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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먼저 제목 설명부터 해야겠다. <스피릿 로드>의 '스피릿(spirit)'은 주로 정신이나 영혼을 뜻하는 단어이다. 그렇다고 이 책을 '정신의 여정'이나 '영혼의 길' 쯤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다. 저자가 주로 세계를 다니면서 다큐멘터리를 찍는 피디이기 때문에, 그가 세계 곳곳을 누비는 동안 만났던 지성의 공간과 그 공간에 얽힌 빛나는 영혼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스피릿'의 뜻은 책날개 아래쪽에 조그맣게 새겨져 있었다.

스피릿spirit

[명사]
1. 정신, 영혼
2. 진정한 의미, 참뜻
3. 증류주,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  

세상은 넓고, 맛난 술은 많다
▲ 탁재형의 <스피릿 로드> 세상은 넓고, 맛난 술은 많다
ⓒ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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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 항목이 굵은 글씨로 되어 있는 걸 본 후에야, 비로소 책 표지에 술병이 그려져 있고, 이 책이 술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나는 실망하진 않았다. 도리어 '스피릿'이 정신 또는 영혼 그리고 참뜻이라는 의미와 함께,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이란 의미를 함께 포용하고 있는 단어인 것이 참으로 반가웠다.

고도의 정제 과정을 거쳐 나온 증류주는 과일이나 곡물에서 알코올 성분만을 추출하여 술로 만든 것이어서, 그 순수성으로 인해 그러한 정신주의적 의미와 같은 단어로 쓰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느낀 반가움은 뭐랄까, 영혼과 술이 오버랩 되면서, '스피릿'이란 지성과 감성의 통합이나 균형감을 상징하며, 술이 가진 인류 문화의 토착성과 보편성이 도리어 삶의 '진정한 의미'와 상통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내 바람은 아닐는지.

탁재형 피디는 제법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아마 <도전! 지구탐험대>나 <세계테마기행> 같은 굵직한 해외 다큐멘터리를 만든 피디로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저자에게 가장 자주 하는 질문이 '해외여행 많이 다니시니 좋으시겠어요'라고 하는데, 방송을 만들러 해외로 나가는 것은 결코 '여행' 이 아니라, '출장'일 뿐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한 대 맞은 느낌'으로 다가온 술 맛은 어떤 맛일까

저자는 그래서 '아름다운 여행지에서 일을 해야 하는 괴로움과 좋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달래줬던 건 그 나라의 술'이라고 했다. 오히려 하루 일을 마치고 '출장' 간 나라의 술을 한 잔 입에 대는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이 시작된다고 했으니, 저자에게 술이 어떤 대상인가를 알게 한다. 이 책을 쓴 동기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스피릿 로드>에서 저자가 우리에게 보여준 여정은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20여 개국의 술을 소개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전통 증류주를 소개하는 것으로 여정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각 나라의 풍물과 저자 개인의 체험과 이야기 그리고 술에 얽힌 역사와 제조과정을 풀어내고 있어 매우 재미있게 책을 읽을 수 있다.

게다가 탁재형 피디의 문장은 참 풍성하고 매끄럽다. 깊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는 절로 입에 웃음을 물게 할 정도로 막힘이 없고 자연스럽다. 저자가 '첫사랑 같이 아련한 스피릿의 이데아'라고 소개한 루마니아의 빨링꺼를 표현한 다음 문장에서 나는 한참을 멈추었다.

증류소 주인 할머니가 빨링꺼를 조금 받아서 가열된 증류기에 뿌려본다. 화아악! 파란 불꽃이 마법처럼 피어오른다. 그 어떤 계측기도 흉내낼 수 없는, 완성된 술의 등장을 알리는 퍼포먼스다. "됐어. 제대로 된 거야." 할머니의 얼굴에 주름 가득한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잔에 남은 술을 권한다. 느릿느릿, 손에서 코로, 다시 입으로. 그리고 번개처럼 목구멍에서 위장으로. "……."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희미한 귀울음만 들려올 뿐. 빨링꺼를 접한 첫 느낌은 '한 대 맞은 것 같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식도를 태우는 것으로는 부족한, 송두리째 둘둘 말아 올리는 것 같은 고통. 비록 찰나이긴 하지만 그것은 분명 고통이다. 하지만 삽시간에 그 괴로움을 지우며 올라오는 것은 머리를 풀어헤친 발레리나의 광기 어린 춤 같은, 강렬하고 발랄한 과일향기. 0.5초 안에 극한의 자학과 보상을 오간 이 순간의 체험을 표현하기엔 아직 글 실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본문 27쪽-28쪽)

