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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숨은벽이 보이고, 왼쪽으로 인수봉, 오른쪽으로 백운대도 보인다.
▲ 숨은벽 저 멀리 숨은벽이 보이고, 왼쪽으로 인수봉, 오른쪽으로 백운대도 보인다.
ⓒ 정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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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10일 날씨 흐림. 오전 9시 40분 경 집에서 출발하여 오후 6시 30분 경 집에 도착하다. 이름도 특이한 '숨은벽'. 북한산 산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일 년이 지났다. 그동안 얼굴의 이중 턱이 사라지고, 뱃살이 들어갔으며, 근력이 생겨 하루 4시간 이상의 산행을 무리 없이 하게 된 이 시점에 드디어 '숨은벽' 코스에 도전했다.

'숨은벽' 이름도 특이한 그 곳은 어디인가? 인수봉과 백운대 사이에 위치해 있다. 34번이나 704번 버스를 타고 '효자2리'(사기막골 전 정거장, 정류장 이름이 버스마다 다르다.)에 내려 백운대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산 속에 화장실이 없으니, 입구에서 미리 볼 일을 해결하고 가는 것이 좋다. 북한산의 특징은 어딘가에 누군가가 반드시 앉아서 쉬고 있기에 급하다고 아무데서나 볼 일을 보면 다 들키게 되어있다.(그런데 담배 피는 인간은 꼭꼭 숨어있는지, 냄새만 나고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날이 많이 흐렸다. 그동안 하도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냈더니, 이제는 할 말도 없고, 오롯이 북한산의 새소리와 바람소리만 들려오고 경치만 보인다. 말없이 뒤를 따라가니 언니는 이제 전문산악인이 다 됐다며 놀리기도 한다. 산 속 작은 공터에 앉아 물 한 모금 마시는데, 언니는 얼른 일어나 서양 돼지풀을 뽑는다. 이 높은 곳까지 어떻게 왔을까? 다른 풀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아닌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점령하듯이 영토를 확장해 자기만 살아남는 풀. 무서운 생명력이 징그럽다.

등산로 정비 물품을 실어나르는 헬리콥터
▲ 헬리콥터 등산로 정비 물품을 실어나르는 헬리콥터
ⓒ 정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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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보니 저 멀리 숨은벽이 가파른 삼각형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왼쪽으로는 인수봉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백운대가 보인다. 1980년대 후반 나는 북한산에는 백운대 인수봉만 있는 줄 알았다. 세검정에서 올라가도, 4.19탑 쪽으로 올라가도, 도선사 쪽으로 올라가도 정점은 언제나 백운대였다. 이제는 다양한 등산로로 안전하게 산행할 수 있어서 정말 좋다. 등산로를 정비하는 것은, 산도 보호하고 사람도 보호하는 일이다. (북한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케이블카 설치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각 코스를 적절하게 금지 시키면서 산행을 하면 서로가 좋을 것이다. 2029년까지 북한산성 입구부터 계곡출입금지는 그래서 아주 마음에 든다. 저 멀리 하늘에 헬리콥터가 등산로 정비물품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6월 9일 발생한 화재 현장
▲ 숨은벽 화재 현장 6월 9일 발생한 화재 현장
ⓒ 정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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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6일에 '숨은벽' 능선 근처 산불이 났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그 현장을 지나게 되었다. 탐방로 바로 양옆 나무들에 까맣게 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방화로 추정된다고 하더니 아직 범인은 잡지 못했나보다. 남대문을 불태워버린 어리석은 사람이 이곳에도 있나 보다. 이 귀한 자연유산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가슴 아프다. 숨은 벽 가는 길은 그리 쉽지 않은 길인데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지 유난히도 쓰레기들이 군데군데 많이 있다.

