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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지난 8월 29일 명예퇴직(이하 명퇴)을 했다. 해직 기간을 포함해, 근 삼십 년을 지켜오던 교단에서 내려서는 내 마음은 섭섭함으로 가득했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쳤고, 마음은 상처투성이었다. 몸이 지친 것은 해직 기간에 얻은 병 때문이고, 마음에 상처가 생긴 것은 무너지고 부서져 버린 오늘날의 교육 현실 때문이었다. 병가를 내고 치료를 받아도 좀체 회복되지 않아, 그예 명퇴를 신청하고 말았다.

그동안 호흡이 가장 잘 맞았던 고등학교 3학년생 반의 마지막 수업 시간. 8월 27일, 아이들도 그 시간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교실 문을 여니, 반 분위기가 침울했다. 내가 교탁 앞에 서자 아이들은 모두 목소리를 모아 '스승의 은혜'를 불러주었다. 듣는 내내 부끄럽기도 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마지막 수업, 아이들이 꿈 향해 걸어가길 바란다

십수 년 전 어느 스승의 날, 사직공원 근처 길거리에서도 이 노래를 불러준 아이들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해직교사였다. 졸업생이던 아이들 몇 명은 내게 저녁을 사 준 후, 비 오는 거리에서 이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날 나는 빗줄기에 눈물을 감춰야 했다.

지난 8월 27일, 아이들에게 꿈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마지막 수업을 했다. 학생이었던 때 내가 가졌던 꿈 이야기를 통해, 내게 수업을 듣는 이 아이들에게도 꿈을 향해 살아가는 마음이 생기기를 바라서였다.

대학이나 성적으로 모든 것을 평가받는 오늘의 현실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그 옳지 않은 현실에 좌절하지 말고, 모두 꿈을 향해 걸어가기를 바란다. 또, 평생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말로 마지막 수업을 마무리했다.

"중국 서북부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사막이 있다. 타클라마칸 사막이다. 그 사막을 가로지르는 큰강 '타림하'는 설산의 눈 녹은 물이 모여 거대한 강이 되었지만, 사막을 흐르고 흘러 끝내는 바다에 이르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다. 

어쩌면 교사는 사막을 흐르는 '타림하'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라는 물줄기는 여기까지 흐르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막을 흐르던 물은 지상에서 사라지지만 땅속을 흐르는 복류수가 되어 곳곳에 오아시스를 만들어놓는다. 너희가 내게는 그 오아시스다. 모두들 행복해라."

교실 문을 나오는데, 아이들 몇 명은 흐느껴 울었고, 나도 눈물이 고여 얼른 걸음을 재촉했다. 쉬는 시간, 교무실에 멍하니 앉아있는데 등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나를 툭 친다. 돌아보니 막 수업을 마치고 나온 반의 하영(가명)이다. 평소 얌전히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던 아이, 동그란 확대경을 눈 가까이 대고 열심히 공부하고, 내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던 하영이는 시각장애인이다. 수줍음이 많아 좀체 제 생각을 나타내는 법이 없던 아이라 나를 찾아온 것도 의외다.

"선생님, 책 한 권만 주세요."

하영이가 다짜고짜 내게 부탁을 한다. 평소 극히 내성적인 아이라 그 말 한마디를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하영이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마침 책꽂이에 남아있는 책 한 권, 최근에 출간한 내 시집을 꺼내 건네주자 하영이는 고맙다며 고개를 꾸벅하고 나가버린다. 다음날 아침, 수업 시작도 전에 하영이가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이거요. 제 선물이에요."

시각장애인인 하영이가 확대경 대고 쓴 편지

하영이가 불쑥 종이를 내민다. 받아드는데, "건강하세요"라며 돌아서 나간다. 하영이가 건넨 종이는 작은 책자였다. 겉표지와 뒤표지는 내가 어제 준 내 시집 표지를 복사해 붙였고, 한 장을 넘기자 시집에 있는 내 사진을 색종이에 오려 붙여놓았다. 그리고 여러 장의 편지가 책처럼 꾸며져 있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3학년 2반 장하영입니다. 

먼저 선생님! 저한테 시집을 선물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저도 기억에 남을만한 선물을 드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정성을 담은 선물이 최고! 라는 생각에 서툴지만, 이렇게 솜씨를 냈습니다. 조금 초등학생 같아도 이해해 주세요!

선생님, 사실 저는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도 많았어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이렇게 갑자기 학교를 떠나신다니…. 정말 너무 슬프고, 정말 너무 서운해요.