마치 '날카로운 첫 키스'의 기억처럼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듯이 강렬한 술맛의 '파란 불꽃'을 느끼게 한다. 맛이란 입과 혀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온몸으로 느끼는 매우 복합적인 감각임을 다시 깨닫게 한다. 도대체 '한 대 맞은 느낌'으로 다가온 술맛이란 어떤 맛일까? 극한의 자학과 보상의 체험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저자는 '눈가에 핑 도는 눈물과 함께' 간신히 5리터만 구입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지독한 이끌림만 던져놓은 채, 루마니아는 너무 멀고, 술맛은 아득하기만 하여 차라리 슬프다.

증류주에 대한 저자의 다소 과장된 찬양

<스피릿 로드>를 읽으면 정말 많은 나라들에서 참으로 다양한 술들이 각각의 문화와 역사를 담고 출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중요하게 살핀 것 중 하나는 술에 관한한 나라 사이의 우열이 없다는 것이다. 이탈리아나 독일, 영국 같은 소위 선진국보다 도리어 네팔, 수단, 페루, 말라위, 라오스, 캄보디아, 루마니아, 베네수엘라 등 선진국 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나라들의 술들이 더 많이 등장하는 걸 보면, 아마도 '스피릿 제국주의'는 아직까지 없는 모양이다. 문화적 다양성의 측면에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저자는 특히 증류주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이슬람 원리주의에 기초하고 있는 수단은 술을 금하는 나라이다. 저자의 그런 수단에서 친구 말릭과 함께 수단 전통주인 '아리기 수꾸수꾸(최고급 아라기)'를 마시는데, "코란에는 '술 마시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있어도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말씀은 없거든. 그리고 신은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지"라고 읊조리는 말릭의 말을 인용하면서 술을 사랑하는 자신의 불안한 영혼을 달랜다. 그러면서 저자는 증류주에 대한 다소 과장된 찬양을 한다. 그 찬양 속에 스피릿을 왜 증류주라고 하는지 보여준다.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현지의 전통 증류주를 마실 때마다 나는 일종의 접신과도 같은 체험을 한다. 한 민족이 발전시킨 먹고 사는 문화의 피라미드 정점에 위치한 것이 증류주이기에, 그리고 그 제조방법 역시 곡물이든, 과일이든, 벌꿀이나 동물의 젖이든, 그 지역의 자연이 주는 풍미의 정수(스피릿spirit)만을 모으는 어려운 과정이기에, 따라서 증류주를 마시는 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오랜 체험과 역사를 담은 대용량 USB 메모리를 내 몸에 꽂는 것처럼 단시간에 주입하는 행위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단 몇 초 만에 가라테와 헬리콥터 조종법을 몸에 다운로드하는 장면처럼.(본문 77쪽)

저자는 러시아에서 무미(無味)의 미학을 지닌 보드카를 찬탄하고, 베네수엘라 고지대의 쌀쌀한 날씨를 이겨내기 위해 커피에 타먹는 술 미체에 위안을 얻으며, 중국의 자존심인 바우지우의 향기에 취하기도 한다. 아프리카 말라위와 남미의 페루는 지구 반대편에 있지만 두 나라 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같은 아픔을 공유한 술인 까냐주와 꺄냐소를 마시며 그들의 아픔과 함께 한다. 그리고 라오스 맥주 비어라오와 멕시코의 데킬라를 통해 술잔에 담긴 기억과 추억을 되새기기도 하였다.

아마존 정글의 맥주인 페루의 마사또는 특히 재미있다. 유까(고구마와 무를 반씩 닮은 남미의 먹을거리)로 만든 술인데, 저자는 이 마사또를 '소박하고 깔금하면서도, 어딘지 모를 거친 맛이 정글의 밤과 잘 어울린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저자가 생각하기에, 유까는 당분이 적어 발효가 금세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 발효를 촉진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 들려온 대답은 '씹는다'였다. 유까 반죽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 발효가 촉진된다는 것이다.