크라잉 넛_어떻게 살 것인가 
지하철에서 읽은 책. 숨은벽 산행을 같이 했다.
▲ 어떻게 살 것인가 크라잉 넛_어떻게 살 것인가 지하철에서 읽은 책. 숨은벽 산행을 같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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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씨 탓에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던 숨은벽.
▲ 숨은벽 흐린 날씨 탓에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던 숨은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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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벽'은 내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줌인을 한 것처럼 크고 선명하게 다가온다. 평일인데도 숨은벽이 바라보이는 넓은 바위 위에는 경치를 바라보며 점심을 먹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바위 위에 서서 보니,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사계절이 모두 아름답겠다. 해골바위를 보여준다며 그 너럭바위 끝으로 언니가 나를 데려간다.   

숨은벽을 바라보는 바윙 위 옆에 있는 해골바위. 외계인처럼 보인다.
▲ 외계인 바위 숨은벽을 바라보는 바윙 위 옆에 있는 해골바위. 외계인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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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해골바위라는데, 해골보다는 외계인처럼 생겼다. 두 눈과 얼굴 형태. 완벽한 외계인 얼굴바위. 조각해 놓은 것처럼 빗물이 고인 부분은 눈동자 같고... 그 곳은 가끔 목마른 새들의 옹달샘이 되기도 한단다. 상상을 하니 좀 징그럽긴 하지만, 눈으로 보는 모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아름다운 선을 행하는 바위로 이해하니 절묘한 위치에 놓인 기묘한 바위다.

저녁에 딸에게 사진을 보여주니, "원효스님이 마셨다는 그 해골바가지의 물 같은 것인가?"라고 한다. 하하.. 그거랑 이것은 다르지만, 질문이 내가 상상하지 못한 내용이라 참신하다.

이 많은 사람이 주중에 와서 숨은벽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고 있다. 쓰레기는 좀 가져가길.
▲ 숨은벽을 바라보며 먹는 점심 이 많은 사람이 주중에 와서 숨은벽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고 있다. 쓰레기는 좀 가져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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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 (사기막골) 이정표
▲ 위치 확인 9-10 (사기막골)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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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북한산엔 위험한 곳이 많다. 사람의 일은 알 수가 없으니 이왕이면 자신이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위치를 파악하며 가는 것도 좋겠다. 현재의 위치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마지막으로 나타나고, 이곳부터 백운대까지는 이정표가 없다. 조심조심 걸어가다 보니 숨은벽 아래에 도착했다. 숨은벽 바위 위에는 아까부터 까마귀 한 마리가 대장처럼 앉아 까악까악 울어대더니, 이젠 두 마리로 늘어 대화하듯이 울어댄다.

숨은벽 아래 릿지등반을 준비 중인 사람들
▲ 릿지등반 준비 중인 사람들 숨은벽 아래 릿지등반을 준비 중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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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벽 바위에 까마귀 두 마리가 앉아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 까마귀 두 마리 숨은벽 바위에 까마귀 두 마리가 앉아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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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릿지등반(암릉으로 이뤄진 능선을 하나 둘씩 오리내리며 주위경관을 감상하는 것. 감동과 성취감이 많은 것에 비해 그만큼 사고위험이 많이 따르는 등반이다. 1999년 경찰산악구조대의 사고통계를 보면 북한산 암벽등반사고 중 80%가 릿지등반사고라고 한다.- 출처 중앙대학교 산악부 홈페이지)을 하려고 준비 중인 사람들을 보고 뭔가 회의를 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쉴 새 없이 까악 거렸다.

숨은벽, 까마귀 두마리, 릿지등반 준비중인 사람들.  한 폭의 그림.
▲ 숨은벽 까마귀와 사람들 숨은벽, 까마귀 두마리, 릿지등반 준비중인 사람들. 한 폭의 그림.
ⓒ 정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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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숨은벽, 인수봉, 백운대, 그리고 사람들. 한 폭의 그림이었다. 잠시 구경하다가 내려갔다. 숲길을 잠시 걸으니 갈림길이 나왔다. 아래로 가는 길과 위로 오르는 길.

"이제부터 제대로 오르막길이야. 약수 한 잔 마시고 가자."

