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나홍진 감독의 영화 <황해>의 한 장면.
 나홍진 감독의 영화 <황해>의 한 장면.
ⓒ 팝콘필름

관련사진보기


나홍진 감독의 영화 <황해>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아보자. 나 감독의 전작 <추격자>에서는 "4885 너지?"를 꼽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에 버금가는 장면을 찾아보자. 칼에 찔리고 도끼를 휘두르고 신체를 토막 내고 총에 맞고 피를 철철 흘린다. 당장 충격은 받지만 기억에 오래 담아 두기 어렵다. 아무래도 영화 초반 이 장면만 한 게 없다.

주인공은 중국에서 어선을 탄다. 죽을 고비를 넘겨 밀항한 그는 어느 허름한 민박집에서 눈을 뜬다. 얼굴은 까칠하고 눈도 충혈돼 있다. 입에서 허연 숨이 새나오는 겨울이다. 밥상에는 김과 김치, 냉면 그릇에 담긴 밥이 전부다. 찢어질 듯 입을 크게 벌리고 밥과 김을 욱여넣는다. 배우 하정우의 '먹는 연기'가 돋보인 장면이다.

물론 이 장면을 생략했어도 영화 전개에는 아무 영향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밥을 향해 맹렬하게 숟가락질해야 했다. 여기에는 '입으로 씹거나 하여 뱃속으로 들여보내다'라는 뜻의 '먹다'말고 다른 무엇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먹기 전과 먹은 후가 다르다는 것. 그가 밥을 먹는 모습으로 죽음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밥은 곧 삶이다.

일상으로 가보자. 우리가 흔히 쓰는 "밥 먹고 합시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라는 말에는 '밥'과 '일', 그리고 '삶'이 등치된다. 그래서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를 고민하는 건 무의미하다. '일하다'를 대입해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안부를 묻는 인사로 "밥 먹었어?"를 자주 쓰는 걸 생각하면 이들을 연결 짓는 게 억지춘향은 아닐 것이다.

'해고는 살인이다.' '함께 살자.' 쌍용차와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문제로 지난해부터 이 같은 구호가 터져 나왔다. 여기에 '일'과 '삶'은 있지만 '밥'은 생략돼 있다. 하지만 정말 문제는 '밥'이었다. 한겨울 크레인에 올라 309일을 보낸 김진숙 지도위원의 차가운 속을 데운 건 황아리씨가 매일 올려보낸 더운 밥이었음을 떠올려보자. 희망버스도 그 밥이 있어 가능했다.

'희망식당 하루'(아래 희망식당)가 주목받는 것도 같은 이유다. 희망식당은 '밥'이 빠져 버린 구호의 빈 곳을 채운다. 일 주일에 하루 문을 여는 이곳은 5000원짜리 밥값을 모아 해고노동자를 지원한다. 밥을 먹어 해고노동자들의 밥을 짓는 것이다. 지난 4월 시작한 희망식당 현재 3호점까지 문을 열었다.

희망식당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누구는 150일 넘게 파업 중인 MBC 노조를 위해 삼계탕을 끓이기도 했다. 또 대한문에 차려진 쌍용차 희생자 분향소와 여러 투쟁 사업장에 도시락을 배달하는 이도 있다. 사람들은 밥으로 연대하고 노동자들은 밥으로 '일'과 '삶'을 위한 싸움을 계속한다. 그렇게 '밥으로 연대'하는 현장을 만나보자.

[희망식당] "밥이 없으면 밥 이외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

지난달 14일 문을 연 희망식당 '하루' 2호점의 내부 모습.
 지난달 14일 문을 연 희망식당 '하루' 2호점의 내부 모습.
ⓒ 이주영

관련사진보기


지난 2일 지하철 6호선 상수역 희망식당 2호점에서 들꽃향린교회 신도회가 일일 호스트로 참여하고 있다.
 지난 2일 지하철 6호선 상수역 희망식당 2호점에서 들꽃향린교회 신도회가 일일 호스트로 참여하고 있다.
ⓒ 최지용

관련사진보기


지난 2일, 서울지하철 6호선 상수역에 있는 희망식당 2호점이 문을 여는 날. 이곳은 매주 월요일 전철역 4번 출구 앞 '춘삼월'이라는 식당을 빌려 운영된다.

