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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역사는 나아갈 바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벌써부터' MBC 경영진이 200여 명을 권고사직시킬 것이란 소문이 돌고 있다. 노조는 "강제 해고와 같은 말이다, 상당수 기자와 PD들의 대량해직이 우려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200여 명의 폭도를 동원하여 기자, PD, 아나운서 등 130여 명을 회사로부터 축출한 <동아일보> 역사가 떠오른다. 이어 <한겨레> 창간이 맞물린다.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이 대거 참여한 최초의 국민주 신문, 최초의 국민방송을 만들자는 누리꾼들이 <한겨레> 창간을 희망의 근거로 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는 이번 대선을 통해 주목을 받은 <오마이뉴스>의 오마이TV나 인터넷 팟캐스트 <뉴스타파> 등에 대한 후원 열기로도 이어지고 있다. 다음(Daum) 청원 게시판 '공정 보도를 위한 방송사 설립 청원 운동'에는 서명 시작 이틀여 만에 5만 명이 훨씬 넘게 참여했다.

확실히 역사는 묘한 힘을 갖고 있다. 모금 목표액이 50억 원이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한겨레>의 창간 모금액 역시 50억 원이었다. 최초의 국민주 신문이 창간된 것 또한 '대선 멘붕' 다음에 이뤄졌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거울'은 이것이다. <한겨레>는 어떻게 창간에 성공했을까.

오늘을 읽는 '텍스트', 최초의 국민주 신문 창간 과정

1987년 12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던 <한겨레> 창간 전면광고
 1987년 12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던 <한겨레> 창간 전면광고
ⓒ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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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국민주신문 '싹'이 나온 것은 1979년 11월 하순 성동구치소였다. 민주인권일지 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하고 있던 안종필 동아투위 위원장은 동료들에게 "새 시대가 오면 국민들이 골고루 출자해서 그들이 주인이 되는 신문사를 세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새 시대가 열린 것은 그로부터 7년이 훨씬 지난 뒤였다. 1987년 6월 항쟁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그 해 7월 어느 날, 옥살이에서 얻은 병마로 세상을 등진 안 위원장의 뜻을 이병주 동아투위 위원장이 이어 받는다. 정태기 조선투위 위원장, 리영희, 임재경(훗날 한겨레신문 부사장) 등과 함께 한 저녁자리였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온 국민이 한 주씩 갖는 국민 캠페인을 벌이는 거죠. 국민 모두가 주식을 사는 방식으로 창간에 참여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특정 자본에 종속될 일이 없어서 좋고, 명실상부한 국민 모두의 자유언론 의지를 담아낼 수 있어서 좋고!."

시작도 좋았다. 곧바로 전·현직 기자 196명이 새 신문 창간발기준비위원회를 발족한다. 위원장은 '해직기자의 대부' 언론인 송건호가 맡는다. 각자 호주머니를 털었다. 한 사람당 50만원, 그렇게 모인 1억원으로 서울 안국동에 창간 사무국을 연다.

신속 과감했던 실행력...'자주민보' 될 뻔한 사연

<한겨레> 초대 사장을 역임한 송건호 선생(2001년 타계)
 <한겨레> 초대 사장을 역임한 송건호 선생(2001년 타계)
ⓒ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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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신속했고 또한 과감했다. 9월 1일 창간을 공식 선언한다. 이어 23일에 새 신문 발의자 총회를 연다. 주식은 한 주에 5천원, 한 사람의 출자 상한선을 창간 모금액 50억원의 1%로 제한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땅 밖으로 솟아난 희망의 근거는 다른 이들의 가슴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했다. 함석헌, 문익환 목사,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원로 24명이 지지 성명을 발표한다.

제호 결정에는 학생들의 의견도 반영했다. 대학신문 기자 등 대학생들과 해직 기자들을 대상으로 자주민보, 민주신문, 독립신문, 한겨레신문 등 4개 제호를 놓고 '투표'한다. 결과는 한겨레신문 164표, 자주민보 118표. <한겨레>가 <자주민보>가 될 뻔한 사연이다.

창간 준비는 순항을 거듭했다. 10월 30일 서울 명동 YMCA 강당에서 창간 발기인대회가 열린다. 창간 발기인은 모두 3342명. 교수, 작가, 변호사, 종교인, 언론인 등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했다고 한다. 당시 발기인 대회 선언문은 현재 국민 방송에 대한 당위성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하다. 동시에 오늘의 MBC가 떠오른다.

"우리가 새 신문의 창간을 결심하게 된 것은 이 땅에 언론매체가 부족한 때문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우리 사회는 백만의 부수를 주장하는 여러 신문, 97%의 보급률을 자랑하는 텔레비전을 포함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방송망과 수십만 부를 넘는다는 월간지와 주간지 등 수많은 언론매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굳이 새 신문을 창간하고자 하는 것은 국민의 목소리와 민족의 양심을 대변하는 바르고 용기 있는 언론이 없기 때문입니다...(중략)

...오늘의 언론현실은 탄압의 결과라기보다는 많은 경우 자진 협조의 결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언론다운 언론의 부재는 오늘의 언론인들의 도덕적 차원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권력의 정책적 의도하에 언론기업이 구조적으로 예속 당해 이미 자주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한 둘 양심 있는 언론인이 남아있다 해서 언론이 제 기능을 되찾을 수는 없습니다."

