언장담과 달리 실제로 공정 무역 커피를 제공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고 밝혔다."(본문 164쪽)

이외에도 나이키의 변화를 이끈 미국 빈민가 청소년들, 월마트의 성차별에 집단 소송으로 맞선 여성 노동자 베티 듀크, 빅브라더를 꿈꾸던 마이크로소프트에 맞서 싸운 오픈 소스 운동가들의 일화는 우리에게 커다란 영감을 준다. 거대 기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분명히 힘들고 지난한 일이다. 그러나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라면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다.

우리도 충분히 참여할 수 있다. 거창한 일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물건을 사면서 가격·디자인·기능 등을 고려하듯이 이제는 제품이 만들어진 과정도 눈여겨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환경을 파괴하고, 노동조합을 탄압하며, 인권을 침해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을 구입하고 싶은가. 

이 책은 소비자 주권 회복이 경제 민주화의 훌륭한 교두보가 될 것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덧붙이는 글 | <고장 난 거대 기업> (좋은기업센터 기획, 이영면·전채연·정란아·신태중 지음 | 양철북 | 2013.03. | 1만2000원)



고장 난 거대 기업 - 우리 시대 기업에 따뜻한 심장 달기

이영면 외 지음, 좋은기업센터 기획, 양철북(2013)


태그:#고장 난 거대 기업, #양철북, #좋은기업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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