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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독립운동가 중 윤봉길 의사가 우리에게 없었다면 얼마나 공허할까? 그 시대를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지만, 민족과 국가를 위해 몸 바친 사람들은 많지 않은 편이다. 중국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 폭탄을 던져 국혼을 일깨운 사건이 일어난 때는 1932년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뒤 13년이 지난 뒤였으니까 한민족에 대한 일제의 압제가 극에 달할 때였다. 중국 땅 홍구공원 거사의 주인공은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의사이다.

우리가 모인 것은 장인어른의 83회 생신 때문이었다. 보령 처제 집에서 식사나 같이 하자며 가벼운 마음으로 가솔(家率)이 모였다. 나의 장인어른은 영천(永泉) 박영재(朴永宰) 시인이다. 3.1절은 국경일로 공휴일에 속하는 날이다. 목회를 하고 있는 자녀들이 대부분이어서 모임 날짜를 서로 맞추기가 쉽지 않다. 3월 1일 금요일은 다행히 모두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날이었다.

하루 전에 온 사람들도 있고, 당일 도착한 사람들도 있다. 아침에 우리는 간단히 감사 예배를 드리고 발길을 재촉했다. 장인어른에게는 손자 손녀에 해당하는 아이들만 20 여 명이 되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계층도 다양했다. 이 아이들에게 우리의 역사에 대해, 과거 일제시대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서 가까이 있는 충의사(忠義祠)를 방문하도록 한 것이다. 오늘이 3.1절이 아니던가!

영천 박영재 시인(가운데), 조성훈 목사(왼쪽)와 함께
▲ 충의사 입구 계단에서 영천 박영재 시인(가운데), 조성훈 목사(왼쪽)와 함께
ⓒ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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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편된 신 주소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3-5로 되어 있었다. 예산군은 윤봉길 의사 사당인 충의사를 관공명소로 정해 적지 않은 투자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기야 내 세울 만한 역사적인 인물이 드문 시절에 윤봉길 의사는 예산군의 자랑거리임에 분명하다. 한일 병탄부터 계산하면 36년, 실제적으로 국권을 상실하게 된 을사조약(1905년)부터 역산(逆算)하면 40년의 기간을 일제의 강압 통치를 받아온 우리 민족이다.

1910년에서 20년대까지는 그래도 잃은 민족혼을 되찾겠다며 일제에 항거한 영명한 젊은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내로라하는 열혈청년들도 하나 둘 친일로 돌아섰다. 대표적인 사람을 우리는 최남선과 이광수를 든다. 육당 최남선은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이고, 춘원 이광수는 동경 유학생 중심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이다. 일제 초기 독립운동을 주도한 지식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일제 압제의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친일 분자로 변절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위의 두 지식인뿐만 아니라 식자층의 대부분이 훼절의 길을 걸었다. 이런 점에서 안중근과 윤봉길은 보석과도 같이 빛나는 민족의 운동가들이다. 그들을 우리의 역사책은 '의사(義士)로 기록하고 있다. 역사의 주체는 비록 수는 많지 않지만 이런 의로운 사람들이 지켜왔음을 알아야 한다.

충의사는 크게 본전(사당)과 기념관 그리고 저한당(狙韓堂)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전에는 윤 의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기념관에는 윤봉길 의사의 길지 않은 삶의 궤적을 입체적으로 꾸며놓고 있다. 그리고 저한당은 1911년에서 1930년 망명길에 오를 때까지 20 여년 가까이 생활하던 곳이다. 고증을 거쳐 만들어놓은 유적으로 예산군 관광시설사업소에서 표현한 대로 매헌 윤봉길 의사의 혼이 살아있는 곳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렇게 보였다.

윤봉길 기념관은 입구부터 출구에 이르기까지 25세에 순국한 윤 의사의 일생이 잘 조직되어 있었다. 그의 기백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보통학교를 자퇴하고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자퇴 직전, 학생들의 3.1운동 참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일장 연설을 하는 총칼로 무장한 선생에게 한국인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왜 나쁘냐며 항의하는 그의 매직비젼 입체영상에서 한 줄기 소낙비를 만난 듯 통쾌함을 맛본 것은 나만의 감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윤봉길 의사는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 12세의 소년이었다. 따라서 운동에 크게 기여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13년 뒤 중국 땅 홍구공원에서 거사를 일으킬 민족혼을 비축하는 계기는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윤 의사는 이미 청년기에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자들에게 글을 깨우치게 했으며, 독서회를 조직하고 농촌 계몽운동을 추진하는 등 선각자적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었다. 이런 윤 의사는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큰 자랑거리임이 분명하다.

나는 꼼꼼히 그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았다. 많은 사람이 상해 홍구공원을 가득 메운 가운데 천장절 겸 전승기념 축하식장에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폭탄을 투척할 때는 하늘도 울고 땅도 떠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빼앗긴 주권을 억울하게 침탈당한 억욱함에 울고, 대한 남아 윤봉길 의사의 기백에 놀라 떠는 모습에서 구비구비 흘러온 역사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3,1절이어선지 충의사를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어린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온 사람들도 많았다. 개인주의가 횡행하고 있는 시대라곤 하지만 아직 나보다 더 큰 사회와 민족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 안도되었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도 나만을 위한 삶을 지양하고 많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길을 모색하고 그 방향을 제시해 준 것에 다름 아니다. 특히 그의 약한 자를 위한 배려는 사회운동도 주위의 작은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치르지는 일제의 천장절 행사에 폭탄을 투척하기 위해 떠나기 직전 백범 선생 앞에서 선서를 하고 있는 윤봉길 의사.
▲ 백범 앞에서 선서하는 윤봉길 의사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치르지는 일제의 천장절 행사에 폭탄을 투척하기 위해 떠나기 직전 백범 선생 앞에서 선서를 하고 있는 윤봉길 의사.
ⓒ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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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서문을 낭독하며 윤 의사가 백범 앞에서 마지막 작별을 하는 실물 크기의 조형물 앞에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윤 의사는 권총과 폭탄을 양 어깨에 걸고 가슴엔 선서문을 붙인 가운데 백범 앞에서 하직 인사를 하고 있었다. 보내는 자나 거사 장소로 향하는 자 모두 마지막이라는 비장미가 우러나왔다. 1930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을 가면서 남겼다는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사내 대장부는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글귀를 관철시키는 마지막 장소를 그는 상해 홍구 공원으로 택한 것이다.

매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의 부끄러움을 조금은 덜게 되었다. 거사로 일본 시라카와(白川) 대장 등 많은 사람이 폭사(爆死) 내지 큰 부상을 당하고, 윤 의사는 사형을 선고 받고 거사 7 개월 뒤인 1932년 12월 19일 25세의 일기로 길지 않은 삶을 마무리했지만 그분의 행동은 청사에 길이 빛난 것이다. 이런 삶이 역사 위의 삶이고 위대한 삶인 것이다. 오늘 20 여 명의 대가족을 인솔하고 매헌 윤봉길 의사 사당 충의사를 방문한 것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어른들에게도 사고(思考)의 영역을 넓히고 굳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6년 뒤면 3.1운동 발발 100주년이 된다. 우리의 눈을 더 넓고 높은 곳으로 돌릴 때이다.


태그:#충의사, #3.1절, #윤봉길 의사, #역사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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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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