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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성사지 오르는 길
 창성사지 오르는 길
ⓒ 김홍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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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길을 걷다보면 지역의 다양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평소엔 그냥 지나쳐버릴 곳일지도 모르지만 조금만 더 생각하고 또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지역으로서도 값진 명품 길을 만들 수 있다.

광교산 '국사의 길'은 고려시대 두 명의 국사를 배출했던 광교산에 있는 창성사지(진각국사: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 보물 제14호)와 서봉사지(현오국사:현오국사탑비 보물 제9호)를 이어주는 길로 우리는 이 길을 '국사의 길' 또는 '깨달음의 길'이라 이름을 붙였다.

처음 산에 대한 매력을 일깨워줬던 광교산은 그 산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너무나 값진 것이었다. 광교산에는 다양한 생태계는 물론, 수원천 발원지에 대한 물길 탄생의 신비, 나라의 고난과 함께해온 민족의 성산이며, 잔잔한 숲 속에서 잠들어 있는 불교국가인 고려에 대해서도 새삼 우리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남달랐다.

또한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그러한 점들을 항상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기존 질서의 틀에서 벗어나 생각하면 항상 창조적인 콘텐츠가 발생하며 그러한 것이야 말로 지역을 변화시키고 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긍정적이고 무한의 잠재적인 에너지였다.

신비한 기운이 있는 창성사지 가는 길

지난 2일(토) 10시부터 수원시 상광교 버스종점에서 걷기를 시작했다. 무엇보다 새로운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항상 사람을 설레게 만든다. 이러한 길은 자신에게도 미지의 영역으로 새로운 것을 본다는 것은 곧 생각도 느낌도 새로움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신선함을 주기 때문이다.

광교산 '국사의 길'의 주요한 루트는 상광교 종점을 시작으로 창성사지터->종루봉(비로봉)->김준용장군전승비->양지재->서봉사지에 이르는 길로 자연의 깊은 모습과 정신적인 내면의 모습까지 갖춘 지역의 새로운 길이였다.

광교산 안내소에서 바로 창성사지 방향으로 향했다. 창성사지 가는 길은 등산객이 드물게 오르는 길로 무엇보다 이 길은 여름이 되면 깊은 숲을 만끽 할 수 있으며 곳곳에 큰 바위와 계곡은 정신수양을 하기에도 좋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전국의 산속에 있는 사찰을 찾아보면 이렇게 계곡의 물주기를 타고 오르는 곳에 절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창성사지와 서봉사지도 그러했다. 길을 걸으면 계곡 물주기를 왔다갔다 건너는 듯 했으며, 그 길은 꼭 한 단계 한 단계 계단을 오르듯 새로운 신성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줄곧 받게 된다.

특히 창성사지를 오르는 길에는 그러한 느낌을 많이 받는다. 가는 길마다 큰 절을 하는듯한 나무가 있는가 하면, 악귀가 오르는 것을 막는듯한 기괴한 나무의 모습들이 이 길이 보통길이 아님을 알게 해주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도 마지막 물길을 건너면 신기하게도 이러한 모습들은 자취를 감추고 평온함이 마음속에 밀려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영험함이 있는 창성사지 오르는 길의 바위들
 영험함이 있는 창성사지 오르는 길의 바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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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물길을 건너면 곳곳에 있는 영험함이 있는 계곡의 큰 바위들을 유난히 많이 만나게 된다. 당시 모습을 느끼고자 잠시 큰 바위위에 올라 풍경을 잠시 바라보노라면 불교국가인 고려시대 정신수양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그려진다. 계곡을 따라 잔잔히 들려오는 목탁의 소리는 계곡의 물소리와 더불어 그 내면의 깊이를 더하고, 곳곳에 묻어있는 그 숨결들은 수백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우리의 시선을 잔잔히 이끌어 주고 있었다.

