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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문화예술의 고장 전남 진도(珍島)에 다녀왔다. 그 지역 향토문화와 역사의 현장을 눈으로 보고 느끼면서 시민 문화의식을 높이기 위해 군산문화원(원장 이복웅)이 3차로 나눠 마련한 '2012 시민과 함께 떠나는 문화기행'(1차 13일, 2차 14일, 3차 15일)에 합류했던 것.

진도 휴게소에서 음료수를 마시는 회원들
 진도 휴게소에서 음료수를 마시는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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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비는 물론 점심도 무료로 제공되고, 여행자 보험까지 가입해주어 선배들과 나들이하는 기분으로 다녀올 수 있었다. 대한노인회 군산지회(지회장 황긍택) 남녀회원 35명과 함께한 1차 문화기행 주요 탐방지는 명량대첩지, 진도대교, 운림산방과 쌍계사 상록수 수림, 신비의 바닷길, 목포 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관 등.   

태풍(산바)을 예고하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오전 8시 40분 군산을 출발했다. 버스에 탑승한 탐방단은 칠순이 넘은 노인들이지만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처럼 표정이 상기되어 있었다. 이복웅 원장은 "그래도 소싯적에는 한가락씩 하던 분들"이라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군산문화원은 시민의 것이니 부담 없이 자주 찾아주시라"는 이 원장 인사와 "즐겁고 보람된 자리를 만들어주어 고맙다"는 황긍택 지회장의 답사가 끝나고, 회원들이 옆자리 사람과 친해지기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처음 만난 사이라도 간식으로 나온 쇠머리 찰떡을 나눠 먹으며 학교 선후배나 고향동네에서 방귀깨나 뀌는 누구와 서로 아는 사이라고 하면 금방 짝꿍이 되었다.

오전 10시 35분 목포 나들목을 통과, 영산강하구언에서 우회전해서 18번 국도를 따라 우수영 쪽으로 40분쯤 달리니까 진도의 관문이자 동맥인 진도대교의 위용이 윤곽을 드러냈다. 차도와 인도로 구분된 진도대교는 진도군과 해남군을 이어주는 한국 최초의 사장교(斜張橋)로 길이 484m, 폭 11.7m, 해면-상판 높이 20m, 높이 96m로 건설된 쌍둥이 다리로 알려진다.

세계 3대 해전사에 기록된 '명량대첩지'에서

명량대첩 기념관 입구에 세워진 비석과 울돌목 부근 섬들
 명량대첩 기념관 입구에 세워진 비석과 울돌목 부근 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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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 7분 울돌목으로 불리는 명량해협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若無湖南 是無國家'(약무호남 시무국가)가 음각된 충무공 어록비와 세계해전 사상 가장 독보적인 명량대첩 기념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낀다. 희뿌연 비안개 속으로 고뇌하는 이순신 상과 오롱조롱 물 위에 뜬 섬들이 말없이 엎드려 있다. 점점이 흩어진 섬들 사이로 오가는 고깃배들은 한 폭의 수채화를 떠오르게 한다.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바닷바람에 이곳저곳에서 감탄사가 터진다. 기념촬영을 마친 탐방단은 해남군 문내면 학동과 진도군 녹진 사이의 좁은 해협을 가로지르는 진도대교와 평균 11.5노트(시속 24km)의 급물살이 흐르는 우수영 울돌목을 등지고 앉아 이 원장의 설명을 들었다.

기념촬영을 마치고 이복웅 원장 설명을 듣고 있다.
 기념촬영을 마치고 이복웅 원장 설명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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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울 '鳴'자에 들보 '梁'자로 한자로는 '명량', '명량진', 우리말은 '울돌목'으로 임진왜란(1592~1598) 때 이순신 장군이 세계 3대 해전사 중 하나로 꼽히는 명량대첩(1597)을 승리로 이끈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제가 왜 이곳(명량대첩지)을 방문지로 정했느냐면 군산과 연관이 깊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곳 울독목에서 남은 배 13척으로 왜선 133척을 맞아 대승을 거두는데요, 이름 하여 '명량대첩'이라고 합니다. 당시 왜군의 손실은 병선 32척 완파, 92척 반파, 8000명이 전사합니다. 그때가 9월 16일인데 벽파진에 있던 왜선 200척이 또다시 몰려오니까 이순신 장군은 전략적으로 9월 21일 군산도(선유도)로 올라와 10월 3일까지 열이틀 동안 기거하면서 선조에게 명량대첩에 대한 장계도 쓰면서 전열을 정비하죠.

