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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올해는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를 열고, 비디오아트를 탄생시킨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라는 타이틀로 1년간 그의 생애와 예술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 기자 말

무릎골절치료중인데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서울시립미술관 김홍희 관장
 무릎골절치료중인데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서울시립미술관 김홍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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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광란의 해프닝을 벌여왔다. 왜 그랬을까. 그는 소통이 없는 숨 막히는 세상과 가치가 하나밖에 없는 답답한 세상에 구멍을 내고 싶어했다. 그래서 서구인들이 만든 근대라는 이분법적 위계를 깨고 차별과 소외가 없는 세상을 혁명이 아니라 예술로 구현하려 한 것이다.

그는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전후 무후한 위성아트라는 예술품을 발명했다. 인터넷과 SNS의 원조가 되는 전자초고속도로를 구현한 것이다. 그래서 인류가 경계 없이 축제의 삶을 누리며 소통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삶을 기원했다.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다소 난해하고 낯선 백남준의 생애와 예술을 보다 쉽게 풀어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지난 1월 30일, 서울시립미술관 김홍희 관장을 만났다.

김 관장은 1980년 전위무용가 머스 커닝햄의 후원회장 바바라 툴 여사의 소개로 백남준을 만난 후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불문학도였던 그가 미술사로 전공을 바꿨고 결국 백남준 연구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지금은 백남준 전문가로 전위미술과 미디어아트전문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백남준은 10대에 철학적으로 맑스, 예술적으로 쇤베르크가 스승이었다. 이 영상은 현재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전시(2013년 1월 29일-6월 30일)하는 <부드러운 교란-백남준을 말한다> 중 한 장면. 백남준의 인터뷰를 장 폴 파르지에가 1990년 편집한 것인데 자막에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시 한국에서 맑시스트가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A cette epoque en Coree il etait dangereux d'etre marxiste)"
 백남준은 10대에 철학적으로 맑스, 예술적으로 쇤베르크가 스승이었다. 이 영상은 현재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전시(2013년 1월 29일-6월 30일)하는 <부드러운 교란-백남준을 말한다> 중 한 장면. 백남준의 인터뷰를 장 폴 파르지에가 1990년 편집한 것인데 자막에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시 한국에서 맑시스트가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A cette epoque en Coree il etait dangereux d'etre marxis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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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은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죠?
"백남준은 전설처럼 신화화 된 상태로 그 기행만 알려져 있지 그 밑에 깔려있는 의미가 어렵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잘 모를 수도 있어요. 백남준을 센세이셔니즘으로만 보기에 그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한국에선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죠."

- 백남준은 10대에 막강한 독서가였고 쇤베르크, 마르크스도 섭렵했는데요.
"당대 최고 부잣집(지금으로 치면 삼성가) 막내로 태어난 백 선생은 집안도 좋았지만 워낙 타고난 기인이에요. 일찍이 아방가르드 기질이 있었어요. 10대에 이미 쇤베르크 판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 헤맸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죠. 마르크스에 대한 열광은 그 당시 지성인과 엘리트들이 다 마르크시스트였으니까, 그런 정서가 어린 그에게도 전파됐고. 그 나이에 그걸 받아들인 게 백남준이죠."

- 동경대에서 음악을 전공했는데 어떻게 미술가가 됐나요?
"백남준은 쇤베르크 논문으로 동경대를 마치고 독일 뮌헨 음대로 유학을 갔죠. 공부를 하는데 전통음악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어 피아노와 피아노 사이의 존재하는 음이 없을까 하며 피아노를 한 대가 아니라 두 대로 치는 것도 발상하죠. 이렇게 고전음악에 대한 돌파구를 찾다가 존 케이지를 만나 그 사상에 매료되는데, 그가 말하는 음악철학은 음악이 소리의 조직이지 멜로디나 하모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의 맥박, 호흡이 다 음악의 소스가 되는 비트음악이죠. 음악적 음악이 아니라 소리의 음악, 그러다보니 신체의 리듬부터 자동소리, 기침소리 같은 일상의 소리를 다 음악의 범주에 포함시킨 거죠. 미리 작곡하여 연주하는 게 아니라 소리에 도전하다 작곡을 하는 방식, 존 케이지는 주역에 나오는 우연성, 비결정성 요소를 도입해 작곡을 했는데 백남준은 그런 사상에 경도됐죠. 말하자면 동양정신에 빠진 서구인 철학자에게 서양문화에 젖어있는 한국인이 반대로 큰 영향을 받은 거예요."