낮 12시가 되기 전부터 몇몇 테이블에 손님들이 앉았다. 보통 이른 점심을 먹고 일을 시작하는 주방장과 일일 호스트(주인)들이 밥도 못 먹고 분주해진다. 이날은 뼈다귀감자탕과 두부샐러드가 주메뉴다. 직접 두부를 만들어 파는 '꽃맘두부(@floweri********)'가 매번 고소한 두부를 지원하고 있다.

정오를 넘자 10여 개의 테이블이 꽉 찼다. 음식을 나르는 손들이 손님이 앉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도 더딘 서빙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감자탕을 담는 2호점의 주방장,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임재춘씨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힌다. 홀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뛰어다니며 점심 장사를 무사히 마쳤다.

희망식당에는 보통 일일 호스트 한 명과 고정적으로 일을 돕는 2~3명이 있다. 일일 호스트는 누구든지 신청할 수 있고 그날 하루 자신의 손님을 최대한 유치하는 역할을 맡는다. 지금까지 20명이 넘는 사람이 일일 호스트가 됐고, 지하철 7호선 상도역에 있는 1호점은 이달 호스트 예약이 다 차 있다. 2호점과 지난달 청주에 문을 연 3호점도 호스트를 하려면 몇 주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들꽃향린교회 신도회도 호스트를 신청하고 이날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천호동에 있는 들꽃향린교회는 6월항쟁의 역사적 장소 가운데 하나인 명동에 향린교회에서 '작은 교회'를 지향하며 새롭게 만든 곳이다. 이날 신도회 노지영씨를 비롯해 7명이나 되는 호스트들은 자비를 모아 후식으로 매실 음료와 쿠키까지 준비했다.

노씨는 "우리가 함께 연대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알고는 있지만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 알기 어렵다"며 "희망식당은 해고노동자들과 실질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했고 교회 친구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에게 '밥'은 무엇인지 물었다.

"밥이 없으면 밥밖에 생각할 수 없잖아요. 밥이 있어야 다른 생각이 가능하죠. 그렇기 때문에 밥이 없다는 건 삶을 고착시키고 그 너머를 꿈꿀 수 없다는 뜻이에요. 밥은 '오늘'이 아닌 '내일'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힘 같은 게 아닐까요?"

다소 한가해진 오후, 지난 6월 동안 희망식당을 통해 모인 수익금을 해고노동자와 장기투쟁 사업장에게 전달했다. 전북고속버스, 풍산마이크로텍, 포레시아, 국민체육진흥공단의 노동자들에게 각 100만 원씩 전달됐다. 희망식당은 지난달에도 그동안의 수익금을 모아 쌍용자동차, 재능교육, 코오롱, 콜트·콜텍의 정리해고자들에게 총 600만 원을 지원했다.

[82쿡닷컴] "MBC, 어떤 밥을 먹느냐가 문제"

