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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서 가장 볼 만한 문화유산은 아무래도 나주읍성의 중심에 있는 '나주객사(客舍)'와 '금성관(錦城館)'이다. 객사는 고려시대부터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불렸다.

나주시
▲ 나주객사, 금성관 나주시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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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서 숙박을 하면서 연회도 즐기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이나 중앙관리의 출장 시 숙소로도 이용되었다.

나주의 경우 객사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금성관은 한 달에 두 번 한양에 있던 임금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던 제를 올리던 곳으로 쓰였고, 양 옆에 있는 서익헌과 동익헌은 외국사신이나 중앙에서 출장 온 관리들이 머물던 요즘으로 보자면 최고급 국영호텔이었다.

우측의 동익헌은 고급관료가 머물던 호텔이다
▲ 금성관과 동익헌 우측의 동익헌은 고급관료가 머물던 호텔이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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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금성관은 조선 성종 임금 시절 나주목사 이유인이 세웠다. 일제 강점기에 내부를 일부 수리하여 군청사로 사용했던 것을 1976년 원래 모습에 가깝게 복원했다.

정면 5칸, 옆면 4칸 규모로 팔작지붕의 장엄한 건물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며, 칸의 넓이와 높이가 커서 대단한 위엄이 느껴진다.

김수종 기념촬영
▲ 나주객사 김수종 기념촬영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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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궁궐의 정전과 같은 규모로 웅장하면서도 근엄하다. 건축 당시에 정문인 망화루도 함께 만들었으나 지금은 망화루의 현판과 내삼문만 남아 있다.

임진왜란(1592)때에는 의병장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정식을 가졌던 곳이며, 구한말에는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때 이곳에 명성황후의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높이기도 했던 곳이다.

기둥이 장엄하다
▲ 금성관의 외부 기둥이 장엄하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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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금성관은 전남지방에 많지 않은 객사 중 하나로서 그 규모가 크고 웅장하고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상을 대표할 만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어 특히 유심히 살펴보았다.

우리 일행은 모두 나주객사와 금성관의 웅장한 모습에 반하여 한참을 바라보다가 앞뒤를 두루 살펴보고는 우측에 있는 동익헌에 앉아 잠시 쉬면서 가을바람을 맞았다. 참 바람이 시원하고 편히 쉬기 좋은 곳이다. 나는 마치 고급관리가 된 듯 이곳에 앉아 지나가는 구름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내부도 웅장하다
▲ 금성관의 내부 내부도 웅장하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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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사와 금성관을 살펴본 우리들은 이웃한 '나주향교(羅州鄕校)'로 이동했다. 1985년 전남도유형문화재 제128호로 지정된 나주향교는 나주가 호남에서 두 번째 가는 고을이었으므로 향교의 규모도 상당히 컸다.

나주향교는 조선 초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다. 현종, 숙종 때에 중수, 중건이 있었고 대성전도 이때 중수되었다. 그러나 1900년대에 사마재, 수복청, 양사재 등이, 1920년대에 서재, 충복사가, 1952년에는 동무, 서무, 동재 등이 헐리게 되었다.

이후 1959년 동재, 서재를 중건, 1980년 명륜당과 동, 서익당 보수, 1981년 담장 개축, 대성전과 동재, 서재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나주시
▲ 나주향교 나주시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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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아쉽게도 나주향교에는 오래된 건물은 대부분 사라지고, 한국전 이후 복원되기 시작하여 최근까지 복원을 거듭하고 있는 관계로 고풍스러운 기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곳이다.

건물 배치는 성균관이나 전주향교, 함평향교와 비슷하게 전묘후학(前墓後學)으로, 앞에 제향을 두는 대성전을 두고 강학을 하는 명륜당을 뒤에 두는 구조다.

즉,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강학은 명륜당이라 명명하여 경전학업의 중심으로, 문묘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공자와 중국 및 우리의 선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성전으로 나뉘어 구성되어있다.