샬럿의 누드첼로연주. 저드 얄커트,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비디오 5분10초 걸러와 흑백 무성 편집본 1967년 작. 현재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전시(2013년 1월 29일-6월 30일) 중. 백남준은 음악에 섹스행위를 집어넣었다. 왜냐하면 유럽의 이분법적 근대가치와 부르주아적 정형을 깨고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서다
 샬럿의 누드첼로연주. 저드 얄커트,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비디오 5분10초 걸러와 흑백 무성 편집본 1967년 작. 현재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전시(2013년 1월 29일-6월 30일) 중. 백남준은 음악에 섹스행위를 집어넣었다. 왜냐하면 유럽의 이분법적 근대가치와 부르주아적 정형을 깨고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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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도 소음도 포함되는 확장된 음악인가요?
"아무리 정적이라도 들리지 않는 소리의 전파가 있고, 아무리 침묵이라도 나의 호흡소리 있는 거잖아요. 침묵은 소음이고 소음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침묵음악이 된 거죠. 이런 음악철학은 결국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거죠. 백남준은 더 나아가 음악에 행위를 집어넣었어요. 이른바 행위음악인데 그 행위가 굉장히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게 특징이에요. 또 음악에 섹스를 도입해 샬럿 무어먼과 행위음악을 시도했고, 음악의 한계를 벗어나 전자음악을 전자비전(영상)으로 확장시키면서 장르개념을 넘어섰죠. 그렇게 해서 탈장르적 비디오를 창안했어요. 미술이라기보다 확장될 개념의 미술로 자연스럽게 옮겨진 거죠."

- 백남준의 비디오를 해프닝아트의 연장으로 보시는데.
"음악이라는 것, 미술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거기서 중복되어 만나는 제3의 영역 즉 '인터미디어(융합매체)'의 성격이 있죠. '플럭서스(백남준이 함께한 전위미술운동)'도 그렇지만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도 인터미디어에요. 백남준은 해프닝에서 비디오로 넘어갈 때 그 해프닝 자체가 인터미디어죠. 매체만 행위에서 TV나 전자비디오로 바뀐 거지 거기에 깔린 미학은 같아요.

제가 그런 차원에서 백남준의 비디오를 해프닝아트의 연장이라고 본 거예요. 1958년 백남준 편지에 해프닝을 작곡하면서 TV 3대를 포함시키고 오토바이소리, 7살 소녀의 울음소리 이런 생소리를 함께 채집한다고 나와 있어요. 1959년 '존 케이지 바치는 경의'에서 실제로 그가 채집한 녹음소리와 함께 무대 위에 수탉소리와 오토바이소리를 등장시켜 공연하죠. 백남준은 모든 게 다 음악의 소스가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2012년 백남준 아트센터 전시장에 걸린 사진을 찍은 것으로 백남준이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백남준 모습 백남준이 1960년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을 연주하다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모습. 사진: 클라우스 바리쉬(K. Barisch)
 2012년 백남준 아트센터 전시장에 걸린 사진을 찍은 것으로 백남준이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백남준 모습 백남준이 1960년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을 연주하다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모습. 사진: 클라우스 바리쉬(K. Bari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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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성상 파괴하는 문화테러리스트라는 별명도 있어요.
"모든 권위에 도전하는 거죠. 그러니까 피아노는 음악적 권위의 상징뿐만 아니라 엘리트 부르주아문화의 상징인데 그것에 대한 도전을 표현한 것이에요. 그래서 피아노를 부수고 바이올린을 내리쳤죠. 예술적 테러리스트인 백남준은 그런 맥락에서 존 케이지의 넥타이 잘랐고요. 이건 다 새로운 미술을 재창조하기 위한 파괴였죠."

