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민생상담네트워크 새벽'은 저소득·소외계층의 민생복지문제를 상담하는 활동가들의 네트워크입니다. 주요상담내용은 기초법 등 복지상담, 개인파산면책 및 회생상담, 주민생활경제컨설팅, 생활법률상담입니다. 현재 가계부채가 1100조 원에 이르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가 금융자본의 약탈적 대출 피해자인 과중채무자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상기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연재기사를 씁니다. <기자 말>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빚진 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2011년 1월 초, 지자체 주민복지 사례관리담당자가 내담자(한길수-가명)을  모시고 "민생상담네트워크새벽"(이하 '새벽')을 찾아왔다. 한길수씨는 50대 초반 나이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병색이 완연했다. 그는 여러 가지 궤양과 관절염, 그리고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했다. 거기에다가 2005년경부터는 희귀난치성질환인 '베체트'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이렇게 한길수씨는 여러 가지 질환을 앓으며 수급자로 살아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싸락눈 쌓이듯이 늘어나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카드빚으로 인해 혹독한 채권추심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와 문자, 법적조치 운운하는 빨간색 줄이 그어진 독촉들이 날아든다고 했다. 심하게는 한밤중에 전화가 걸려와 조롱과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고 한다.

한길수씨는 여러 가지 질환으로 노동능력을 상실한 채 수급자로 살아가면서, 극심한 빚 독촉에 시달리는 자신의 삶이 죽음보다 낫지 못하다고 한탄했다. 그러면서 한길수씨는 오래전부터 개인파산면책을 생각해 보았지만 비용을 마련 할 수 없어서 포기했다고 한다. 그 후, 한길수씨는 지자체 복지사례관리사로부터 새벽의 활동소식을 듣게 되었고, 새벽상담실 문을 두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마침내, 새벽상담활동가와 마주한 한길수씨는 큰 눈을 껌벅이며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빚진 죄인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의 상담 단체들이 함께 참여하는 '찾아가는 민생복지상담'(자료사진)
 지역의 상담 단체들이 함께 참여하는 '찾아가는 민생복지상담'(자료사진)
ⓒ 김철호

관련사진보기


한길수씨는 가난한 농가의 여러 형제 중 맏이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하는 것으로 모든 배움을 마쳤다. 그 후, 한길수씨는 나이가 차서 군에 입대했고, 군에서 운전을 배워 제대를 했다. 제대 후에는 대도시인 대전으로 나와 택시운전면허를 취득하고 택시운전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1989년경 동료의 소개로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고, 딸 둘을 자녀로 두었다. 그 무렵 한길수씨는 가난하지만 아무런 빚도 없이 참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길수씨의 행복한 가정은 한순간에 깨져버리고 말았다. 1998년 가을 무렵, 한길수씨가 택시운전 중에 큰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비바람이 거센 던 날, 한길수씨는 가로등이며 신호등마저 모두 꺼져 있는 사거리를 조심스럽게 좌회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맞은편에서 승용차가 달려들어 한길수씨 택시 가운데를 들이 받았다. 그 사고로 한길수씨는 생명이 위태로울 만큼 중상을 입었다. 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은 이후에도 출혈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한길수씨는 3년여 동안 병원신세를 져야만 했다. 더구나 경찰의 사고조사가 쌍방과실로 결론나면서, 한길수씨는 아무런 보상도 없이 병원비만 겨우 보험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이 사고로 한길수씨 가족은 극심한 생활고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한길수씨의 아내는 남편의 병원수발과 극심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갔다. 한길수씨는 투병중인 자신과 아이들마저 버려둔 채 집을 나가버린 아내가 한없이 원망스러웠지만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한길수씨는 아이들의 거처를 시골친척 집으로 옮기고 전학을 시켰다. 그런데 몇 달 후, 아내가 나타나 아무도 모르게 아이들을 데리고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 바람에  한길수씨는 가족과의 모든 관계가 단절되고 말았다. 한길수씨는 그러한 아내에 대한 원망과 미움으로 인해 마음의 병마저 얻게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한길수씨는 몸도 마음도 병든 상태로 2001년 가을 무렵 병원에서 퇴원을 했다. 이후, 한길수씨는 스스로 몸과 마음의 병을 추스를 수 없는 상황에서 여기저기 시골친척집을 전전하며 요양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던 2002년 여름 무렵, 아내로부터 이혼을 요청하는 전화를 받게 되었고, 모든 삶의 의욕을 상실한 한길수씨는 아내의 요청에 따라 합의이혼을 했다. 