1597년에는 정유재란(1597~1598)이 일어나는데요. 당시 칠전량(漆川梁) 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충청수사 최호(崔湖) 장군은 군산에서 태어나셨으며 매년 봄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 있는 충의사(忠義祠)에서 추모제를 봉행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명량대첩은 군산과 연관이 깊습니다."

문화해설사(오른쪽)가 조선군과 왜군의 병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문화해설사(오른쪽)가 조선군과 왜군의 병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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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에 걸린 이순신 장군 영정, 진짜 얼굴은 하나도 없단다.
 기념관에 걸린 이순신 장군 영정, 진짜 얼굴은 하나도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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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장의 설명이 끝나고 일행은 전시관으로 이동해서 거북선과 판옥선 등의 병선과 무기류, 해전도 등 다양한 유물을 둘러보고 명량대첩 영상물을 감상했다. 전시관에서 만난 해설사는 이순신 장군 영정에 담긴 이야기, 조선 수군이 사용했던 무기, 이순신 장군의 통솔력 등을 실감 나게 설명해주었다.

"이순신 장군 영정은 실재 인물을 보고 그린 그림이 아니고 ▲ 탄생지도 충남 아산이 아니라 서울이며 ▲ 조선 시대 경상도는 문(門) 역할, 호남은 창고 역할을 했다. ▲ '약무호남 시무국가'는 장군의 어록이 아니고 1592년 지인(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췌하였고 ▲ 이순신 장군이 사용했던 칼은 이곳에 진열된 칼보다 더 긴 197.5cm로 보물로 지정되어 충남 아산현충사에 있으며 ▲ 명량대첩에서 쇠사슬을 사용해서 적을 물리쳤다는 주장은 '난중일기'에 기록이 없어 설화로 받아들인다"는 설명에 어느 회원은 "몇 차례 댕겨갔지만, 껍데기만 봐서 뭐가 있었는지도 몰랐는디, 오늘 구경 제대로 혔네!"라며 만족해했다.

소치 허련 선생의 숨결이 느껴지는 '운림산방'에서

명량 대첩지 기념관에서 진도읍에 있는 식당으로 옮겨 점심을 먹었다. 구수한 가시리 된장국 백반으로 허기를 채운 탐방단은 진도 홍주로 권커니잣거니 잔을 나누었다. 적당히 목을 축인 탐방단은 조선 시대 남종화의 대가 소치(小痴) 허련(許鍊:1808~1893) 선생이 말년에 거처했던 운림산방(雲林山房)으로 이동했다.

운림산방에서 소치 선생에 대해 설명하는 이복웅 원장
 운림산방에서 소치 선생에 대해 설명하는 이복웅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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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은 비안개가 산허리를 감싸고도는 운림산방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 10분. 출발할 때는 비가 내렸는데 버스가 도착하니 그쳐서 다행이었다. 일행은 소치 선생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운림산방 앞마당에서 이 원장의 설명을 듣고 현존하는 작가 130여 명의 작품이 전시된 소치기념관과 쌍계사 등을 돌아보았다.

"시·서·화에 뛰어나 3절로 불리는 소치 선생은 49세 때 존경하던 스승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 선생이 세상을 뜨자 고향 진도로 내려와 첨찰산(485m) 능선 아래 양지바른 곳에 화실을 짓고 '운림각'이라 불렀는데 지금의 '운림산방'입니다. 소치 선생은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곳에서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으며 자서전 소치실록도 집필하셨죠. 이곳 현판과 조금 전 울돌목에서 기념관 들어가기 전에 봤던 비석에 한자로 음각된 '약무호남 시무국가'는 소치 아들 의제 선생 글씨입니다···."  