그 갈림길 옆에 약수터가 있다. 플라스틱 바가지가 네 개 가지런히 놓여 있는데, 물이 맑고 깨끗했다. 한 바가지 떠서 세 걸음 뒤로 물러나와 얌전히 둘이 나눠 마신 다음, 다시 조심조심 가져다 엎어 놓았다. 혹시나 티끌 하나라도 떨어질까 봐, 이곳에서 물을 마시는 사람들은 그 물 앞에서 손도 안 씻는다는 언니 말처럼, 그 물의 맑음을 보고 맛보니 절로 그런 행동이 나온다.     

백운대로 올라가는 그 길은 말 그대로 '제대로 오르막길'이었다. 말도 하지 말고 걸어야 하고, 혹시라도 넘어지면 대형사고 날 만큼 돌이 잔뜩 이고 경사가 심해서 넘어져서도 안 되는 길이다. 길이 험한데도 명상에 잠기듯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 길이다. 집중 집중하며 걸어올라 가는데 언니 목소리가 들린다.

백운대 바위
▲ 백운대 백운대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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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쉽다. 길이 끝나가네. 이제부터는 인간들이 설치해놓은 계단을 올라가야 해."

언니와 달리 나는 하나도 아쉽지 않고 그 계단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숨이 턱에 차고 오르는데 정말 힘이 들어서, 그 철 계단이 정말 좋았다.

백운대 꼭대기에 가면 언제나 바람이 불고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남편은 연애시절에도 바람처럼 나는 듯이 산을 다녔지만, 나는 사랑에 눈이 멀어 애인이 가자고 하니 산에는 따라왔으나, 언제나 헉헉거리며 힘겹고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간혹 가다 데이트 하는 젊은 연인들의 모습에서 그 때의 내 모습을 하고 있는 여자를 보기도 한다. 남자친구에게 짜증을 내며 징징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짜증은 내지 말고, 징징거리지도 말고, 사랑의 힘으로 어서 걸어가려무나'하는 인사를 보내기도 한다. 이런 커플은 지하철 안에서 만나는 주물럭 커플들보다는 백배 더 아름답게 보인다.

백운대 바위 아래 붙은 경고와 출입금지. 목숨이 아깝다면 이 경고를 새겨 들을 것.
▲ 경고와 출입금지 백운대 바위 아래 붙은 경고와 출입금지. 목숨이 아깝다면 이 경고를 새겨 들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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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백운대 엉덩이야."

그 곳은 아주 위험한 곳으로 '샛길 등반 금지'라는 팻말이 있다. 사고가 많이 나는 곳이란다. 거대한 바위 아래에서 지나가는 아주머니들과 인사를 나눈다. 좌 인수봉 우 백운대를 지나니 아주 넓은 너럭바위가 나왔다. 물 한 잔과 과일을 먹으며 땀을 식혔다. 그 곳 역시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인지. 깨진 유리병조각과 담배꽁초가 보인다. 이 높은 곳까지 와서 산을 못살게 군 흔적이 너무 많다.

언니와 그 곳에서 잠시 쉬는 순간은 평화 그 자체다. 그 시간에 그 곳에서 머물 수 있다니... 많은 고민들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 뒤쪽에도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그 곳에서는 한 커플이 암벽등반 연습을 하는 중이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커플. 남학생은 로프에 몸을 묶고 아래쪽에 있고, 여학생은 그 위에서 힘들다고 투정하는 모습이다. 하하. 왜 모든 커플은 이런 모습일까? 과감하고 씩씩한 여학생은 이런 데이트 자체를 안 하는 것일까? 그 옆을 지나오며 언니랑 나는 살짝 웃었다. 예쁜 모습이다. 깨지지 말고 사랑의 결실을 맺기를...

노적봉
▲ 노적봉 노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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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문을 지나는 백운대 아래 하산 길은 낯이 익다. 저 멀리 노적봉의 뒷통수가 보인다. 적봉씨를 바라보니 그 낯익음에 반가움이 앞선다. 힘들고 고단한 길에 만나는 낯익은 것들은 모두 다 반갑고 또 반갑다. 이발하지 않은 덥수룩한 머리털 같은 모습 그 중 유독 눈에 띄는  땜통자국이 있다.

나-"저기 좀 봐. 저기에 누군가 그림을 그려 놓은 것 같아."
언니-"저기에 어떻게 그림을 그리니? 이끼겠지."