대성전
▲ 나주향교 대성전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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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볼 만한 건물은 공자 부친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계성사와 보물 제394호 지정되어 있는 대성전이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팔작지붕건물이며 배향공간의 중심전각이다.

다듬은 돌 바른 층 쌓기를 한 높은 기단 위에 연꽃이 새겨진 둥근 초석을 놓고 배흘림이 있는 둥근기둥을 세웠다. 건물 내부의 바닥은 장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중국의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의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 건물은 서울문묘, 장수향교, 강릉향교와 더불어 가장 큰 규모에 속하며, 전주향교와 함께 향교건축물의 원형적 존재라 할 수 있다.

명륜당
▲ 나주향교 명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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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향교 본연의 교육 기능은 거의 사라진 시대라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아울러 지역 주민들을 위한 여름 서당과 전통혼례식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향교를 둘러 본 우리들은 나주 읍성의 일부인 '서성문(西城門)'을 잠시 살펴보았다. 고려시대의 작은 성을 조선 초에 확장한 나주읍성은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증, 개축이 이루어져 구한말에까지 그 골격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1910~1920년 사이 일제에 의해 4대문과 성벽에 대한 훼철작업이 빠른 속도로 행해졌다.

이에 따라 식민통치 건물, 일반대지, 혹은 도로망 등으로 마구 전용되었다. 해방 이후 나주의 도시화가 촉진되면서 훼손이 더욱 격심해져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지난 1993년 나주시와 전남도가 중심이 되어 남문인 남고문(南顧門)을 2층으로 화려하게 복원했다.
작년에 복원된 서문이다
▲ 나주읍성 서성문 작년에 복원된 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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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고문은 2층으로 된 누각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매우 화려하다. 옆에서 보면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어 옛 나주읍성 대문의 당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 지난 2006년에는 동점문(東漸門)이 복원되었다.

또 지난 2011년에는 서성문이 복원되어 낙성식을 가졌다. 남은 북망문(北望門)은 오는 2014년까지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우리 일행이 본 서성문은 전통 성문의 문루와 성문을 보호하는 시설인 옹성(甕城)등을 기록에 따라 복원한 것이다.

특히 우리의 성곽에서는 보기 드문 옹성을 직접 보게 되어 기뻤다. 서울의 동대문에 있는 옹성보다는 작았지만, 깜찍한 것이 조선시대 외적을 무찌르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을 것 같아 보였다.

문 앞에 옹성이 있다
▲ 서성문 문 앞에 옹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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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문을 보는 것으로 1박 2일 동안의 전주와 나주 여행을 마쳤다. 지역의 근대 건축물들을 보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기술로 지어진 건물이 많았고, 구한말 우리의 손으로 건축된 건물도 있었지만, 유지와 보존이 당장의 큰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지금은 초라하고 볼품없는 일본식 나가야(長屋)처럼 보존의 가치가 거의 없어 보이는 건물도 있었지만, 나름 존재 가치가 있고 보존에 의미가 있는 건물의 경우에는 정부가 나서서 매입을 하여 보존을 하든가 시민들이 힘과 돈을 모아 구매를 하는 방법인 내셔널트러스트식의 방법도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그것도 아니면 영국의 경우처럼 정부가 근대건축물을 세금으로 구입하여 관리와 운영은 전문단체인 내셔널트러스트에 위탁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보였다. 관리의 엄격을 위해 그 처분권은 국회에 위임하는 방법도 처분을 쉽게 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또한 최소한이라도 관리가 필요한 근대 건축물의 경우, 건물수리와 철거에 관한 심사를 엄격하게 하여 허가제를 실시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집을 지을 때만 허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보수나 수리, 철거 시에도 반드시 허가가 필요한 제도와 법이 있는 건강한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태그:#나주향교, #나주객사 , #금성관, #나주읍성, #서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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