무분별한 신용카드 확대정책은 채무노예를 낚는 함정

한길수씨는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후 지자체의 공공근로사업에 참여해서 생계를 꾸렸다. 그러는 중에 한길수씨는 새로운 배우자를 만났다. 새로운 배우자는 전남편의 사업실패와 과중한 채무, 그로 인한 전남편의 성격파탄과 폭력에 시달리시다 못해 이혼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아내도 우울증과 공황증 등 정신질환에 시달려 왔다고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삶의 상처를 끌어안고 서로 위로하며 함께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한길수씨는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서 할부로 1톤 차를 구입한 후, 용달업으로 생계를 꾸렸다. 한길수씨는 넉넉하지는 않지만 다시 새롭게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한길수씨의 새로운 삶도 얼마가지 않아 암초를 만나게 되었다. 그 무렵에는 길거리 어디에든 신용카드발급 영업사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아무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신용카드발급 영업활동을 했다. 그러다보니 남녀노소 가릴 것이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묻지마 영업활동에 걸려 불필요한 신용카드를 발급받게 되었다. 한길수씨도 길거리에서 늘 만나는 카드발급영업사원을 통하여 여러 개의 신용카드를 발급받았다.

처음에, 한길수씨는 신용카드로 기름을 넣거나 생필품을 구입하는 등 별 문제없이 신용카드를 사용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아내의 정신질환이 심각해졌다. 한길수씨는 아내를 돌보느라 제대로 용달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신용카드사용이 잦아졌고, 덩달아 신용카드대금도 늘어났다. 그러다가 2004년경에 이르러는 아내가 심각한 정신발작을 일으키게 되었고,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게 되었다. 그런데다가 2005년경에는 한길수씨 본인마저도 '베체트'라는 희귀난치성질환을 앓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길수씨는 자신의 병치레와 아내의 병구완을 하느라 아예 용달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한길수씨는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를 지게 되었고, 속절없이 신용불량자신세가 되고 말았다.

한길수씨는 빗발치는 빚 독촉에 시달리면서 절망스러운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러면서 한길수씨는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과 아내 둘 다 죽겠구나 싶었다. 한길수씨는 그나마 자신에게 노동능력이 있다고 우기며 한길수씨 부부를 수급자로 지정해주지 않는 지자체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래서 한길수씨는 지자체의 수급자조건을 맞추기 위해 아내와 두 번째 이혼을 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아내 홀로 수급자로 지정될 수 있었고, 아내만이라도 제대로 된 병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파산면책․회생제도를 채무자에 대한 도덕적 징벌로 오용

법원의 개인파산면책제도 운용보수화 규탄집회(자료사진)
 법원의 개인파산면책제도 운용보수화 규탄집회(자료사진)
ⓒ 금융채무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연석회의

관련사진보기


그 이후 2010년 겨울 무렵, 한길수씨 본인도 여러 질환이 깊어지고 베체트질환증상이 악화되면서 수급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와 병 치료에 대한 여유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끝도 없이, 사정도 없이 몰아치는 빚 독촉은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러는 중에 한길수씨는 지자체의 사례관리사를 만나 본격적인 돌봄을 받게 되었고, 개인파산면책신청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길수씨는 개인파산면책을 신청한 이후 귀찮을 정도로 새벽상담실에 결과를 문의해왔다. 한길수씨는 파산면책이 되어 채무노예의 덫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금방이라도 자신의 병세 호전 될 것이라고 스스로 믿는 것 같았다. 하지만 법원은 한길수씨의 파산면책심리를 더할 수 없이 더디게 진행했다. 신청 후 1년이 넘어서야 가까스로 파산이 결정되었고, 앞으로도 면책까지의 기간을 예측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사실, 2007년여까지만 해도 빠르면 6-7개월, 늦어도 1년 안에 파산면책결정이 났었다. 그러나 그 이후 법원의 개인파산면책심리가 한없이 늘어지기 시작했고, 까다로워졌다. 그러면서 개인파산면책결정기간이 길게는 1년6개월까지 걸리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인지.약탈적 대출에 골몰하는 채권자를 옹호하느라 막다른 절망의 벽에서 통곡하는 채무자에게 도덕적 징벌을 가하는 것인지.법원의 개인파산면책제도 운용행태를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한길수씨의 문의 전화가 뜸해졌다. 그러다가 아예 소식마저 끊겼다. 그리고 마침내, 한길수씨의 파산면책결정이 났다. 새벽상담실에서는 한시라라도 빨리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길수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한길수씨의 핸드폰은 불통이었다. 할 수없이 새벽상담실에서는 한길수씨 드폰에 문자를 날렸다. 그리고 2주 도가 지나서 한길수씨의 지인으로부터 "한길수씨가 한 달 전쯤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이 왔다. 그토록이나, 채무노예의 늪에서 벗어나 "단 하루만이라도 빚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 했던 고인의 명복을 빈다.


태그:#민생상담네트워크새벽, #개인파산면책 무료상담, #김철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1세기 우리사회의 화두는 양극화와 불평등이다. 양극화와 불평등 내용도 다양하고 복잡하며 중층적이다. 필자는 희년빚탕감 상담활동가로서 '생명,공동체,섬김,나눔의 이야기들'을 찾아서 소개하는 글쓰기를 하려고 한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