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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포 지역을 둘러 본 우리들은 다시 버스를 타고 죽림동에 위치한 '나주역(羅州驛)'으로 이동했다. 1913년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한 호남선 철도역으로, 2000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183호로 지정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역사이다.

100년 된 역사다
▲ 나주역 100년 된 역사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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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북쪽 벽을 이어 화물 창고를 증축했고, 1970년 일본식 기와를 슬레이트로 바꾸었다. 기쁘게도 기본 구조나 기둥 등의 목재는 건립 초기 상태로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100년 된 역사 건물 치고는 아주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어 보기에 좋았다.

광주항일학생운동의 단초가 된 곳이다
▲ 나주역 광주항일학생운동의 단초가 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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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역은 1929년 10월 30일 일본인 남학생과 조선인 남학생의 편싸움을 발단으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의 직접적인 빌미가 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광주에도 비슷한 기념관이 있다
▲ 나주학생운동기념관 광주에도 비슷한 기념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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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운동의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 곳이라 의미를 가지고 보았다. 역사를 둘러 본 우리들은 바로 이웃한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살펴 본 다음, 점심을 먹기 위해 3대 나주곰탕집인 금계동의 '노안집'으로 갔다.

얼마 전 이웃집에 갔을 때와 거의 같은 식으로 쇠고기 편육을 넣은 국물에 파와 계란 고명, 고춧가루를 올리고 밥은 따로 주는 곰탕이었다. 앞에 앉은 동신대 손승광 교수에게 내가 약간 짜증나는 말투로 "가능하면 국물만 따로 주고 파와 계란, 고춧가루 등은 별로도 주면 안 되나요?"라고 물었다.

노안댁 할머님 집에서
▲ 나주곰탕 노안댁 할머님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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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음식이 싫으신 모양이죠? 시장에서 파는 국밥의 개념이라 장을 보러 온 서민들이 빨리 먹고 일을 보기 위해선 따로 주는 양반 식을 바라는 것은 무리 지요"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난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내 눈에는 이상해 보이지만, 쇠고기국물에 파와 계란 고명, 고춧가루를 같이 넣어 주는 것이 시장식이구나? 바쁘게 싸게 편하게 먹는 음식이라 한 사람 한 사람의 구미를 맞추기 보다는 전체를 대상으로 간편하게 주는 음식' 이라는 사실을 비로써 깨달았다.

난, 손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는 군소리 없이 맛있게 곰탕을 한 그릇했다.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잠시 커피 한잔을 하고는 이웃한 일제 강점기의 근대건축인 '금남금융조합건물'을 보기 위해 갔다. 1907년 나주에 세워진 금남금융조합의 건물로 193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단층의 벽돌건물이다.
일제 수탈의 대명사
▲ 금남금융조합건물 일제 수탈의 대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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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이라 내부를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외부에 일본 국화문양으로 추정되는 문양이 여러 개 있었다. 고리대금업을 주로 하던 금융조합은 일제수탈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해방 이후, 나주읍사무소로 잠시 사용되었고 현재는 고조현외과로 쓰이고 있다.

이어 '나주금융조합건물'이다. 이곳도 1903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이 되는 붉은 벽돌 건물로 2층에 3층은 옥탑 방처럼 작게 올라와 있는 구조이다. 한동안 중국집으로 사용이 되다가 현재는 1층만 옷가게로 쓰이고 2층은 비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제 시대 건물
▲ 나주금융조합건물 일제 시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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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관으로 보기에는 아주 잘 지어진 건물로 지금도 약간의 보수만 하면 충분히 사용이 가능할 정도로 이쁘게 지었다. 개보수를 하여 숙박시설이나 작은 공연장으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탈의 기억을 날려버릴 수 있는 아름다운 건물로 재탄생하길 기대해 본다.

이어 굽이굽이 돌아가는 나주의 골목길을 둘러보면서, 직선길보다 약간은 굽은 골목길이 더 이쁘고 멋지다는 것을 다시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가 찾아 간 곳은 7대째 한터에서 살고 있는 나주의 명문가인 남대동의 '박경중 가옥'으로 갔다.

'남파고택(南坡古宅)'이라고도 불리는 이 집은 중요민속자료 제263호로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양반 가옥이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도화선이 되었던 나주역 사건의 주역으로 학생 독립운동가인 박준채가 살던 집으로 당시 일인 학생들에게 피해를 당했던 박기옥은 박준채의 4촌으로 옆집에 살았다.

바깥 행랑채
▲ 박경중 가옥 바깥 행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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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의 구성은 안채, 초당, 바깥사랑채, 아래채, 헛간채, 바깥행랑채, 문간채 등 모두 7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형은 거의 평탄 지형이며 대부분 남향 배치이다. 현재 살고 있는 나주문화원장과 전남도의원을 지낸 박경중 선생의 6대조가 터를 잡은 집이다.

