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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소록>에서 소개하고 있는 매화의 종류를 보면 강매 고매, 홍매 등 그 종류가 아주 많습니다.
 <양화소록>에서 소개하고 있는 매화의 종류를 보면 강매 고매, 홍매 등 그 종류가 아주 많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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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포자락 펄럭이고 '에헴~'거리며 큰소리나 치며 살았을 선비가 농사에 대해 뭘 안다고? 빈정대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립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하루 종일 땀 뻘뻘 흘리며 일을 해야만 하는 농사꾼 마음, 허리가 휘도록 지게질을 해야만 겨우 살아갈 수 있었던 산지기의 눈높이로 읽으면 울화가 치솟을 수도 있을 겁니다.

지배계급으로 군림하던 기득권자인 선비양반들이 즐기던 풍류, 있는 자들의 벌이던 사치의 한 자락쯤으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내용이 어떠하든 간에 소작농이나 핍박받는 민중의 마음으로 읽으면 서걱거리는 마음이 생길 법도 합니다. 내용이 방탕하거나 화려해서가 아닙니다.

농사를 근본으로 하던 조선시대에 농부가 아닌 선비가 노송과 만년송, 매·란·국·죽을 포함한 여타의 꽃과 나무들을 즐기듯이 기르고, 노닐듯이 관찰하며 기록한 글쯤으로 생각되면 마음이 서걱거릴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원예서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원예서 <양화소록> 표지 사진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원예서 <양화소록> 표지 사진
ⓒ 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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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안 지음, 서윤희·이경록 옮김, 김태정 사진·감수, 눌와 출판의 <양화소록>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인 강희안이 17종의 꽃과 나무, 괴석의 특성 및 재배법을 상세하게 기록한 원예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문 원예서입니다.

강희안은 조선 초기, 중추원의 종이품 벼슬인 중추원부사를 지냈으며, 훈민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붙이고,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분이기도 한 문신으로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 당대의 삼절(三絶)로 이름이 높았으나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 <양화소록(養花小錄)>, 동생인 강희맹이 편집한 가문의 문집 <진산세고(晉山世稿)>에 실린 <양화소록(養花小錄)>만이 전해질 뿐 따로 전해지는 그림이나 문집은 없다고 합니다. 

반항하는 마음으로 보면 있는 자, 꽃과 나무 그리고 괴석을 좋아하는 시대적 기득권자가 남긴 풍류에 더해진 일상의 글에 불과하지만 시대를 긍정하는 시선으로 읽으면 선비의 마음이 녹아든 기록이자 원예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화초들을 보니 습기를 좋아하는 성질과 건조함을 좋아하는 성질이 있고, 차가움을 좋아하는 성질과 따뜻함을 좋아하는 성질이 있었다. 그래서 심고 물을 주고 햇볕을 쪼일 때 한결같이 옛날 방법대로 하였고, 옛 법에 없는 것은 전해 들은 것을 참고하였다. 날씨가 추워져 얼음이 얼거나 눈이 내릴 때는 추위에 약한 화초를 골아서 온실土宇에 넣어 동상을 입지 않게 하였다. - <양화소록> 22쪽

대부분의 꽃은 1년에 두 번 피지 못한다. 그런데 사계화만은 사계절에 걸쳐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꽃을 피우려는 뜻을 잠시도 쉬지 않으니, 성덕聖德의 한없이 진실하고 순수함에 비할 만하다. 오행으로 말하자면 토土가 사시四時에 걸쳐 왕성한 것과 같다. 꽃 키우는 법을 배우려는 사람은 먼저 사계화를 길러야 하는데, 이 꽃이 바로 모든 꽃의 기준指南이 되기 때문이다. - <양화소록> 85쪽

