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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안교 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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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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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시민축제 메인 행사는 '만안교 쌓기'였다. 만안교는 효성이 지극한 정조가 억울하게 죽은 생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갈 때, 참배행렬이 편히 안양천을 건널 수 있도록 축조한 횽예교(일명 무지개다리)다. 1795년(정조 19년)에 당시 경기관찰사 서유방이 왕명을 받들어 3개월의 공역 끝에 완성했다.

지난 22일 오후 6시, 안양시민과 군인 등, 약 3000명이 안양 중앙공원에 모여 200년 전 역사를 재연했다. 이번 행사 주요 테마는 정조의 효심이다. 행사를 주최한 안양문화재단 관계자는 "1795년 축조된 만안교는 정조가 생부 사도제사의 능을 참배하러 갈 때 건넌 다리로 '효의 다리'라는 상징성을 지닌다"고 설명한 바 있다.

행사를 지켜보며 궁금증이 일었다. 과연 이것뿐일까? 역사적 유물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데, 분명 만안교도 이것(정조의 효심) 말고 다른 무언가를 담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스쳤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자료를 찾아보니 과연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정조와 만안교에 얽힌 역사 속을 여행해보자.

새로운 조선 꿈꾸며 만안교 건넌 개혁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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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이산)는 즉위하자마자 대신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선언했다. 이 말은 당시 150년간 이나 권력을 쥐고 있던 막강한 노론 세력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사도세자(정조의 아버지)를 모함, 뒤주 속에 갇혀 죽게 만든 노론 벽파는 정조가 왕위를 계승하는 데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비가 죽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는 정조가 왕이 될 경우 자신들에게 복수하려 들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어갈 때 어린 정조(당시 열 살)는 '아비를 살려달라'고 할아버지 영조에게 피눈물로 간청했다. 그 이후, 24세의 나이로 즉위할 때까지 정조는 끊임없이 암살 위협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했다. 

노론 벽파는 어린 정조를 세손에서 끌어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전력을 다하는 건 영조도 마찬가지. 영조는 노론 세력으로부터 손자(정조)를 지켜 내기 위해 10살이라는 나이에 요절한 자신의 아들 '효장세자' 장자로 입적시켜 놓는 '꼼수'를 쓰기도 했다. 이런 그가 즉위하자마자 스스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선언했으니, 노론 벽파 대신들 가슴이 얼마나 콩닥거렸을지 알고도 남음이다.

정조의 선전 포고는 단순한 으름장이 아니었다. 정조는 일단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홍봉한과 홍인한 형제부터 처벌했다. 이들이 노론의 영수이기는 하지만 정조의 외가이기도 하기 때문에 반발을 줄일 수 있었다. 또 영조의 계비인 정순대비 동생 김귀주도 몰아냈다.

그 뒤로도 정조는 집권 기간 내내 노론 벽파와 긴장 관계를 유지했고, 그로 인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정조 집권 기간 내 몇 차례나 암살 시도가 있었다 하니 당시 노론들의 반발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하지만 정조는 보통 임금이 아니었다. 노론의 위세에 위축되기는커녕, 재위 13년인 1789년 장헌 세자(사도세자) 묘를 양주(楊洲)에서 화산(華山)으로 이장하기로 결정한다. 이미 27년이나 지난 묘소를 옮기는데 신하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았다. 노론 입장에서는 어떤 경우이건 사도세자가 거론되는 게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정조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나갔다.

동시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1794년(정조 18년) 정조는 화성 신도시 건설에 착수한다. 노론의 서울이 아닌 국왕의 서울, 그리고 백성의 서울을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정조가 추진했던 왕권강화 작업의 핵심 사업이었다. 이렇게 해서 건립된 게 수원 화성이다. 말하자면 수원 화성은 정조 효심의 결정체고 동시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전초기지였던 셈이다.

정조의 꿈, 21세기 대한민국 꿈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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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안교는 정조가 세운 꿈의 도시 수원 화성으로 가기 위한 튼튼한 무지개형 다리였다. 이렇듯 튼튼한 다리가 필요했던 이유는 어가 행렬 규모가 크고 화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안교는 길이 31.2m 너비 8m이다. 축조양식이 정교하여 조선후기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받고 있다.

200년 전, 새로운 조선을 꿈꾸며 이 다리를 건넜던 정조는 안타깝게도 자신을 꿈을 이루지 못하고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다. 49세가 되던 1800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5월까지만 해도 건강했던 왕은 6월 10일경에 생긴 종기로 인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27일쯤에는 거의 의식을 잃는 정도가 되었고 급기야 28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독살당했다는 설도 있음).

정조의 죽음은 모든 일의 중지를 뜻했다. 정조는 1804년, 세자가 15세가 되고 혜경궁의 칠순이 되는 갑자년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화성에 머물고자 구상했으나 그 모든 계획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정조의 개혁 실패는 조선의 개혁 실패였고, 정조의 죽음은 조선의 죽음이었다. 정조가 죽은 이후 조선은 패망의 길로 들어섰다. 정조가 죽고 조선이 망하는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100년이었다. 

정조가 죽으며 정조의 개혁 정치는 수포로 돌아갔어도, 정조는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정조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는 곳곳에 남아 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만안교다. 만안교 쌓기를 재현하기 위해 동원된 많은 시민들을 보며, 정조의 개혁정치가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느꼈다.

정조 연구가 김준혁 박사에 따르면 정조가 내세운 개혁정치는 크게 4가지다. 첫 번째는 백성들이 모두 다 부유해져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를 위해 인재를 육성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자주국방을 이룬다는 것이고 네 번째는 국가 재정을 안정시킨다는 것이다.

모두 몇 달 후면 치러질 대통령선거 공약으로 나옴직한 것들이다. 200년 전 정조가 꿈꿨던 조선이나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이 원하는 나라가 같다는 것을 뜻하는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이러한 국민들의 열망이 정조의 혼을 깨우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상상력일까?

덧붙이는 글 | 안양뉴스



태그:#안양시 , #만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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