남파고택
▲ 안채 남파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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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1884년에 지은 초가로 출발하여 4대조인 박재규가 1910년경에 안채를 지어 전남에서 단일 건물로서는 최대인 48평 규모를 갖추었다. 관아 건물로 사용할 것을 가정하고 장흥 관아를 참조하여 지은 한옥이기 때문에 개인 주택이지만 관아의 형태로 지어졌다. 

이 집은 당시 나주지역 상류주택의 구조가 잘 나타나 있다. 안채를 지은 후 집안에 계속 불운이 겹쳐 1934년에 상량문을 교체하였다고 하며 안채보다는 작은 아래채를 1917년에 건립하여 살게 되었다. 이후 바깥사랑채는 1930년대에 건립되었다.

양철로 지은 집이다
▲ 헛간채 양철로 지은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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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간채는 안사랑채를 헐은 재목으로 1957년에 지은 것인데 전체적으로 양철을 지붕과 벽에 시공하여 요즘은 보기 드문 양철집으로 창고로 쓰이고 있다. 다양한 나무 사용법이 돗보이는 팔작지붕 문간채를 들어서면 하인들이 거처로 혹은 마구간, 창고 등으로 쓰이던 초당이 자리하고 있다.

상층의 나무 다루는 기술이 대단하다
▲ 문간채 상층의 나무 다루는 기술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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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채는 안채 전면 오른쪽에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바깥사랑채는 안채와 거의 같은 축선상의 맨 앞에 놓여 있다. 바깥사랑채는 현재 임대되어 한정식집 '사랑채'로 운영되고 있다. 두 건물 사이는 완전히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고 담장 한쪽에 좁은 문으로 왕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안채는 전후와 좌우로 퇴를 준 정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처마는 모두 겹처마이다. 모두 4칸 규모로 부엌, 안방, 대청 순으로 배치하고, 끝으로는 앞뒤로 방을 1칸씩 들였다. 이 방은 가장 동쪽의 방으로 신혼부부가 살면서 아침을 가장 먼저 맞는 곳으로 대대로 장손이 결혼을 하면 살게 되는 방이다.

남파고택
▲ 안채 남파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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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뒤편에 있는 초당은 전후로 퇴를 둔 일자형 초가집이다. 건넌방, 대청, 안방, 헛간 순으로 꾸몄다. 안방 뒤쪽으로는 골방이 있고 앞쪽으로는 건넌방까지 툇마루를 설치했다. 구조는 막돌로 낮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운 납도리집이다. 기둥 위에는 우미량과 도리를 결구하였으며 서까래가 아주 가늘고 부연을 대나무로 한 초가 우진각지붕이다.

이 집에는 놀라운 것은 몇 가지 있다. 우선 광주학생운동의 단초가 되는 박준채 선생이 태어나 살던 집이고, 해방 이후에는 고등공민학교를 세워 나주의 근대교육과 사회운동의 산실이 된 점이다.

1884년에 지어진 초당이다
▲ 남파고택의 초당 1884년에 지어진 초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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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보통 출세를 하거나 성공을 하면 작고 초라한 집은 허물고 새롭게 큰 기와집을 짓는데, 이곳은 초당을 그대로 두고 앞에 한옥의 안채를 지었다는 점이다. 돈을 벌고 벼슬이 올라도 예전의 모습을 잊지 말고 겸손하게 살라는 의미가 있다.

여기에 안채를 지은 다음 집안에 불운이 여러 번 생기자, 다시 작은 아래채나 바깥사랑채를 지어 살림의 규모도 줄여 너무 크게 되는 것을 경계했다는 사실이다.

요즘 보기 드문 부엌이다
▲ 안채의 부엌 요즘 보기 드문 부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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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현재 전국에는 고택의 원형은 많이 남아 있지만, 고택의 부엌은 수리된 곳이 많아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는 곳이 별로 없는데, 이곳의 부엌은 100년 전 그대로라는 것이다. 특히 이곳의 아궁이는 한 단계 단을 낮추어 불구멍을 설치하여 불기운이 건물 전체를 타고 올라 갈수 있도록 설계를 했고, 소나무를 오랜 시절 태워서 생긴 부엌 벽면의 그을음은 단순히 검게 보이지만, 100년 된 벽화를 보는 듯 아름답다.

그을음이 대단한 그림이다
▲ 남파고택의 부엌 그을음이 대단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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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쌀 10가마가 들어가는 쌀뒤주며 집을 건축할 때 사용되었던 도구를 아직도 전부 보관하고 있는 것과 100년 전의 소반, 도시락 통 등 다양한 생활용품도 보관 중인 것이 많다는 것이 나주 양반가의 풍모를 느낄 수 있는 점이다.  

햇살이 좋은 날 안채 대청마루에서 차를 한 잔하면서 잠시 쉬어가고 싶은 멋진 집이다. 이어 우리들은 나주객사, 금성관으로 향한다.


태그:#나주시, #남파고택, #나주금융조합, #나주곰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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