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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한 마디 했다. 평소 '수첩공주'라 불려온 그녀. 사실 '수첩공주'라는 그녀의 별명은 양가성을 갖는다. "자신의 수첩에 미리 적어둔 메모의 수준을 넘어 발언하지 못한다는 조소"(손석춘, <박근혜의 거울>, 5쪽)가 어린 시선도 있지만, "수첩에 적고 그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라며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수첩공주'라 명명한 그녀의 '순발력'을 보면서 나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그녀의 수첩에서 나온 한마디는 이렇다.

"기본적인 국가관을 의심받고 있고 국민들도 불안하게 느끼는 이런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요즘 그녀의 발언에는 부쩍 무게감이 실린다. 그녀의 말에 우리 사회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모두 잘 알 터이다. 200일이 채 남지 않은 대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대통령으로 가는 길에 그녀가 있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그녀가 말하는 바로 이 말, '국가관'이라는 말의 뿌리를 톺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너무 오래전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으나, 자꾸만 '망각'의 강으로 사라지는 그 기억들을 되살려보자.

1980년 5월, 그들이 말한 국가관

1980년 9월 11일 상오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대법정. 검찰관 정기용 중령의 '김대중 피고인'에 대한 사형 구형의 논고를 들어보자.

"국가 존망의 위기마저 외면한 채 뚜렷한 국가관이나 정치적 윤리도 없이 자신의 집권욕을 채우기 위하여서는 반한 용공분자들과도 서슴없이 제휴하고......"

피고인 김대중의 '국가관'을 거론하고 있다. "뚜렷한 국가관"도 없는 사람이 '집권욕'을 채우기 위해 '내란 음모'를 하였으므로 사형에 처함이 마땅하다는 논리다. 그러나 국가관이 뚜렷하지 못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던, '선동, 권모술수로 얼룩진 위선의 화신'이었던(경향신문, 1980. 9. 11.자, 3면) 김대중은 17년 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20년 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김대중의 '국가관'만 문제가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역사의 시계를 뒤로 돌려, 1996년 1월 24일자 신문을 함께 읽어보자. 1980년 9월의 육군본부 계엄군법회의 대법정에 피고인들을 세웠던 바로 그들이 이제 '피고인'이 되어 돌아왔다. 그들을 법정에 세운 공소장은 이러하다.

"피고인 전두환, 같은 노태우는 공모하여 피고인 노태우가 5월 18일 16시경 수경사 기밀실에서 열린 계엄협의회에서 참석자들에게 전국비상계엄 확대조치의 배경 및 계엄업무 시행지침을 하달하면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세 정치지도자는 국가관이 부족하여 사회혼란을 야기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정치인을 척결하여 새로운 정치질서를 정립하여야 한다고 훈시하고......" (동아일보 1996. 1. 24. 27면)

1980년 5월 17일, 전·노가 중심이 된 신군부세력이 쿠데타의 명분으로 들고 나온 논리는 바로 '세 정치 지도자의 국가관 부족'이었다. 52년 전 '구국의 결단 5·16'을 지지하는 육사생도들의 시가행진을 주동했던 사람, 국가관이 부족한 정치인들은 '척결'되어야 한다는, 그리하여 "새로운 정치질서를 정립"해야 한다는, 우리들의 '국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그 알량한 '국가관'이라는 논리로 더럽혔던 '그들'이 최근 다시 뭉쳤다 한다. 2012년 6월 8일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단상에 선, 아 위대한 그들, 국가관이 투철한 그들에게 영광 있으라!

그녀의 아버지가 가장 많이 한 말, 투철한 국가관

박근혜, 그녀가 청와대 공식행사에 참석한 것은 1974년 9월 19일 오전에 있었던 아시아경기대회 선수단의 청와대 예방 때였다(동아일보 1974. 9. 19. 1면). 1974년 8월 15일의 '비극' 이후 그녀는 '영애'에서 '퍼스트레이디'가 된 것이다. 이후 그녀는 '구국여성봉사단'(동아일보 1976. 4. 30. 2면), '새마음봉사단' 총재(경향신문 1979. 5. 2. 7면)의 직함과 함께 '국익 최우선'이라는 정치신념을 가진 아버지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보게 된다.

사실 '국가관'이라는 말을 가장 애용한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 박정희였다. 박정희의 국가관 발언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때부터 시작된다. 이후 박정희의 어록에서 부쩍 국가관이라는 말이 많아지는 것은 1972년 유신 이후의 일이다. 1973년 이후에는 그야말로 정점을 이룬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투철한 국가관' 뒤에 '유신 과업의 완성'이라는 말이 항상 따라붙었다는 사실. 여기서는 "박의장 판검사에 경고각서"라는 제목의 1962년 5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만을 살펴보자.

박정희 최고의장은 "법관은 스스로 현실에 입각한 확고한 국가관을 가지고 애국심을 발휘하여 소신 있는 법의 운용을 기하라"고 지시하였다. (동아일보 1962. 5. 15. 1면)

'5·16 제1주년'을 맞아 박정희가 대법원장과 검찰총장, 그리고 전국 법관 및 검사들에게 보냈다는 '지시각서 제5호'에는 '확고한 국가관'을 가지고 법을 운용하라는 박정희의 경고가 담겨 있다. 그래서일까. 1975년 4월 8일 대한민국 대법원은 인혁당 사건 피고인 8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고, 불과 18시간 만에 8명 전원에 대해 사형이 집행된다.

최근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대법원 판결 선고 8시간 전인 새벽 3시에 대법원의 사형선고 통지서가 이미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에 접수되었고, 서울구치소에 보낸 형집행지휘서 접수인에는 4월 8일을 9일로 고친 흔적이 역연하게 드러나 있었다"(한승헌,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 171쪽)고 한다. 이 기가 막히는 '재판 놀음'에 가담한 사람들, 그들은 박정희의 경고대로 '확고한 국가관'을 가지고 있던 법관과 검찰관들이었나?

2007년 1월 23일 대법원은 32년 만에 인혁당사건 피고인 8명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한다. 한 인간의 죽음 앞에는 누구나 머리를 숙이는 법이다. 더구나 그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라 국가폭력의 막장인 '사법살인'이라면, 누구나 그 8명의 죽음 앞에 사죄해야 한다. 사죄가 아니라할지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야 하는 법이다. 일찍이 김진숙은 '박근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관도 길어지면 민폐'라 했다.

내 생각에는 '침묵이 길어지는 것도 민폐'가 확실하다. 아버지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딸에게 묻는 것은 '연좌제'가 아니냐고, 그녀는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의 입장이 아버지의 '잘못'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녀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가 그와 같다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연좌제' 여부를 논할 전제 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셈이니까. 나는 궁금하다. 그녀의 침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녀가 생각하는 '국가'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대전충남인권연대 뉴스레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대전충남인권연대의 뉴스레터의 필진 좌세준 변호사가 썼습니다.



태그:#박근혜, #박정희, #국가관, #인혁당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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