- 63년 첫 전시에서 백남준은 왜 관객을 중시했나요?
"전시에서 '참여 TV'라고 TV에 자석을 붙여놓은 건데 TV의 내부회로 보여주는 영상을 관객이 좌석으로 전자파 조작과정으로 이미지 바뀌고 그 다음에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어 관객이 육성을 집어넣으면 파장이 변해요. 이건 관객이 전시에 참여해서 전시를 완성시킨다는 뜻이 담겨있죠. 비디오아트를 '참여 TV'라고 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보면 백남준의 키워드인 '참여와 소통'이 이해가 돼요."

총알처럼 이분법적 위계를 깨는 '랜덤액세스'

- 백남준 미학의 핵심이 되는 '랜덤액세스'가 뭔가요?
"백남준 작품은 기존의 전제주의나 획일주의가 가지고 있는 이분법을 해체시키는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어요. 동서의 이분법, 장르적 이분법, 남녀의 이분법, 자연과 문명의 이분법 등 모든 이분법을 깨는 게 바로 비선형 다시 말해 비디오가 TV의 일방적인 걸 쌍방적으로 바꾸는 방식이죠. 그렇게 이분법적인 위계를 총알처럼 깨는 데 최고 무기가 된 것이 바로 '랜덤액세스(Random Access 임의접속)'예요.

존 케이지가 말한 우연성 같은 방식이죠. 그래서 무목적적이고 비의도적이고 비결정적이고, 이게 바로 과거예술의 정형, 완성, 정통성, 하나뿐인 걸 깨는 거죠. 백남준만 아니라 플럭서스라든가. 새로운 걸 창안하는 그 이전의 아방가르드인 다다나 초현실주의도 시도한 것으로 기존의 위계를 깬다는 면에서 같죠. 백남준은 특히 자신만의 구체적 예술매체인 비디오아트, 액션뮤직을 통해서 그걸 추구한 거예요."

백남준의 '당통(Danton)'[오른쪽] 1989.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작품.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소장
 백남준의 '당통(Danton)'[오른쪽] 1989.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작품.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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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인들 비디오를 예술화 꿈도 못 꿨죠?
"이를 잘 설명한 게 이어령 선생의 탁월한 비유인데요, "비디오를 발명한 건 미국이고 이를 소형화(상업화)한 건 일본이고 이걸 예술화시킨 것이 백남준이다" 너무나 맞는 말이죠. 테크놀로지의 인간화를 통해 기술에 대해 새롭게 접근한 건데 사람이 기술의 노예가 아니라, 기술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1965년에 '로봇 K-456'을 만들고 사람이 배설을 하듯 길거리를 걷다가 리모콘을 작동하면 콩이 똥처럼 떨어지고 또 오페라도 부르고 정말 환상적인 작품이었죠. 이게 백남준 최초의 로봇이에요. 나중에 구형 카메라, TV, 전축을 가지고 만든 TV로봇조각의 원형이죠."

- 80년대 넘어가서 처음 백 선생을 어떻게 만나셨죠?
"79년 남편이 뉴욕 한국문화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다음해인 1980년 뉴욕에서 백남준을 처음 만났어요. 어떻게 인연이 되었냐면 당시 전위무용가 머스 커닝햄의 후원회장 바버라 툴 여사를 내가 외교단을 통해 가깝게 알고 지냈는데 툴 부부가 우리 부부를 아방가르드 명소인 키친아트센터에 초대한 거예요. 거기서 백남준이 바이올린과 전축 판을 깨고 부수고 하는 해프닝을 처음 봤고 조각난 걸 모아 거기에 사인을 해 달라는 것이 인연이 되었어요."

- 백남준을 통찰과 혜안을 갖춘 예술가로 보셨는데.
"백남준의 초기 비디오작품은 서양의 기술과 동양의 선(禪)사상을 합친 것인데 그런 방식이 아방가르드정신이죠. 아방가르드의 핵심어가 바로 통찰과 혜안(선견지명)이에요. 마르셀 뒤샹도 남이 못 본 걸 미리 보는 혜안을 가지고 현대미술을 탄생시켰잖아요. 세상을 바꾸는 아방가르드들은 항상 그 특징이 앞을 미리 내다보는 예술적 비저너리((Visionary)들이잖아요. 백남준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죠."