20년 만에 실시된 직선 대통령 선거 패배 '멘붕'

20일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와의 '프리 허그'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 시민의 모습
 20일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와의 '프리 허그'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 시민의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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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일주일 후, <조선일보>에 특이한 전면 광고가 실린다. "온 국민이 만드는 새 신문 - 한겨레신문의 주인이 됩시다", 이에 대한 성원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각종 후원회가 결성됐고, 대학에서, 교회에서, 사찰에서, 거리에서 모인 돈이 한 달도 채 못 돼 10억 원에 육박했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후 뜻밖의 '암초'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대선이었다. 선거가 임박할수록 창간 모금 열기는 눈에 띄게 시들해졌다. 김영삼·김대중 두 사람 사이에서 송건호는 중립을 선언했고, 사람들의 관심은 '승부'에 집중됐다. 설상가상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싸운 결과가 전두환과 다를 바 없는 노태우를 합법적으로 당선시킨 꼴"이 나왔다. 대선 결과는 '참극', 그 자체였다.

정권 교체를 열망했던 이들이 절망의 나락에 빠져 있던 198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동아일보>에 실린 강렬한 문구가 희망의 불씨를 되살린다. 그 문장은 "정의는 천천히 올 수도 있는 것"이란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의 '힐링'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민주화는 한 판의 승부가 아닙니다! 허탈과 좌절을 떨쳐버리고 한겨레신문 창간에 힘을 모으십시오!"

단 두 달만에 모인 40억원, 마지막 고비는 '정권'

창간기금 50억원 모금 완료를 알리는 1988년 2월 25일자 <동아일보> 광고
 창간기금 50억원 모금 완료를 알리는 1988년 2월 25일자 <동아일보> 광고
ⓒ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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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결한 두 문장의 '울림'은 거대했다. 광고가 나간 이후 창간기금이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1988년 1월 2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전면광고를 보면 그 기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지난 1월 14일에는 하루 1억 4천만원의 출자를 기록하였으며, 1일 평균 7천만원의 출자금이 모이고 있습니다", 거칠 것이 없었다.

단 두 달만에 40억원에 육박하는 돈이 모인다. 대선 전 모인 돈 10억원을 더해, 마침내 2월 25일 창간기금 50억 원 마련에 성공한다. 당시 돈의 가치를 감안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돈이 모인 것이다. 패배로 시작됐지만, 그것은 분명 승리의 시작이었다.

물론 마지막 고비는 남아있었다. 노태우 정권이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윤전기가 생산되지 않는 상황에서 윤전기는 허가받은 신문사만이 수입할 수 있다고 했다. 낡은 윤전기를 국내에서 간신히 마련하자 이번에는 신문사 등록필증 교부를 차일피일 미뤘다. 시행령 미비를 이유로 혹은 현장 시설 확인 등을 내세워 등록증 교부를 질질 끌었다고 한다.

이에 <한겨레> 사람들은 머리띠를 두르고 광화문 네거리와 명동으로 달려나갔다. 결국 노태우 정권이 발동한 것은 '꼼수'였다. 4.26 총선을 하루 앞둔 1988년 4월 25일, 마침내 <한겨레>는 등록필증을 교부받는데 성공한다. 물론 당시 정권이 '머리띠'의 힘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모금에 참여한 사람만 2만7223명, 그 '힘'을 누를 명분이 정권에는 없었다. 그 해 5월 15일, 한국 언론사는 물론 세계 언론사에도 유례가 없는 국민주 신문은 그렇게 탄생했다.

송건호 "운동권 논리를 대변하는 신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동아투위의 30년 발자취를 정리한 <자유언론>은 창간 성공 비결의 하나로 "정치적 격변과 민심의 흐름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신속 과감하게 한겨레신문이란 조직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자본으로 연결시킨 판단력과 실행력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 못지 않게 송건호의 '원칙'은 지금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한겨레가 몇몇 해직기자들의 전리품처럼 인식되어서는 곤란하다"며 "한겨레가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결과물인 것은 분명하나, 그 결과물은 운동권이나 해직기자들의 몫이 아니라 국민들의 몫"이란 점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언제 어떤 상황이든 송건호에게 변하지 않는 원칙은 언론은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겨레신문은 1987년 민주화투쟁으로 탄생할 수 있었고, 모든 국민과 민주화진영의 소원대로 언론의 정도를 걸어야겠지만, 그렇다고 운동권의 논리를 대변하는 신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송건호의 생각이었다." (2008 송건호 평전 '나는 역사의 길을 걷고 싶다')

이번 대선 결과는 정권 교체를 열망했던 이들에게는 확실히 '멘탈 붕괴'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허나 지금의 '멘붕'은 20년 만에 실시된 1987년 직선 대통령 선거 패배 당시의 그것보다 훨씬 위력이 약한 것임에 분명하다. 게다가 '전면광고' 못지 않은 집단 지성이 이미 꿈틀거리고 있다. 역사에 '멘붕'은 없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야말로 '패배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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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올레' 그리워, 오는 24일 '힐링올레'해요

덧붙이는 글 | 인용 또는 참고자료

2000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
2002 정연주의 워싱턴 비망록1 <서울-워싱턴-평양>
2005 동아투위 30년 발자취 <자유언론>
2008 송건호 평전 <나는 역사의 길을 걷고 싶다>



태그:#국민방송, #한겨레, #MBC, #뉴스타파, #나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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