강희안이 <양화소록>으로 기록하고자 했던 것은 꽃과 나무를 제대로, 보다 잘 기를 수 있는 재배법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강희안이 <양화소록>에 담고자 했던 내용은 단순한 원예기술이나 요령이 아니라 자연계의 섭리(攝理),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리와 조화를 꽃과 나무에 빗대어 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걸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양화소록>의 저자인 강희안이 기암 절벽 위에서 자라고 있는 저 소나무를 봤다면 뭐라고 기록했을지가 궁금해집니다.
 <양화소록>의 저자인 강희안이 기암 절벽 위에서 자라고 있는 저 소나무를 봤다면 뭐라고 기록했을지가 궁금해집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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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에 순응하고, 여건과 조화를 이룰 때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 식물들을 관리하는 원예기술을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법도, 치세와 수신의 지혜를 슬쩍슬쩍 비추는 걸 보게 됩니다.  

<양화소록>이 처음으로 소개되는 책은 아닙니다. <양화소록>를 출간한 '눌와'에서도 10년 전에 이미 서윤희·이경록 옮김으로 <양화소록>을 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눌와에서 10년 전에 펴낸 초판 <양화소록>이 초벌구이를 한 도자였다면 이번에 개정판으로 출간한 <양화소록>은 두벌구이와 채색구이까지 마쳐 푸른빛이 도는 청자에 견줘도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17종의 꽃과 나무, 기르고 꽃 피우고 관리하는 법 상세히 기록

내용에 있는 17종의 꽃과 나무, 괴석을 보여주는 사진은 청잣빛만큼이나 은은하고도 또렷합니다. 170여 개의 항목으로 달린 각주는 원문을 읽고 이해하는 데 필요한 돋보기이자 백과사전 같은 내용입니다. 별도의 지면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 꽃과 나무와 관련한 내용은 현대적이며 실용적인 정보입니다. 원산지, 꽃이 피는 시기, 성장 상태, 재배법 등은 물론 내용 속의 화초들을 만날 수 있는 방법까지 세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강희안이 <양화소록>에 심은 이런 의미와 저런 내용이 무럭무럭 싹트고 풍성하게 열매 맺기를 학수고대하는 마음으로 활짝 핀 난꽃에 눈길을 실어봅니다.
 강희안이 <양화소록>에 심은 이런 의미와 저런 내용이 무럭무럭 싹트고 풍성하게 열매 맺기를 학수고대하는 마음으로 활짝 핀 난꽃에 눈길을 실어봅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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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훼를 재배하는 것은 키우는 사람의 심지를 굳게 하고 덕성을 기르기 위함일 뿐이다. 운치와 지조가 없는 것은 절대로 감상해서는 안 되며, 울타리 주위나 담 아래 적당한 곳에 재배하되 가까이할 필요는 없다. 지조 없는 화훼를 가까이한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지조 있는 선비와 비루한 사내가 한 방에 같이 있는 것과 같아서 풍격이 금방 떨어진다. - <양화소록> 123쪽

<양화소록>이 갖는 의미는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라는 역사적 가치뿐만이 아니라 크게는 자연의 섭리, 작게는 인간이 살아가는 질서와 도리, 처세와 풍류를 담고 있기에 흐르는 세월을 반추해가며 또 다른 의미로 재현(재판)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선인이 남긴 풍류에조차 시비를 걸고 싶고, 선비가 소소하게 읊은 양화(養花)의 글에조차 등골 휜 농부의 마음이 어른 댈 만큼 야박해진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600여 년 전, 강희안이 <양화소록>에 심은 이런 의미와 저런 내용이 무럭무럭 싹트고 풍성하게 열매 맺기를 학수고대하는 마음으로 활짝 핀 난꽃에 눈길을 실어봅니다.

덧붙이는 글 | <양화소록>┃지은이 강희안┃옮긴이 서윤희·이경록┃사진·감수 김태정┃ 펴낸곳 눌와┃2012.11.20┃값 1만 6천원



양화소록

강희안 지음, 이병훈 옮김, 을유문화사(2000)


태그:#양화소록, #강희안, #눌와, #원예서, #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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