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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교과부 장관이라 해도 교과서 내용을 마음대로 고칠 수 없고, 여러 절차에 따라 수정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 같다. 권력의 필요에 따라, 일부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교과서를 고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라고 받아들인다."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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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출판사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의 집필자 중 한 명인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는 MB 정권의 '교과서 우경화'에 제동을 건 대법원의 판결을 환영했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원)는 15일 김 교수 등이 교과부 장관 등을 상대로 낸 수정명령 취소 청구소송에서 교과부의 손을 들어준 원심(2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명박 정권 초기 '좌편향'을 이유로 교과서 내용을 수정하도록 명령한 교육과학기술부의 조치에 맞서 소송을 낸 지 4년 만에 나온 결과다. 대법원은 교과서 집필자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재판부는 "교과부의 수정명령이 표현상 잘못이나 기술적 사항 또는 객관적 오류를 잡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검정을 거친 교과서 내용을 실질적으로 변경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에는 새로운 검정절차를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검정절차상 교과용도서심의회의 심의에 준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재판부는 "검정제도를 채택해 교과용도서심의회의 심의 등을 거치도록 한 것은 헌법상 교육의 자주성·정치적 중립성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해관계자나 전문가들의 절차적 참여를 보장하도록 한 검정제도의 취지가 행정청의 수정명령으로 훼손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2008년 11월 교과부는 해당 교과서 내용 중 29곳의 수정을 명령했다. 보수 성향의 학자로 구성된 '교과서포럼' 등이 좌파 편향이 짙다는 이유로 요구한 교과서 내용 수정안을 교과부가 받아들인 결과였다. 집필자들은 일방적으로 수정명령 처분이 내려지자 다음해 2월 행정소송을 냈다.

해당 교과서 집필자 중 한 명인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는 16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인터뷰에서 "우리는 이 사건이 정치적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하며 소송을 제기했다"며 "대법원 판단 역시 '권력의 필요에 따라, 일부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교과서를 고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라고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교과부 장관의 교과서 수정명령에 대해 "정부가 정치권력을 이용해 특정 역사관을 관철시키며 그것만이 진리이고 사실인 것처럼 만들려고 하는 게 근본적 문제"라며 "교과부 장관이라면 정치적 상황이 어떻건 간에 교육이 정치문제에 휘둘리는 것을 막아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 교수와의 일문일답.

"'공출' 뜻 어렵다고 고치라 해... 수정명령 내릴 정도로 문제 있었는지 의문"

- 대법원이 교과서 집필자 승소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다. 파기환송심은 대법원 판례에 따른다는 관례상 사실상 집필자들의 승소로 사건이 끝날 가능성이 높다. 소감이 어떤가.
"아직 최종 판결은 아니다. 대법원이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다시 돌려보냈기 때문에 고법에서의 심리가 남았다. 그래도 대법원 판결에 따라 결과가 잘 나올 거라 기대한다."

- 대법원에서 2심과 다른 판결을 내린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우리는 이 사건이 교과부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일어나게 됐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근현대사 교과서뿐만 아니라 다른 교과서·교육과정에서도 교과부가 수정 명령을 내리는 일들이 계속 됐다. 우리가 소송을 제기한 이유다. 대법원 역시 '교과부 장관이라 해도 교과서 내용을 마음대로 고칠 수 없고, 여러 절차에 따라 수정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 같다. 권력의 필요에 따라, 일부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교과서를 고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라고 받아들인다."

- 당시 교과서 수정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가 있나.
"교과부 장관이 수정명령을 내릴 정도로 문제가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교과부에서 수정명령을 내린 부분 중 하나는 1946년 미군정 당시의 민중 봉기를 설명한 내용이다. 교과서에서는 그 시절 민중들이 '쌀 공출의 폐지, 토지개혁의 실시, 미군정 퇴지' 등을 요구했다고 서술했다. 이에 교과부는 우리 쪽에 "공출이란 단어가 어렵다'는 수정사유를 들며 '미곡수집'으로 수정하라고 했다. 교정 작업 수준의 수정명령인 것이다. 이외에도 고쳐도 별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 부분을 고치라고 명령해서 마치 교과서가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비춰졌다."

- 교과부는 '교과서 내용이 좌편향됐다'는 보수단체의 주장을 받아들여 수정명령을 내렸다.
"부당하다. '좌편향'이라는 단어는 의견과 관점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목적으로 쓰인 것이나 다름없다. 예를 하나 들겠다.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문제로 시끄러워진 건 2004년부터다. 당시 국회 국정감사 때 어느 한나라당 의원이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는 6·25 전쟁 당시 북한이 남침한 사실을 서술하지 않았다'며 좌편향성이 심각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틀렸다. 교과서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북한의 전면공격'과 '남침'이란 단어는 사실상 같은 의미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쓰는 단어를 안 썼다며 사실과 다르게 주장했다. 일부 언론들도 한나라당 의원의 주장을 그대로 기사 제목으로 뽑았다. 많은 사람들 역시 마치 그 주장이 사실인 것처럼 믿었을 것이다. 교과부 역시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였다. 결국, 정부가 정치권력을 이용해 특정 역사관을 관철시키며 그것만이 진리이고 사실인 것처럼 만들려고 했다."

"장관의 교과서 수정명령권 격상... 국가가 모든 걸 통제하겠다는 건가"

- 교과부 장관의 수정명령은 잘못된 교육철학 탓이라고 보는 건가. 
"교과부 장관을 비롯해 교육 관료들은 분명한 교육철학이 있어야 한다. 청와대의 기조에 따라 움직일 수는 있지만, 그래도 교육이라는 건 업무 고유의 통일성을 지녀야 한다고 본다. 교과부 장관이라면 정치적 상황이 어떻건 간에 교육이 정치문제에 휘둘리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런데 교과부 장관은 오히려 정치권력이 교육에 영향을 미치는 데 앞장서는 것 같다. 역대 정부들도 자신들의 정책을 교육을 통해 사회에 확장시키고 관철시키려는 모습을 보여왔다. 교과부 장관에게 철학이란 게 있다면, 이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어도 최소한 막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보여줘야 한다.

교육 관료들도 문제다. 줏대가 전혀 없다. 근현대사 교과서만 해도, 2004~2007년은 문제가 안 된다고 했다가, 정권이 바뀌니 문제가 있다고 판단내렸다. 만약 이번에 정권이 바뀌었다면, 교과부는 또다시 '문제없다'고 입장을 바꿨을지도 모른다. 교육 관료들은 최소한 교육의 자주성과 정치적 중립성은 지켜야 한다."

- 그런데 교과부는 장관의 교과서 수정명령권을 법률 수준으로 격상시키겠다고 입법예고를 했다.
"2008년 우리가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명령에 반대해 소송을 걸면서 논란이 본격 시작됐다. 장관의 교과서 수정이 논란이 될 수 있다는 걸 교과부가 알게 됐다. 그러자 교과부는 오히려 장관이 편의에 의해 고칠 수 있도록 법제화하겠다는 것 아닌가. 그런 법제화 시도 자체는 위험한 일이다. 국가가 모든 걸 통제하겠다는 식으로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태그:#김한종, #교과부,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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