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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나이트 라이즈>의 배트맨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배트맨
ⓒ 워너브라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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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을 죽인 이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악을 처단하기로 한 자.
딸을 죽인 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악과 맞서는 남자.

이 둘에게 법은 죽었다. 고위직 부패와 범죄로 얼룩진 <다크나이트>의 고담시. 마찬가지로 부정부패와 고위직 연루 비리로 가득 찬 <추적자>속 대한민국. 이 두 곳에 각각 배트맨 브루스 웨인과 백홍석이 있다. <추적자>의 비리 변호사 장병호는 "전쟁의 북소리가 울리면 법은 침묵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전쟁'의 속뜻은 대통령 자리를 놓고 벌이는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부패와 비리로도 읽힐 수 있다. 사회가 깊은 악으로 물들었을 때 법은 침묵한다. 배트맨의 고담시와 백홍석이 사는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악으로 물든 이 두 곳에서 법은 제 기능을 잃어버렸다. 배트맨과 백홍석에게는 이름의 첫자가 'ㅂ'으로 시작한다는 사소한 공통점 외에 또다른 커다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스스로 기준이 되기를 택했다는 점이다.

선과 악의 기준, 그 기준의 모호함

인간 본성에 관한 물음은 모든 학문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그 중에서도 철학은 우리 자신에 대한 참다운 앎을 추구한다. 중국의 철학자 고자는 "인간의 본성에 선과 악의 구분이 없고, 인간의 본성은 물과 같다"고 말했다. 물은 주변의 온도에 따라 액체가 되기도 하고 고체가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있어 선과 악의 기준은 상황에 따라 흔들린다.

아사 직전의 상태인 노숙자를 예로 들어보자. 눈앞에 먹을 것이 있는데 그는 가진 돈이 없다. 이대로 굶어죽을 것인가, 아니면 저 음식을 훔쳐서 내가 살고 볼 것인가. 그는 극한의 배고픔에 순간 이성을 놓고 음식을 훔치고 만다. 그에게 선과 악의 기준이 흐릿해지는 순간이다. 인간에게 선과 악의 기준은 때론 모호하다. 하지만 한 사회가 균형을 잡고 혼돈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모든 배고픈 이가 이성을 잃고 도둑질을 한다면 전쟁기간과 같은 혼란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에는 선과 악의 기분을 잡아줄 외부요인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법과 시스템이다.

그런데 부정부패로 인해 법이 제 기능을 잃었다. 선과 악의 기준도 덩달아 희미해졌다. 이에 <다크나이트>의 브루스 웨인과 <추적자>의 백홍석은 스스로 기준이 되기를 택했다. 법이 하지 못하는 악의 처단을 본인이 스스로 하겠다고 나섰다. 시작은 제 기능을 못하는 법에 반발한 사적복수였다. 하지만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단순한 '나'의 복수 이외에 더 거대한 '선'을 원하게 되었다. 배트맨은 고담시의 모든 악에 맞서 싸우기로 했다. 백홍석은 시민들에게 강동윤의 가면 벗은 모습을 보여주고,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았다. 진실을 드러냈다. 사법부 비리, 범죄자의 악 가운데서 그들은 '기준'이라는 상징적인 역할을 해냈다.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지만, 모두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추적자>의 백홍석
 <추적자>의 백홍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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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은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존 블레이크(조셉 고든 레빗 역)에게 "영웅은 누구나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자신이 가면을 쓰는 이유라고 했다. 백홍석과 웨인은 둘 다 평범한 '누구나' 였다. 백홍석은 딸의 생일에 PK준 콘서트 티켓을 선물하기 위해 몇 달 간 용돈을 모으는 아버지였다. 웨인은 어렸을 적 박쥐 공격을 당했던 트라우마로 박쥐공포증이 있는 아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누구나'가 각각 딸과 부모님의 죽음을 경험하며 변했다. '악의 실체'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깊어졌다. 그들안의 분노가 그들이 영웅이 되게끔 만들었다.