남정근(83) 전 군산·옥구문화원장은 소치기념관 앞의 잔디에 심어진 나무(일지매) 앞으로 다가가 수험생이 필기하듯 안내판 내용을 꼼꼼히 메모했다. 남 전 원장은 "소치 선생이 손수 심어서 길렀다는 나무 세 그루 중, 두 그루(백일홍, 일지매)는 이름을 알고 한 그루는 몰랐는데 '자목련'인 것을 확인했다"며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어낸 학생처럼 밝게 웃었다.

마음이 편해지는 소치 생가. 숲에 가린 오른편 기와건물은 소치 영정을 모셔놓은 사당
 마음이 편해지는 소치 생가. 숲에 가린 오른편 기와건물은 소치 영정을 모셔놓은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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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림산방을 병풍처럼 둘러싼 첨찰산 능선을 바라보며 걷던 황 지회장은 "등산모임에서 몇 차례 다녀갔다"면서 "굽이굽이 이어진 능선을 3시간 정도에 걸쳐 산행하면서 내려다보는 운림산방은 방향이 바뀔 때마다 몽환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그림 전시장 같았다"고 말했다. 어느 회원은 "뛰어난 산수(山水)와 풍치를 보니 명작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감탄사를 터뜨리기도.

첨찰산 서쪽 끝 부분에 자리하고 있으며 진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寺刹)로 알려지는 쌍계사(雙溪寺)와 상록수림을 돌아보고 운림산방을 출발해서 신비의 바닷길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 39분. 잠시 버스에서 내려 비안개 자욱한 바다를 조망하고 목포시 남농로에 있는 국립해양문화연구소로 방향을 잡았다.

해양문화의 보고(寶庫)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관에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관 앞마당에 전시된 대형 닻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관 앞마당에 전시된 대형 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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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 도착하니 광장의 대형 닻(길이 8.3m 너비 5m)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서해에서 새우를 잡던 멍텅구리배 닻이란다. 멍텅구리배는 오랜 시간 바다에 정박해서 작업하고, 밀물과 썰물에 잘 버텨야 하기 때문에 큰 닻이 필요하단다. 전시된 닻은 2000년 6월, 전통 조선기술과 어로 민속 보존사업의 하나로 전남 신안군 어민 박항휘 등이 제작했다고 한다.

국내 최대로 알려지는 해양유물 전시관(1층~4층)에는 남해에서 발굴된 고려선과 1323년 중국 원나라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신안 앞바다에서 난파된 신안선(무역선), 조선의 실학자 정약전이 쓴 우리나라 해양수산생물 사전 <자산어보>(玆山魚譜: 1814년)의 발자취, 조선 통신사 선과 거북선, 판옥선, 조운선, 근대의 고기잡이배까지 다양한 문화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1975년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 복원까지 28년 걸렸다는 신안선 모습
 1975년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 복원까지 28년 걸렸다는 신안선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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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과 잠수부 등으로 이루어진 해저유물 발굴단이 국내 최초로 발굴한 720여 개의 선체 조각들을 이어 실제 크기(길이 35m, 폭 11m, 무게 200톤으로 추정)로 복원한 신안선과 고려 시대 도자기를 운반하던 완도선은 수백 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했다. 특히 배에 실려 있던 고려청자와 다양한 공예품들은 14세기 동아시아 해상 무역과 당시 조선기술을 보는 것 같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신안선 맨 아랫부분에 적재되어 있던 목재로 표면에 묵서하거나 음각으로 새긴 다양한 문양과 부호, 한자와 로마자 등이 복합적으로 표기된 자단목(紫檀木) 더미도 눈길을 끌었다. 자단목 원산지는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이며 불교와 힌두교 문화권에서 태우면 향기로운 연기를 내는 분향료(焚香料)와 조각품·장식품·고급가구 등에 쓰였다고 한다. 

1975년 5월 중국 용천요(龍泉窯)의 청자 몇 점이 어부들의 그물에 걸리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다양한 해저 유물과 바닷가 주민의 삶과 문화, 우리 배와 중국 배의 역사 등 선조들의 해양문화와 발자취가 담긴 문화재를 보면서 선조들이 바다를 어떻게 이용하고 개척하였는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명량대첩, #운림산방, #해양문화재연구소, #군산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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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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