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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 들목인 베시사하르로 향하는 로컬버스. 순박한 미소들과 둘러앉아 봄빛 사이를 달린다. 두려움은 그렇게 희미해지리라.
 트레킹 들목인 베시사하르로 향하는 로컬버스. 순박한 미소들과 둘러앉아 봄빛 사이를 달린다. 두려움은 그렇게 희미해지리라.
ⓒ 장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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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폐가 다 아프게 달렸다. 정류장에 도착하니 8시하고도 18분이다. 짐작대로 정시를 잊은 네팔의 버스는 떠나기 한참 전. 시간을 잊은 이곳의 시간이 마냥 어이없거나 짜증나는 것도 아니다. 저 아쉬울 때는 이렇게 요행에 기대는 법.

오늘은 기필코 안나푸르나에 안기리라. 아니, 산세 위로 일렁이는 구름 그림자에라도 닿아보리라. 금세 출발할 기세로 입구를 노려보는 버스대열을 보며 나 또한 기운과 의욕을 냈다. 제 덩치만한 배낭을 짊어진 무리로 정류장은 인산인해였다. 버스 지붕 위로 한 짐의 배낭을 실어 올리고 승차표에 적힌 좌석번호를 찾아 앉았다. 그 순간 떠올랐다. 옥상 빨랫줄에 널어 두고 온 양말 두 켤레.

"가방 가볍게 만들려고 칫솔 부러뜨리는 사람도 있어"

드디어 안나푸르나다. 숙원의 히말라야에 안긴다는 기대로 간밤에는 잠도 오지 않았다. 트레킹을 마치고 하산하여 한인식당에서 거나하게 회포를 풀던 이들 틈에 끼어 두런두런 여행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 강원도 원주가 집이라던 내 또래 젊은 신혼부부는 두 사람 모두 직장을 나와 세계여행길에 올랐다고 했다. 방콕을 거쳐 이곳까지 왔고, 다음 주면 인도 바라나시로 내려갈 계획이랬다. 토롱 라 정상(5416m)에 올랐다는 감격에 서로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는 말을 하는데 여자는 또 눈가가 빨개진다. 그러고는 쑥스러운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비장의 그것은 바로 정수용 알약. 스무 알 정도 남았으니 요긴하게 쓰라며 다음 주자인 내게 바통처럼 건넨다.

그들은 떠나면서 무엇을 싸고 버려야 할지를 나보다 더 진지하게 고민해줬다. 배낭을 1그램이라도 더 가볍게 만들 요량에 칫솔 손잡이까지 부러뜨리는 사람도 봤다면서. 웃고 떠들면서 이 산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네팔의 전원도시 포카라. 안나푸르나 트레커들의 전초기지와도 같은 곳이다.
 네팔의 전원도시 포카라. 안나푸르나 트레커들의 전초기지와도 같은 곳이다.
ⓒ 장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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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카트만두에서 북서쪽으로 20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포카라는 사방이 안나푸르나 산군으로 둘러싸인 네팔의 전원도시다. 안나푸르나 연봉들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면서 종주하는 라운드 트레킹과 이 산의 폐부로 들어가는 베이스캠프 트레킹 모두 포카라가 기점이니 트레커들에게는 오랜 전초기지와 같은 곳.

포카라에 도착한 첫 날, 석양에 물들어 신기루 같이 말갛던 히말라야 설산을 바라보며 버스 한구석에서 소리 죽여 눈물을 삼킨 기억이 났다. 떠나기 전, 하루에도 수천 번 일상을 정지시켰던 얼굴이었다. 그 길로 해가 지기까지 자전거를 빌려 타고 정신 없이 도시 곳곳을 내달렸다. 아무리 달아나고 멀어져도 히말라야는 끝까지 나를 따라왔다. 눈을 감고 다시 떠도 그곳이 보였다.