'누구나'가 영웅이 될 수는 있지만, 모두가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성적으로 선과 악의 기준을 갖고 태어나지 못한 인간들은, 선택의 순간에서 때론 악의 편을 들기도 한다. 선천적인 능력이 없어 '선과 악'을 교육적으로 학습했지만 선택의 상황에서는 교육의 기억이 일시적으로 삭제되는 것이다. <추적자>에서 백홍석의 의사친구 윤창민은 30억에 혹해 친한 친구의 딸 백수정을 죽인다. '배신'의 뜻조차 모를 것 같던 반장님 역시 10억이라는 돈에 동공 흔들림을 겪으며 백홍석을 배신했다.

<다트나이트>에서 조커는 이러한 인간의 불완전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범죄에 악용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야. 힘든 시기가 오면 소위 문명인이란 사람들이 더 추악해져." 조커는 평범한 인간들을 모두 무지몽매한 개체들로 보고 이들을 실험하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정에서 학교에서 '선과 악'을 학습하곤 법의 강제 하에 그 기준을 지키며 살아간다. 하지만 법이 제 기능을 멈춘 상황에서는 감시 기능도 사라져 기준이 흐릿해진다. 이 상황에서 선과 악의 기준을 바로잡고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이 웨인과 백홍석이 단 하나의 영웅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세상이 비리로 가득 찼을 때 혼자서 기준을 바로 세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영웅 역시 시작은 불완전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큰 맘 먹고, 제 몸 다치는 것 불사하며 싸웠는데 결과는 지명자 수배다. 이 미친 세상은 선을 되찾겠다는 그를 범죄자로 만들었다. 여기서 보통 사람은 좌절하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진실을 바로잡겠다고 싸우다가도, 세상이 미쳤는데 나 혼자 멀쩡하다고 될까 하면서 회의하게 된다. 브루스 웨인과 백홍석에게도 기준을 지키는 것은 늘 '벼랑위의 무엇'처럼 위태위태하다.

부패한 모든 것은 그 옆의 신선한 것들에게도 더러움을 전파시키려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숨은 늘 위협당하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의 희생이 잇따른다. <다크나이트>에서 브루스 웨인이 사랑하는 여자인 레이첼이 죽고, <추적자>에서 백홍석의 부인인 미연이 죽고 동료인 조형사가 다치는 것처럼. 이것이 현실이라면, 브루스 웨인과 백홍석은 진작에 지쳐 포기했을지 모른다. 그래도 다행히 영화는 영화다. 모든 위기는 이들을 강하게 만들고, 선을 바로세우겠다는 의지는 더 커진다.

영웅을 기다리는 현실, 진짜 영웅은?

이처럼 현실 속에서는 영웅이 탄생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영웅을 더 기다린다. 영웅에 대한 로망은 숱한 영웅물을 만들어냈다. 올해만 해도 영웅의 이야기를 그린 <어벤져스><어메이징 스파이더맨> 등이 앞서 개봉해 흥행에 성공했다. 사극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코드는 시대를 구한 영웅의 활약담이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 타인을 구한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늘 큰 뉴스거리가 된다. 이들에게는 현실 속 영웅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하지만 배트맨이나 백홍석 같은 영웅은 나타나기 힘들다. 현실의 위기가 덜하기 때문일까, 인간의 본성은 생각보다 더 나약하기 때문일까. 어쨌든 현실에서 배트맨이나 백홍석을 가질 수 없는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 시스템을 다시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추적자>의 최정우 검사가 무너진 법의 마지막 수호자로 활약한 것처럼. 백홍석과 배트맨을 대신하기 위해서 우리가 스스로 감시망이 되는 수밖에 없다. 모두가 영웅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다수가 힘을 모아 기준을 세우면 하나의 영웅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 시스템을 바로 세워야 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비평 변두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다크나이트 라이즈, #추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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