150일 넘게 파업중인 MBC노조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주부요리정보 사이트 '82쿡(82cook.com) 회원들이 2일 오전 여의도 MBC앞에서'마봉춘(MBC)을 위한 삼계탕 밥차 응원' 행사를 열었다. 정영하 MBC노조 위원장이 '82쿡' 회원이 건네는 전복과 인삼이 듬뿍 들어간 삼계탕을 받아들고 있다.
 150일 넘게 파업중인 MBC노조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주부요리정보 사이트 '82쿡(82cook.com) 회원들이 2일 오전 여의도 MBC앞에서'마봉춘(MBC)을 위한 삼계탕 밥차 응원' 행사를 열었다. 정영하 MBC노조 위원장이 '82쿡' 회원이 건네는 전복과 인삼이 듬뿍 들어간 삼계탕을 받아들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150일 넘게 파업중인 MBC노조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주부요리정보 사이트 '82쿡(82cook.com) 회원들이 2일 오전 여의도 MBC앞에서'마봉춘(MBC)을 위한 삼계탕 밥차 응원' 행사를 열었다. 전복과 인삼이 듬뿍 담긴 삼계탕을 받기 위해 MBC노조원들이 밥차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다.
 150일 넘게 파업중인 MBC노조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주부요리정보 사이트 '82쿡(82cook.com) 회원들이 2일 오전 여의도 MBC앞에서'마봉춘(MBC)을 위한 삼계탕 밥차 응원' 행사를 열었다. 전복과 인삼이 듬뿍 담긴 삼계탕을 받기 위해 MBC노조원들이 밥차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통장에 월급이 끊긴 지 5개월째. "그래도 우리에게는 마이너스 통장이 있다"고 외치며 처절하게 싸움을 이어가는 MBC노조 조합원들이 닭을 한 마리씩 들었다. 하얀 속살을 드러낸 닭이 요염하게 다리를 꼬고 드러누운 삼계탕이다. 무려 전복까지 들어간 보양식이다. 200명 가까운 조합원들이 긴 줄을 섰다.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MBC 남문에는 복날도 아닌데 때 이른 삼계탕 파티가 열렸다. 인터넷 요리 커뮤니티 '82쿡닷컴'(www.82cook.com) 회원들이 '공정방송 사수'를 외치며 150일 넘게 파업 중인 MBC노조를 위해 마련한 자리다. 이들은 지난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때부터 사회 참여를 활발히 해왔다.

이날 회원 30여 명은 뙤약볕에 흘러내리는 땀을 수건으로 훔치며 척척 음식을 준비했다. 200인분을 준비하다 보니 방송 촬영에 많이 쓰는 '밥차'를 이용해야 했다. 밥차에서 펄펄 끓은 삼계탕을 한 사람이 담으면 다른 사람이 김치와 고추무침 등 반찬을 먹음직스럽게 담은 접시를 건냈다. 떡과 수박, 케이크 같은 후식도 푸짐하게 마련됐다.

이날 행사는 사이트 회원 가운데 '발상의 전환'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강보라(32)씨가 제안했다. 장기간 파업에 고생하는 조합원들에게 밥 한 끼 먹이자고 했더니 2700만 원이 모였다. 200인분의 삼계탕을 준비하고도 남는 돈이다. 강씨는 "조합원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요리사이트니 밥 한 끼 먹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날도 무더워지는데 기운 내라는 의미로 삼계탕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그에게도 '밥'은 무엇인지 물었다.

"밥은 생명이죠. 또 어떤 밥을 먹을 거냐는 의미도 있어요. 굶주릴지언정 쪽팔리지는 말아야 한다. 시청자에게, 우리 아이에게 떳떳한 밥을 먹어야죠. 파업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권에 빌붙어 맛있기만 한 밥을 먹는 게 과연 정의를 지키고 정신을 살찌우는 일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삼계탕을 받아 든 정영하 MBC 노조위원장은 "밥은 노동에 아주 중요한 문제이자 노동의 이유"라며 "특히 MBC는 공정방송이 제1의 노동조건인데, 그게 안 된다면 밥을 먹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파업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시민들이 주는 밥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한 밥이자 공정방송을 위해 MBC 구성원들이 먹어야 하는 밥"이라고 강조했다.