시원하게 뻗은 마르상디 강줄기와 함께 출발하는 트레킹 첫째 날. 입구 허가사무소에서 신분검사를 요구했다. 사무소라는 장소도 그렇고, 절차과정도 모두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만 네팔에서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이라 표정만큼은 신중했다. 갱지를 실로 곰살맞게 엮어 만든 공책에는 지금까지 이곳을 통과한 트레커들의 이름과 여권번호, 성별 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나 또한 포카라의 한 여행사를 방문해 직접 만든 퍼밋증(permit)을 여권과 함께 제시했다. 그리고 그들이 작업하는 동안 사무실 바닥에 지도를 넓게 펴고 오늘의 목적지를 정했다. 도착하기로 작정한 곳 사이사이에도 사람 사는 마을들이 더러 있으니 미처 다 가지 못해도 어디든 머물면 될 것이다. 아스팔트길로 해발 850미터 지점까지 지프가 다닌다는 정보쯤은 일전에 접수해뒀지만 차를 타고 산에 오른다는 것은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는 이들이 있기에 어느 순간도 혼자일 수 없는 산. 대부분 저마다의 짐을 공정히 짊어지고 가는 씩씩한 여행자들이었다. 걸어가는 모양새를 보니 걷기에는 나름의 도가 튼 베테랑들임이 틀림없다.

마르상디 강의 하류. 옥빛의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며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을 시작한다.
 마르상디 강의 하류. 옥빛의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며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을 시작한다.
ⓒ 장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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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시사하르를 지나 두 번째 마을인 쿠디로 향한다. 원색의 하늘과 구름만 바라보며 걷는 자유.
 베시사하르를 지나 두 번째 마을인 쿠디로 향한다. 원색의 하늘과 구름만 바라보며 걷는 자유.
ⓒ 장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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삯을 받고 짐을 대신 져 주는 포터와 동행할 것인지를 두고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출발하는 날까지 고민이 많았다. 나의 짧은 여정이 현지인들의 고단한 생활에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탓이었다. 굳이 공정여행이 아니더라도 오래 전부터 의미있는 실천으로 관계 맺는 여행을 꿈꿨다. 그럼에도 홀연히 길을 나선 것은 더 큰 가능성 때문이었다. 나라는 사람, 앞으로 내가 접속할 무한한 세계에 대한 믿음 때문에.

과연 나는 나 자신과 타인, 이 세계를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그리고 날마다 치러야 할 또 하나의 과제, 바로 무엇을 추리고 버려야 하는지를 스스로 가늠하는 일 때문이었다. 배낭을 싸고 푸는 동안 내 몸과 마음에 새겨질 감각은 어떤 것일까. 자신에게 필요한 삶의 부피를 직접 헤아리며 그 질량을 응당 스스로 견뎌내며 걷는 일은 얼마나 우주적인가. 이 모든 일들을 하나둘 적어 내려가기 시작하니 전에 없던 용기가 났다. 비록 초행이지만 용감하게 내 힘으로 걸어보고 싶었다. 도무지 다른 누군가에게 내 배낭을 덜컥 짐 지울 수 없었다.

내 오랜 꿈이었던 안나푸르나에서 만난 '여성 포터'