선생님 저는 정말 한문시간이 너무 좋았어요. 선생님 수업을 들을 때마다 마치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거든요. 특히 제가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해서 선생님 수업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아요.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학생시절 꿈이 두 가지였다고 하셨잖아요. 사실 저도 꿈이 두 개 있어요. 하나는 어린 나이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은 어린 아이들을 치료해 주는 아동심리치료사이고요. 하나는 장애인을 고용하는 여행 관련 기업 경영인이 되는 거예요. 아무래도 제가 시작장애이다 보니 장애인들을 많이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취업하지 못하는 장애인들을 위해 여행도 하고, 일도 해서 돈도 벌 수 있게 해주고 싶었어요. 이 두 가지 꿈, 이룰 수 있겠죠?

선생님, 선생님께서 저희 반 마지막 수업 때 해주신 말씀…. 저는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때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저뿐만 아니라 저희 반 친구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어요.

"너희들이 늘 행복하기를 빌고, 앞으로 내가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3학년 2반, 내 교직의 마지막 호흡이 가장 잘 맞았던 반을 늘 잊지 못할 거야. 그동안 고생했다. 고마웠다. 행복해라."

사실 제가 선생님과의 마지막 수업을 의미 없이 흘려보내기 싫어서 녹음했는데요, 제일 마지막 이 말씀…. 다시 들어도 다시 들어도 가슴이 짠해요. 선생님 일단 선생님께서 저희 반을 그렇게 생각해 주신 것에 너무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께서 이렇게까지 저희 반을 생각해 주실지는 꿈에도 몰랐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선생님…. 입시를 위주로 돌아가는 학교에서 선생님의 힘이 여기까지인 것 같아 퇴직하시기로 결심했다는 말씀이…. 대학 입시 때문에 학교에서 몸과 마음을 다 상해가며 꿈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학의 손꼽히는 서열 안에 들기 위해서 공부하는 저희에게는 너무나 가슴 아픈 말씀이었어요. 선생님의 결심이 그릇된 결심이라는 것이 아니라, "대학 입시"라는 없애버리고 싶은 제도가 우리들의 꿈뿐만 아니라 좋은 선생님마저 빼앗아 가는 기분이었어요.

선생님 저희는 고3이 되고 난 이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수업 중에 운동장을 밟아 본 적이 없어요. 매일 아침 7시 30분부터 오후 4시까지 무려 8시간 반 동안 똑같은 자세로 무언가가 아닌 오로지 공부만 열심히 해야 했어요. 그리고 이런 상황은 이제 우리에겐. 아니 대한민국 사람에겐 어기면 안 되는 몹쓸 규칙이 되어버렸죠.

선생님 비록 선생님께서는 학교를 떠나시지만, 이런 답답한 생활 속에 선생님의 한문 수업 시간은 그야말로 꽃이었어요. 선생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그리고 좋은 수업 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잊지 못할 거예요.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저를 지금까지는 3학년 2반에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한 학생으로 기억하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선생님을 최고의 선생님으로 기억하고 있을게요.

선생님! 선생님도 꼭! 행복하세요! 그리고 저는 앞으로 꼭 이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멋진 사람이 될거니까요 꼭! 기억해주세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행복하세요!

2012년 8월 28일 최성수 선생님께
선생님의 잊지 못할 제자가 되고 싶은 장하영 올림

편지를 읽는 내내 나는 눈물을 참느라 몇 번 고개를 흔들어야 했다. 확대경을 대고서야 겨우 글자를 알아볼 줄 아는 시각장애인인 하영이가 이 긴 편지를 한 자 한 자 써내려갔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려왔다.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풀칠해 종이를 붙이고, 표지를 만든 그 애의 기억 속에 남을 만큼 나는 정말 좋은 선생이었던가? 하영이가 내게 전해준 이 편지야말로 전 교직기간 동안 내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이제 교단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났다. 여전히 학교는 경쟁과 입시로 황막하고 답답한 곳이겠지만, 그러나 그 안에서 숨 쉬고 있는 아이들 때문에 학교는 견딜만한 곳이리라. 어쩌면 내가 그 길고 지루한 길을 좌절하지 않고 걸어온 것도, 잘못된 제도와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꿈과 웃음을 잃지 않는 그런 아이들 덕분이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아이들은 나의 스승이었다. 

덧붙이는 글 | *학생 이름은 정보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적었습니다. 편지는 일부 학생의 정보가 드러나는 사적인 부분만 제외했습니다.



태그:#교단, #편지,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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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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