[밥셔틀] "일하고 집에 들어가 밥을 먹는 일상이 없다"

4일 오후 쌍용차 희생자들의 분향소가 차려진 대한문 앞 천막에서 트위터 아이디 '토맘'을 비롯한 '밥셔틀'들이 가져온 밥을 쌍차 조합원들과 다른 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이 나눠먹고 있다.
 4일 오후 쌍용차 희생자들의 분향소가 차려진 대한문 앞 천막에서 트위터 아이디 '토맘'을 비롯한 '밥셔틀'들이 가져온 밥을 쌍차 조합원들과 다른 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이 나눠먹고 있다.
ⓒ 최지용

관련사진보기


5일 삼계탕을 준비해온 쌍용차 '밥셔틀' 중 1인.
 5일 삼계탕을 준비해온 쌍용차 '밥셔틀' 중 1인.
ⓒ 최지용

관련사진보기


덕수궁 대한문 앞에 쌍용자동차 분향소로 매주 한 번 밥을 가져오는 트위터 아이디 '토맘(@tom****)'은 8개월 된 아이와 함께 있었다. 한참 엄마를 찾고 칭얼거릴 때지만 아이는 번잡한 천막에서도 의젓했다. 한쪽에서는 삼계탕이 끓고 있고, 엄마는 아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걸 보니 마치 한가족이 모여 있는 집 같았다.

4일 오후, 점심시간을 지나서야 분향소를 방문했다. 지난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 이후 세상을 떠난 해고노동자와 그의 가족 22명을 추모하는 이곳이 차려진 지도 100일이 다 돼간다. 처음에는 두 배로 큰 것으로 바뀌었고, 그 옆에 또 그만한 천막이 하나 더 차려졌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암흑 같은 뉘앙스 때문에 어두웠던 분위기도 어느새 달라졌다. 여전히 영정 앞에 초가 타고 있었지만 길에는 푸른 화분이 놓였고 곳곳에서 웃음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분향소가 이렇게 바뀐 데에는 '밥셔틀(shuttle)'의 몫이 컸다. 말 그대로 집에서 직접 지은 '집밥'을 가져오니 밖에서 사 먹는 음식과는 비교할 수 없다. 맛을 떠나 '집'이 주는 애틋함이 '밥'과 더해져 사람들을 웃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평택에 자신들의 집을 떠나 서울 한복판에서 객지생활을 하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에게 그것은 무엇보다 큰 에너지가 됐다.

'토맘'이 밥셔틀을 자청하고 나선 건 지난 4월. 트위터를 통해 세상일에 관심이 높아진 그는 "쌍용차 노동자들이 남긴 '빵을 먹는데 경찰들이 비웃는다'는 트위터를 보고 화가 나 참을 수 없었다"며 "그래서 고기를 먹여야겠다, 집에서 밥을 해가야겠다고 생각한 게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밥은 무엇인지 물으니 "일상"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저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못하겠어요. 밥은 일상이죠. 그것도 집에서 밥을 먹을 때 할 수 있는 말 아닐까요? 일하고 집에 돌아와 밥을 먹는 일상이 무너져 있어요. 여기 쌍용차 조합원들은 대부분 집을 나와 밖에서 오래 생활하고 있잖아요. 집에 계신 부인들이 얼마나 밥을 해 먹이고 싶겠어요. 제가 조금이나마 대신하려는 거죠."

쌍용차 분향소의 밥셔틀은 '토맘'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다. 그가 처음 밥을 들고 온 후 많은 조력자들이 생겼다. 이날도 밥상 옆에 자리 잡고 웃음과 수다가 끊이지 않았다. 3개월 동안 같이 밥을 챙기며 가까워진 모양이다. 이들은 지난주 성수동에 있는 'K2코리아' 공장에도 다녀왔다. 물론 밥을 한가득 싸들고 말이다. K2코리아는 최근 제조공장으로 해외로 이전하면서 수십 년간 일해 온 노동자 93명을 해고했다.

'토맘'은 다른 투쟁현장에 가본 소감을 묻는 질문에 "쌍용차는 이제 정말 많이 알려져서 투쟁사업장 중에는 사실 메이저"라며 "그곳은 정말 소외돼 있었다. 그래도 기분이 정말 좋았던 건 그분들이 너무너무 반겨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태그:#쌍용자동차, #MBC, #희망식당, #밥, #하정우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6,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