세로로 붓글씨를 쓴 것 같고, 동물 모양을 그려놓은 것 같은 이끼 그림
▲ 노적봉 이끼 그림 세로로 붓글씨를 쓴 것 같고, 동물 모양을 그려놓은 것 같은 이끼 그림
ⓒ 정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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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로 줌인해서 보니 이끼다. 참 신기하게도 이끼가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글씨를 쓴 것처럼 보인다. 노적봉은 현재 등반금지다. 만경봉과 노적봉 아래에서 오르지 못하는 사모의 정을 눈으로 보낸 후 용암문까지 신나게 내려왔다. 지도를 보며 잠시 쉬고 있는데,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눈부신 날개를 펼치며 꽃 위에 앉아 꿀을 먹고 있다. 정말 어울리는 조합. 멋지다. 나비를 보며 쉬다가 우린 지난 가을 눈부신 단풍으로 꿈꾸게 해 줬던 계곡길 말고 북한산 대피소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눈부신 무늬의 호랑나비. 저 작은 꽃 위에서 날개를 활짝 펴고 꿀을 먹고 있다.
▲ 용암문 근처 꽃과 나비 눈부신 무늬의 호랑나비. 저 작은 꽃 위에서 날개를 활짝 펴고 꿀을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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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6시간 정도의 산행. 다리는 살짝 풀리고 기분 좋은 피곤함이 몰려왔다. 부산으로 제주도로 바쁘게 출장 다닌 남편은 연신 문자를 보낸다. 몇 시 즈음에는 집에 도착한다고... 제주산 옥돔과 몇 가지 선물도 사 간다는 문자에 마음이 급해진다. 급한 마음과 달리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더니 34번과 704번 버스가 40여 분을 기다려도 오질 않는다. 사람들은 우리 뒤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한참 기다린 후 나타난 버스 두 대는 앞문을 열지도 못하고, 정류장에 서지도 않은 채 쌩하고 달려가 버린다. 버스 안에는 예비군들이 가득가득 차 있었다. 아까 산에서 예비군 훈련할 때 나는 노랫소리를 들었는데, 그들 덕분에 집에 가는 길이 힘들어 질 줄은 몰랐다. 그래도 힘들게 훈련한 예비군들이 타고 가는 버스를 어찌하겠는가?

마침, 학교에서 집에 도착한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전기밥솥에 밥 좀 해 놓으라고. 예비군들이 모두 탈 때까지 버스는 이곳에서 타기 힘들 것이라는 빠른 판단으로 언니랑 나는 그 곳에서 세 정거장을 더 걸어가 입곡삼거리까지 갔다. 그 곳에서 텅텅 빈 버스를 타고 가는 기분은 행복했다. 우리가 그렇게 걸어갈 때까지 34번과 704번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집에 6시 30분에 도착했다.

아들은 밥맛도 좋게 밥을 아주 잘 해놓았고, 남편의 파란만장한 출장 이야기를 듣다가 너무 피곤해서 땀으로 범벅이었지만 등산복을 입은 채로 잠이 들었다. 그 덕분에 밤새 악몽에 시달리다가 새벽에 일어나 씻고, 강화도 보건소로 구강보건교육 하러 일곱시 좀 넘어서 나갔다.

식구들에겐 좀 미안했던 숨은벽 등반. 하지만 덕분에 아들과 남편에게 무척 고마웠고, 알아서 생활 해준 딸도 고마웠다. 그리고 그 피로에도 왕복 6시간 정도의 강화도 행을 지각도 하지 않고 잘 다녀올 수 있던 체력도 고마웠다.

1년이 지난 북한산 산행. 지금 나는 감정의 회복도 빠르고 육체의 회복도 빠르다. 회복탄력성이 무척 좋아진 것을 느낀다. 북한산. 모두 당신 덕분이다. 내 가까이 있어줘서 정말 고맙다.          


태그:#북한산 숨은벽, #인수봉, #백운대, #해골바위, #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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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위생사 . 구강건강교육 하는 치과위생사. 이웃들 이야기와 아이들 학교 교육, 책, 영화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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