그러자 저자는 누룩이나 몰트를 사용하기 이전 고대인들이 침의 성질을 이용해 술을 만들었다면, 머나먼 아마존 정글까지 와서 고대 인류의 지혜가 담긴 술을 알게 된 것을 참으로 영광스러우며, 인간과 술의 여정을 탐구하는 저자로서는 운명 같은 만남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마시고 있는 마사또만큼은 여자가 씹은 것이길 바라는 저자의 로맨시티즘에 웃음이 나왔다.

독일은 100%, 일본은 66.7%... 근데 한국은 10%?

이제 독일 맥주 바이스비어를 말해야겠다. 이유는 우리나라 맥주를 말하기 위함이다. 왜 우리나라 맥주는 그리도 밍밍한가 말이다. 독일은 맥주 원료로 쓰이는 곡물 중에 맥아(싹이 난 보리)의 비율이 100%, 일본은 66.7% 이상 되어야 맥주로 분류하는데, 한국은 10%만 넘으면 된다고?

또한 독일 전역의 맥주 제조업체만 1300개가 넘는다는데, 한국은 하이트와 OB 두 회사만 존재하다가, 규제가 풀려 2010년에 제 3의 맥주 제조업체 '세븐 브로이'가 맥주 생산 78년만에 겨우 생겨났다고 하니, 1300개와 3개라, 우리나라 맥주의 문화적 다양성과 사람들의 취향이 얼마나 무시되어 왔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오죽했으면, 저자가 '세상은 넓고 맛있는 술은 많다'며 13년간 떠돈 것이, 성분이 불분명한 희석식 소주와 정작 보리 함량은 얼마 되지 않는 맥주에 길들여지고 있는 한국 술꾼들의 현실에 대해 비분강개한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을까.

마침내 해외여행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온 저자는 전라도의 술 '죽력고'를 소개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거기에도 비분강개가 담겨 있다. 그러면서 술은 먹고 사는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만들어진 '비일상의 음료'이므로 여행과도 통하며, '술은 테이블에 앉은 채 떠날 수 있는 여행'이라는 멋진 말을 던진다.

저자와 함께 한 술 여행이라 어지럽다. 다만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바란다. '정신 또는 영혼'의 의미를 가진 '스피릿'이 향기로운 술 '스피릿'으로 인해 더욱 풍요로워지길.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지만 때로 한 잔의 술은 그 이상의 무엇이다.(본문 221쪽)

덧붙이는 글 | 기사 내용 중에 "독일은 맥주 원료로 쓰이는 곡물 중에 맥아(싹이 난 보리)의 비율이 100%, 일본은 66.7% 이상 되어야 맥주로 분류하는데, 한국은 10%만 넘으면 된다고?"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이 문장의 내용은 맥주를 맥주라고 인정하는 기준을 밝힌 법 내용일 뿐이고,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충분히 인용할 수 있는 문장이지만, 기사를 읽는 독자들은 실제로 우리나라 맥주에 들어가는 맥아의 비율이 10%밖에 되지 않는 질 낮은 맥주라고 오해할 소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맥주회사에서는 이 문장에 대해 비록 규정은 10% 이상이지만 실제 들어가는 맥아는 최소 70% 이상이며, 우리나라 법 규정이 지나치게 완화되어 있는 것이 문제이지, 맥아 비율을 낮추면 소비자들이 외면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맥주는 있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실제 들어가는 맥아의 비율에 대해 공식적인 확인을 할 수 없지만, 기사 문장에 독자들이 충분히 오해할 수 있다는 문제 제기는 타당하다고 판단하여, 이 글을 덧붙여 올립니다.

<스피릿 로드>, 탁재형, 시공사, 2013년 2월 26일, 1만 3천 원



스피릿 로드 - 여행의 순간을 황홀하게 만드는 한 잔의 술

탁재형 지음, 시공사(2013)


태그:#스피릿, #증류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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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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