불교는 알다시피 고려인의 정신적인 사상과 다양한 예술에 이르기 까지 고려인의 삶 깊은 곳까지 자리 잡고 있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정신적인 문화였으며, 지금도 그 피를 이어받은 현대인에 있어 우리의 생활이나 내면 깊은 곳에서도 불교문화의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창성사지에 있는 수령 250년쯤 보이는 소나무
 창성사지에 있는 수령 250년쯤 보이는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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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우리 민족에게는 종교분쟁과 같은 종교간의 다툼이 없는 이유도 이런 내면에서 흐르는 우리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고도의 정신문화가 흐르고 있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의 조상들은 도덕과 윤리로 수천년을 나라를 이루고 이어왔으며, 그 정신이야 말로 국가를 오랫동안 지탱하고 종교를 화합할 수 있는 우리 고유의 정신 문화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도 창성사지 길을 오르다 보면 곳곳에서 절터와 같은 평평한 흔적과 도자기나 기와의 조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수백년이 세월이 흘러도 그러한 흔적을 느낄 수 있는건 아마도 광교산의 자연은 이곳에 위대한 정신문화가 깃들여 있다는 걸 지금의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광교산 안내소에서 폭포농원 쪽 물길을 따라 걷기를 시작한지 30여분이 흐른 후 우리는 첫 번째 지점인 창성사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창성사지 절터
 창성사지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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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성사지를 가다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이기도 한 창성사지는 수원시 상광교동 산41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 면적으로는 1650㎡ 정도의 크기고 수풀이 우거진 그곳엔 장대석과, 기단석, 주초석 등을 지금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창성사지는 고려 말의 국사 화엄종사였던 명승인 진각국사(1305~1382)의 사리탑과 함께 건립된 대각원조탑비(보물 제14호)가 이곳에 있었으며 지금은 화홍문에서 삼일상고 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옮겨져 있다.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되고 1965년 창성사에서 화홍문 근처로 옮겨왔다.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1386)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었다.

창성사지를 오르는 내내 느꼈던 그 느낌들은 이곳에서 보물 제14호로 지정된 대각원조탑비를 볼 수 없었던 게 너무나 아쉬움을 남겼다. 좁은 나무 창살에 갇혀 왜 그곳으로 옮겨졌는지도 모르며 사람들의 관심에도 지나쳐버린 화홍문 위에 있는 대각원조탑비(보물 제14호)는 그렇게 사람들로 부터도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쉬움을 남기는 건 이곳을 오르며 느꼈던 그러한 감정들을 이어주는 그 곳에 우리의 정신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각원조탑비를 다시 이곳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물은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빛을 더 뽐낼 수 있으며 정조의 정신철학과 효 사상과 함께 대각원조탑비는 지역의 정식적인 버팀목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것이야 말로 지역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고 세상에 우리의 정신문화를 알릴 수 있는 좋은 콘텐츠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창성사지에서 종루봉으로 오르는 길에 있던 소나무
 창성사지에서 종루봉으로 오르는 길에 있던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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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불교국가인 고려에서는 고승을 왕사(왕의 스승)와 국사(국가의 스승)로 임명함으로써 그들의 신앙을 표현했다. 그리고 윤리와 도덕, 정신적인 철학의 가장 위에 있는 국사를 둠으로써 이러한 제도를 통해 대부분이 불교도였던 고려의 백성의지지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안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

국가의 스승이 있었던 창성사지는 예전에도 2~3번 정도 올랐던 곳이다. 그러나 이날은 더욱더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그 흔적을 찾아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래된 우물터들과 기아와 같은 조각들, 잔잔히 흐르는 공기의 흐름도 어느 한곳을 가리키는듯한 기운을 받았다.

그곳은 광교산의 줄기와 절터가 한눈에 보이는 용인 서봉사 방향의 좌측의 산기슭으로 그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소리와 위치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며, 그러한 느낌은 "바로 이곳에 진각국사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었다. 단정 짓지는 못한다. 그러나 모든 만물과 위치엔 그 기운이 있으며 그 기운은 공기의 흐름을 타고 이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창성사지를 올라 이곳에서 앉아 잠시 이런저런 생각과 느낌을 간직한 체 우리는 곧 수원시와 용인시의 경계를 넘어 용인 서봉사지로 향했다.

창성사지에서 서봉사지로 가는 길은 중간에 종루봉(비로봉)을 올라 양지재를 거쳐 계곡을 타고 내려가 한 시간 정도 걸어 내려가면 서봉사지에 도착할 수 있다.

종루봉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광교산 절경
 종루봉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광교산 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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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성사지와 서봉사지를 이은 이 길은 무엇보다 광교산의 절경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으며 계곡의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깊은 계곡의 길은 한 겨울에도 감탄사가 절로 나게 만들었다.

정신문화를 이루었던 우리의 조상들은 그러한 길을 걸으며 생각도 더욱 풍부해지고 어떠한 정신적인 깨달음도 있을 터였다. 광교산과 같은 아름다운 경치와 더불어 자연과 조화를 이룬 우리 조상들은 이러한 길을 걸음으로써 정신문화를 더욱 발전시켜왔는지도 모른다.

용인 서봉사지를 가다

창성사지에서 광교산을 넘어 걷기를 시작한지 한 시간의 시간이 흐른 후 우리는 곧 용인시 수지구 신본동에 위치한 서봉사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봉사지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사찰이자 조선 태종 때 천태종의 자복사(국가의 복을 비는 사찰)로 지정되었던 사찰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느낀 감정은 창성사지와는 사뭇 다른 세계가 보였다.