'백남준아트센터'에 '백남준 작업실'을 재현한 모습 그의 창작은 그야말로 랜덤액세스방식으로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게 보인다. 그는 발명가 같은 예술가였다
 '백남준아트센터'에 '백남준 작업실'을 재현한 모습 그의 창작은 그야말로 랜덤액세스방식으로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게 보인다. 그는 발명가 같은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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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은 전자산업이 미래에 성공할 거로 봤나요?
"전자산업의 성공을 미리 예견하지 않고 누가 비디오가 예술이 된다고 생각했겠어요. 그런 건 하루아침 되는 것이 아니에요. 백 선생이니까 가능했던 거죠. 그런 힘이 어디서 나왔냐면 백 선생은 항상 정보를 끼고 사는 사람이었어요. 전자산업이 미래에 성공할 거라는 통찰력은 정보의 힘에서 나온 거예요. 온 세계 신문을 다 보고 월가 주식을 다 알고 프랑스 치즈가 몇 가지인 것까지 삶과 관련된 디테일 정보를 꿰차고 있었죠. 건강이 좋은 때는 오전 내내 신문을 보면서 한국 신문까지. 내가 당시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등에 연재기사를 썼는데 그걸 다 읽으시고 그 기사에 직접 드로잉을 해서 저에게 보내줘 깜짝 놀랐죠. 제가 지금도 가보처럼 가지고 있지만 그런 식으로 온 세계 신문을 보면서 풍부한 정보를 소화했기에 선견지명이 나올 수 있었죠. 젊은 작가들도 성공하려면 정보가 많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 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방영됐는데 어떤 평가를 하시나요?
"60년대 백남준 선생은 TV와 비디오시대죠. 1963년 독일 첫 전시에서 TV아트가 등장하고 1965년 최초로 비디오아트가 비디오테이프로 시작됐죠. 휴대용 비디오카메라가 처음 나오자 그걸 사서 뉴욕을 방문한 바티칸 교황바오로 6세 찍고 그날 '카페 오 고고'에서 상영해 세계최초로 비디오테이프를 예술화한 거죠. 70년대가 비디오테이프로 영상작업을 하고 이걸 더 발전시켜 비디오설치, 비디오퍼포먼스, 비디오조각 등 다양하게 실험한 기간이라면, 80년대는 지금까지 해온 TV방송, 비디오, 행위예술까지 총망라하는 만든 게 바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죠. 그러니까 자신의 60년대TV, 비디오아트, 퍼포먼스 등 모든 것이 결합된 종결 판이에요. 이게 주는 메시지는 매체가 독재자의 도구가 아니라 전 세계 사방팔방과 소통을 이루는 도구임을 강조한 거죠. 또한 기술자와 예술가와 대중미학의 의미를 확실히 부각시켰어요."

84년 1월1일 백남준의 '위성오페라' 총진행을 보다

- 김 관장 부부가 그 중계 과정을 파리에서 보셨다고 들었어요.
"남편이 1983년 말 덴마크공보관으로 부임한 후라 우리 부부는 백 선생이 1984년 1월 1일 퐁피두센터 앞마당 중계차본부에서 교통정리 하듯 뉴욕, 파리, 독일에서 송출된 것을 진두지휘하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순식간에 편집해 동시다발적으로 내보내는 거죠. KBS도 돈을 내고 방영권을 따 한국에도 중계했죠. 남편이 이걸 연결하는데 한 사람이었죠. 정말 그런 놀라운 위성오페라를 보면서 감격했어요. 그게 전 세계에 방영됐는데 그야말로 꿈같았어요. 중계가 다 끝나고 남편이 공무원이라 돈은 없었지만 백남준 선생과 한국에서 오신 조수 등에게 저녁을 한턱냈죠."