베시사하르(820m)를 벗어나 쿠디(790m)와 불불레(840m)를 지나기까지도 일행을 찾지 못했다. 때는 4월 중순, 트레킹 시즌이 아닌 이유가 컸다. 해는 절반이나 기울었고 마르상디 강줄기는 어느새 길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봄의 흔적을 따라 활기차게 나섰던 것과 달리 이내 석양이 졌고, 사위는 적막해졌다. 짐작보다 빨리 외로워졌다. 내가 선택한 고요였지만 아직은 그런 것들이 익숙하지 않았다. 잔잔하면서, 때로는 떠들썩한 소란이 그리웠다. 쫓기듯 다리를 재게 놀렸다. 사념을 아끼고 말을 줄이며 부지런히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니 버스에서 눈 인사를 나눴던 이들 몇이 보이기 시작했다. 캐나다에서 온 54세의 쌍둥이 자매, 그리고 그녀들이 고용한 네팔 현지포터 '마야'였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허가사무소. 트레커들의 여권과 비자, 퍼밋을 검사한다. 마을 곳곳에 사무소가 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허가사무소. 트레커들의 여권과 비자, 퍼밋을 검사한다. 마을 곳곳에 사무소가 있다.
ⓒ 장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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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는 우리나라의 어느 공정여행 책에서도 소개된 '쓰리 시스터즈' 소속의 여성포터였다. 쓰리 시스터즈 역시 크게는 트레킹 전문 에이전시로 분류할 수 있지만 이윤추구를 넘어 네팔여성들이 노동을 통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에 그 힘은 현지에서도 고무적이었고, 이 단체에 대한 관심은 세계에서도 대단했다. 나는 그녀를 만난 것이 진심으로 반가웠다. 포터의 삶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스물일곱의 동갑내기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일찍이 결혼을 해 아이도 둘이나 있었고 지금은 식구들과 에베레스트 산군 부근에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날랜 보폭에 나의 걸음을 간신히 끼워 맞추며 평소 안고 있던 물음들을 마치 성스러운 의식처럼 해 나갔다. 여자로서 이 일이 고되거나 힘들지는 않은지, 하루 고용치는 얼마고 여성 포터가 되려면 어떤 훈련과정을 거치는지, 일은 어떻게 들어오고 이후 게스트와 따로 접촉할 수 있는지, 트레킹 시즌이 아닐 때는 어디에서 머물며 어떻게 먹고 사는지, 트레킹 중에는 어떻게 끼니를 해결하고 잠은 어디서 자는지, 얼마나 많은 네팔의 여성들이 당신처럼 포터가 되기를 꿈꾸는지, 그리고 포터가 되면서 네 삶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말이다. 육성으로 듣는 그녀의 이야기는 더없이 흥미로웠지만 못내 안타까운 구석도 많았다.

히말라야의 여성포터 마야. 결혼해 아이도 둘이나 되는 스물일곱의 그녀는 트레커들의 짐을 대신 져 주며 네팔에서의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히말라야의 여성포터 마야. 결혼해 아이도 둘이나 되는 스물일곱의 그녀는 트레커들의 짐을 대신 져 주며 네팔에서의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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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에 따르면 여성포터가 되기 위해서는 대개 1년 이상의 트레이닝을 받는다고 했다. 언어실력과 체력도모는 물론, 전문가이드로서 가져야 할 마음과 자세까지 교육 받았다.

특히 가이드는 트레커들의 길잡이인 동시에 문화해설가 역할도 똑똑히 해내야 했기에 여러 방면으로 갖춰야 할 것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게스트의 짐을 들어주는 포터로 시작하지만 거듭되는 훈련과 실제 트레킹 경험이 쌓이면 가이드 포터로, 종국에는 전문가이드로 홀로 설 수 있다고. 포터를 단순히 짐꾼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상당히 체계적 수순을 밟고 있음에 놀랐다.

하나둘 챙기기 시작했을 땐 무거울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배낭을 메고 나면 5분도 안 돼 천근만근이다.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을 높은 바위턱에 걸친 채 쉬고 걷기를 반복하면서 혹시나 필요할까 해 주섬주섬 챙겨 넣었던 것들을 후회했다.

느려진 걸음에 함께 걷던 일행은 어느덧 하나둘 사라졌다. 그사이 해는 산 너머로 떨어졌고 길에는 작은 그림자 하나가 길게 늘어졌다. 마르상디 강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리고 있음을 느끼며 롯지로의 걸음을 서둘렀다.

덧붙이는 글 | 2011년 봄과 여름 두 계절을 네팔과 인도 히말라야에서 보냈습니다. 그 중 5416m의 토롱 라 패스를 넘어 베이스캠프(A.B.C)에서 사랑코트를 지나 두 발로 포카라에 이르기까지 약 20여 일에 걸친 안나푸르나 트레킹 여정을 기록합니다.



태그:#안나푸르나, #네팔,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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