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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하나 없앤다고 학벌사회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학벌사회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단골안주처럼 서울대 존폐 논쟁이 도마에 오르는 것은 서울대가 학벌사회의 '상징'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사회에서 학벌 문제는 소득과 지위의 면에서 분배의 문제입니다. 만약 대졸과 고졸 이하의 소득 격차가 극심하기 않고 실력에 따라 정당하게 대우 받는 사회라면, 기를 쓰고 대학교 졸업장이라는 간판 자본을 딸 이유가 없겠죠.

대부분의 대학교가 취업양성소로 기능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유발시키는 현상의 밑바탕에는 학벌사회가 있습니다. 학벌사회의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대학이며 이 대학의 정점에 있는 것이 서울대입니다. 따라서 대학을 근본적으로 개혁시키려면 우선 서울대 문제를 '상징'적으로 지적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만약 '상징'을 '상징'으로 해석하지 않은 채 '사실'로 받아들이고 논쟁의 불씨를 지핀다면 학벌사회에 관한 보다 합리적인 공론장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마치 불교의 윤회설에서 욕심 많은 사람은 돼지로 환생한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상징적 의미로 '해석'할 것인지와 같은 맥락이죠.

욕심 많은 사람이 돼지로 태어난다는 것을 '사실'로 수용하느냐, 아니면 돼지처럼 욕심 부리며 살지 말아야 한다는 상징적 의미로 해석하느냐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하지만, '상징'과 '사실'의 문제를 혼동한다면 합리적 논쟁이 조성되기 힘들어집니다. 이러한 혼동은 학벌사회 문제를, 마치 '종북주사파' 논란처럼 감정적 화염에 휩싸인 채, 술안주 문제 정도로 전락시킵니다. 이런 논쟁은 위험합니다. 술 다 마시면 안주타령은 끝나는 것처럼.

'상징'과 '사실'의 혼동은 마치 보라는 '달'(학벌사회)은 쳐다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서울대)만 보는 격입니다. 국공립대 통합안 및 지역 거점대학 육성는 학벌사회의 점진적 해체를 위한 첫단추입니다. 최근 민주당의 국공립대 통합 공약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학벌사회의 폐해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키기 위한 방편에 불과합니다. 학벌사회는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한국사회의 총체적 문제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학벌사회는 우리 사회의 권위적 위계 구조를 직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이점과 관련하여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서울대 출신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겁니다. 서울대 안에서도 위계와 서열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울대생들이 상대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총체적으로 보면 서울대생들도 일정 정도 피해의식에 젖어 있음을 간과할 수 없겠죠. 분명 질적 차이가 있겠지만 성차별적 사회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억압적인 구조인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자기 노력의 결과에 따라 정당한 분배가 필요한 건 분명합니다. 문제는 분배 과정에서 실력 및 노력과는 상관없이 불공정하고 부당하게 '학벌' 딱지가 개입하는 경우입니다. '학력'의 차이에 따른 분배의 차이, 즉 소득의 양극화가 이미 우리 사회의 큰 문제임은 물론이거니와, '학벌'은 지위의 독과점이란 면에서 한국사회의 관념을 지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학벌은 후천적 신분제도

한국사회에서 학벌은 마치 '후천적 신분'(김상봉, <학벌사회>, 한길사)과 같아서 한 번 결정되면 되돌리기 힘듭니다. 서양사회가 최종 학력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반면, 우리 사회는 최초 학력으로 한 사람의 능력을 예단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자기 한계를 극복하는 사회적 과정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태생적 환경 토대를 중요시하는 성격이 짙은 거죠.

간혹 자신의 열악한 환경을 의지와 노력으로 극복한 극소수의 사람이 영웅시 돼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건 모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하는 일종의 대중적 기만에 불과합니다. 그러다 보니 잘난 사람 혹은 잘난 척하는 사람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사회에 만연하게 됩니다. 이런 시기와 질투의 이면에는 극심한 패배감과 좌절감이 숨어있습니다. 복합적인 요인이 물론 있겠지만 '타블로 죽이기' 현상에도 일정 정도 이러한 집단적 아픔이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더욱 심화되고 있는 소득과 학력의 대물림 현상은, 소득의 양극화 문제뿐만 아니라, 지위의 양극화가 고착될 수 있다는 면에서 퇴행적 현상입니다.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려운 현실은 말할 것도 없고, 아예 계층 간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심각한 문제는, 소득 면에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분배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지위 면에서도 노동자로서 자부심을 갖는 건강한 문화가 형성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계층 이동의 사다리에서 자기 아래에 있는 약자들은 발로 차고, 자기 위에 있는 강자에게는 '자기 동일시'를 통해 생존을 꾀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학벌을 통한 서열 문화와 너무나도 닮아있죠. 함께 공존하는 삶이 아닌,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도 여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를 짓밟을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교육적 차원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긴 안목을 가지고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쳐 결국 정치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번 민주당의 국공립대 통합안은 대선을 앞 둔 시점에서 정치인이라면 반드시 제기해야 하는 온당한 문제 제기인 것입다.


태그:#서울대, #학벌사회, #학벌구조, #학력, #학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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