규모면에서나 또 지형으로서도 창성사지와 다른 서봉사지는 계곡의 물주기 또한 이곳의 옛 규모를 가늠할 정도로 큰 기운이 느껴졌으며 조선 태종 때 천태종은 이곳에서 국가의 복을 빌어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기도 했었다.

용인 서봉사지
 용인 서봉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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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곳을 둘러보며 여러 흔적들을 찾았고 그 규모면에서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 이곳에 앉아 당시의 시대로 올라가보기로 했다. 후백제(892~936)시대 시기는 6월에서 8월 사이 구름이 낮게 깔리는 해질녘에 왕건은 전투를 치르고 이곳에서 군사들과 함께 음식을 함께 먹으며 군사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잠시 광교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지다 광교산 뒤로 펼쳐지는 빛 오름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한줄기 빛 오름 현상을 보고 영험함이 있는 이 산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여겨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그는 산의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른다 하여 광교산(光敎山)이라 부르며 지명을 남긴다.

그러한 깨달음이 있었던 광교산엔 그 이후 두 명의 국사를 배출했던 것은 물론 8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불교의 성지를 이루며 지명은 10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어지게 된다.

서봉사지에서 내려오는 창건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이곳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 오는 쌀뜨물이 10리나 흘러내려와 왜적이 물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보불 제9호로 지정된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보불 제9호로 지정된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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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있는 보불 제9호로 지정된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는 고려 명종 15년(1185)에 세워진 탑으로 현오국사의 행적을 후대에 알리고자 만들어졌다. 이 비문엔 15세에 불일사에서 승려가 된 후 부석사의 주지를 거쳐 명종 8년(1178)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 때 왕은 크게 슬퍼하여 국사로 삼고 시호를 현오라 한 뒤 동림산 기슭에서 화장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을 방문한 등산객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듯 곳곳에 나무와 돌로 표시해 뒀으며 여러 탑이 있었던 자리엔 차곡차곡 정성스레 돌을 쌓아 이곳에서 현오국사를 기리고 있었다. 수원의 상광교 종점에서 시작된 국사의 길(깨달음의 길)은 창성사지를 거쳐 광교산을 넘어 이곳 서봉사지에서 마무리가 된다.

역사적으로도 지역에 의미가 있는,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첫 국사를 배출했던 사찰을 이어주는 길일지도 모를 광교산 '국사의 길'은, 문화 콘텐츠 발굴이 더욱 소중해지는 이때, 지역으로서도 소중하며 그 문화적 콘텐츠는 관광자원으로서도 무엇보다 값지며 도덕과 윤리로 나라를 이루었던 옛 선조들의 정신을 수원화성과 연계하여 발굴한다면 세계인에게 있어서도 우리의 정신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광교산은 고려시대만 해도 8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질정도로 영험했던 산으로  지금도 물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곳곳에 절터와 같은 흔적이 많이 남아있으며, 미학사지(절터약수터)와 창성사지는 물론 용인 서봉사지엔 지금도 우물터는 물론 탑신 기와의 조각 등이 곳곳에 널려져 있었다.

연간 650만이 찾는 광교산은 많은 사람들로 부터 사랑을 받는다
 연간 650만이 찾는 광교산은 많은 사람들로 부터 사랑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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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 길을 주목하는 이유는 연간 650만명이 찾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광교산에 이런 역사적인 문화와 정신문화를 더한다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으며 이러한 관광자원은 지역경제를 활성화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지역의 일자리 창출과 이미지에도 많은 보탬이 될 수 있다는데 있다.

또한 나아가 화홍문 옆에 있는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를 지금의 창성사지인 제자리로 옮기고 문화재보호구역 지정은 물론 나아가 사찰까지 복원된다면 전국적인 관광지는 물론, 경기도 지역의 정체성을 더욱 높이고 세계인에게 있어 우리의 정신문화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관광자원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보물은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조계종,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등 불교계의 여러 계파를 넘어 문화재청은 물론 지역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국가의 스승이 있었던 두 국사를 이으는 길에 우리 조상들로부터 전해지는 그러한 정신문화를 이어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를 제자리로 옮기고 문화재보호구역 지정은 물론 두 곳의 사찰복원과 함께 길을 이어줌으로써 다양한 콘텐츠를 발굴하고 남겨놔야 미래엔 더욱 값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것이야 말로 후대에도 소중한 걸 남겨줄 수 있고 우리의 정신문화를 세계인에게 알려줄 수 있는 지금시대의 우리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e수원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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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광교산, #국사의 길, #창성사지, #서봉사지, #깨달음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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