- 그 해 백 선생 35년 만에 귀국해 '고등사기론'을 펼쳤는데요.
"그러니까 예술이라는 게 어떤 확립된 고정관념이 아니거든요. 진실에 한쪽 다른 면에는 그 진실 우습게 보는 관점이 있어야죠. 답이 하나가 아니잖아요. 사기란 뜻은 고의로 상대방에게 사실을 왜곡시켜 착오하게 하는 것인데 사실 미술은 바로 착각의 예술이에요. 평면에 화면을 깊이를 넣은 원급법이 그렇고, 솔거가 담징의 벽화에 그린 그림이 그렇고 그게 '눈속임'인데 그게 미술의 기본이에요.

비디오는 미술의 속성을 극대화한 영상예술로 한 가지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두루 다양하고 복합한 걸 다 담잖아요. 하나의 진리만 추구했던 것과 다른 패러다임이죠. 사람에게 예술적 방편을 통해서 어떤 착각과 환상을 심어주고 유희적인 놀이로 보여 사람들은 더 착각에 빠지죠. 예술은 그런 비전을 제시하는 것, 그래서 고등사기죠. 과학은 명증적인 것만 주장하지만 예술은 명증 이외에 여러 복합적 양면가치를 제시하잖아요."

타임지 커버에 실린 '정보초고속도로' 개념사진. 백남준은 이미 10년에 예언했다
 타임지 커버에 실린 '정보초고속도로' 개념사진. 백남준은 이미 10년에 예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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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백남준 '전자초고속도로' 개념을 제시했는데요?
"엘 고어 부대통령이 '정보초고속도로'를 이야기하기 10년 전에 이미 백남준은 '전자초고속도로'를 발상했죠. 그러니까 지구가 통신기술을 가지고 인터넷 같은 것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비전을 가졌던 거죠. 그래서 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창설될 때 백 선생의 역할이 컸죠. 그때 특별전으로 제가 '인포아트(InfoART)'을 맡게 됐고 그래서 그 제목이 '테크놀로지아트'도 '비디오아트'도 아니고 '인포아트'죠. 이건 결국 (하이)미디어아트를 말하는 것인데 나는 거기서 백남준 덕분에 처음으로 미디어아트가 뭐고, 큐레이터가 뭔지를 알게 된 셈이죠."

- '인포아트(Info ART)'가 미술사에서 어떻게 기록되나요?
"인포아트(Info Art 정보예술)는 지금은 멀티미디어 혹은 하이미디어아트라고 하죠. 전엔 '혼합매체(Mixed Media)'로 페인팅에 다른 것 넣는 것이지만, 지금은 전자기술이 들어간 '전자매체'라 그 차원이 다르죠. 정보, 소통, 컴퓨터기술이 다 합쳐진 그래서 멀티아트죠. 이걸 '인포아트(정보예술)'라고 명명했죠. 그 해 월간미술 주최로 백남준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나온 '비빔밥'이 바로 인터미디어예요. 그의 비디오아트에 춤, 공연, 영상, 사운드 등 별것이 다 들어 있잖아요. 그래서 비빔밥아트죠."

- 90년대 뇌졸중 극복하고 2000년 구겐하임 전에서 '레이저아트'를 선보였죠?
"그런데 백 선생은 레이저아트를 21세기에 한 게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발상을 했어요. 당시는 기술적인 뒷받침이 안 된 거죠. 그걸 집대성해서 작품화한 것이 2천년 뉴욕 구겐하임 전에서 선보인 레이저아트인 '야곱의 사다리'죠. 그래서 60년대를 '프리비디오(TV)시대', 70년대, 80년대, 90년대까지 '비디오시대', 2000년대를 '포스트 비디오시대'라고 하죠. 레이저아트와 홀로그램아트 등이 후기에 속해요."

2012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사진. 왼쪽 백남준에 <서울랩소디>가 보이는데 이런 국제미디어행사와 잘 어울린다
 2012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사진. 왼쪽 백남준에 <서울랩소디>가 보이는데 이런 국제미디어행사와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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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립미술관 소장품 '서울랩소디' 설명 좀 부탁해요. 대단한 하이테크라고 하던데.
"작품의 뒷부분 가보면 굉장히 복잡해요. '서울랩소디'는 매년 여기에서 '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를 하고 있는 것과도 연관이 있어요. 이 작품의 주제는 백남준 선생이 첨단의 하이테크로 가는 서울의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현상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주면서 서울의 미디어적 양상과 특징을 잘 반영한 작품이에요."

- 지난해 10월, 영국 '텔레그래프' 지가 '강남스타일 영감의 원천은 백남준'이라고 썼던데요.
"싸이가 생긴 것도 꼭 몽골 사람을 닮았지만 그 말춤이 기마민족의 어떤 상징성 가지고 있어요. 사실 '백남준문화재단'에서 지난 1월 29일 추모행사를 열 때 싸이 공연 연결하려고 했어요. 백남준의 기마사상, 몽골문화코드를 싸이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죠."

- 끝으로 백남준은 문화가 사회 안전벨트라고 했는데 우울증사회에서 앞서가는 미술관을 지향하는 서울시립미술관장으로 백남준의 비전에 동의하는 방안이 있는지요?
"서울시립미술관은 앞서가는 포스트뮤지움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그 골자는 대중과 소통하는 지역별 거점화, 공간별 특성화예요. '남서울미술관' 생활예술(Living art) 공예 디자인 전용관으로 하고 '서울시지정 인간문화재 초대'전을, 7월에 개관하는 '북서울미술관'은 주민참여 형 공공미술(Public Art)로 하게 되죠.

'서소문 본관'은 기획전시와 글로벌한 전시로 '한국대만교류전'이 있고 그리고 '고갱과 그 이후전' 한국일보와 본 미술관 공동기획으로 하고 고갱과 고갱의 주제를 다른 5-7명 현대작가 같이 전시해요. '북유럽공공건축과 디자인전'과 한불비교문화를 주제로 한국전통 '함'과 프랑스19세기 '트렁크' 등을 비교하는 '루이 뷔통전'도 있고요. 내년에는 '아프리카전'도 있어요. 난지창작센터는 로컬에서 글로벌로 바꿔요. 서울시립미술관은 소통과 참여의 정신을 최대로 중시한 백남준의 예술철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죠."

서울시립미술관 김홍희 관장은 누구인가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실에서 포즈를 취한 김홍희 관장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실에서 포즈를 취한 김홍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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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남편(천호선, 예술행정가)을 따라 뉴욕에 갔던 김 관장은 1980년 백남준을 만나 큰 감동을 받고 이화여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지 10년 만에 뉴욕 헌터칼리지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사를 공부한다. 이후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캐나다 몬트리올 콘코디어 대학에서 미술사학과 석사과정을, 다시 홍익대에서 서양미술사박사를 마쳤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의 '인포아트(InfoART)'를 비롯하여 2000년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셔너, 2006년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았다. 2006년부터 경기도 미술관장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시립미술관관장이다. 저서로는 <페미니즘과 비디오미술>(1998), <백남준과 그의 예술>(2002) <현대미술 담론과 현장:여성과 미술, 한국화단과 현대미술>(2003), <굿모닝 미스터 백>(2007) 등이 있다.

덧붙이는 글 | [관련전시_하나] 백남준아트센터 2013년 전반기 상설전 : <부드러운 교란_백남준을 말하다>(Gentle Disturbance-Talking Paik) 전시기간 : 2013년 1월 29일-6월 30일 장소 : 백남준아트센터 1층 참가작가 : 백남준, 저드 얄커트, 만프레드 레베, 샬럿 무어먼. 이 전시는 백남준과 맑스, 쇤베르크 그리고 성(Sexuality)이 주제. [관련전시_둘] 서울시립미술관 상설전 [New & Now_서울시립미술관 2012 신소장작품] 2013년 1월18일-3월17일 장소: 서울시립미술관 본관1층에서 백남준-보이스 사진 전시 중.



태그:#백남준, #보이스 추모굿, #존 케이지, #위성아트, #비디오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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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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