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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언니 내 도시락~"

"체육복은 어디 갔어?"

"내 교복은 왜 빨지 않은 거야?"

 

동생들의 연이은 소리에 나도 한마디 합니다.

 

"오늘 납부금 가져가야 하는데 엄마는 왜 돈도 주지 않고 밭에 나갔어? 언니가 엄마한테 가서 학교 돈 가져가야 한다고 말 좀 해줄래? 오늘도 안 가져가면 교무실로 불려 가야 한단 말이야. 이젠 창피해서 학교 가기 싫어..."

 

"너 무슨 잘못을 한 거야?"하며 지나치던 선생님들이 때리는 군밤을 맞거나 볼을 꼬집힐 생각을 하면 부끄럽기도 하지만 자존심이 상해 학교 가는 게 죽을 맛이었지요.

 

이른 새벽 일터로 나가시는 부모님을 만날 수가 없어서 각종 납부금을 제때에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에 아침이면 만만한 언니를 괴롭히곤 했었죠. 겨우 3살 많은 언니 역시 마찬가지 처지인데 언니가 해결사라도 된 듯 마구 다그치며 말입니다. 철없고 고집불통인 동생들 때문에 큰 언니는 늘 부모님께 곤란한 이야기를 해야 했고 야단도 많이 맞았습니다. 위로 오빠 둘이 있었지만 무뚝뚝하여 왠지 무섭고 정이 가질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집은 고만고만한 형제들이 3남 6여. 모두 합하면 아홉입니다. 아침 등교시간이면 언제나 전쟁터였습니다. 자식들은 점점 늘어나고 농촌에서 마땅한 소득이 없었던 부모님은 뭐든 수입이 될 만한 일은 닥치는 대로 하셨지요. 묵묵히 일을 해야 자식들을 가르치고 먹일 수 있다는 일념으로 해 뜨기 전 어둑어둑할 때 논밭으로 나가 해가 떨어지면 집으로 들어오시곤 했답니다.

 

고된 일과의 연속이었지만 주무시기 전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는 이랬습니다.

 

"아이고...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들~ 올망졸망한 자식들을 보면 힘이 넘친당게, 조금만 더 고생합시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밤나무집이라고 불릴 만큼 밤나무 밭이 많았습니다. 매해 가을이면 형제들 모두 밤나무 수확에 동원돼야 했습니다. 밤나무 가시를 발로 밟고 나뭇가지로 비틀어 가시 속에 꽁꽁 박힌 밤알을 꺼내는 게 우리들의 일과였습니다.

 

가시에 찔리며 밤나무를 까면 어머니는 손수레에 실어 시장에 나가 팔아 먹을 것 입을 것을 사 오셨습니다. 서로 밤나무에서 밤을 누가 많이 따는지 시합도 하곤 했습니다. 이 무렵에도 사진 담당은 저였으니 아마도 이때부터 사진에 관심이 많았었나 봅니다. 

 

축 쳐진 어깨를 드리우고 쓸쓸하게 담배만 피우시던 아버지

 

당시 시골 친구들은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일터를 찾아 도시로 나가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해야 사회에 나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던 부모님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답니다. 물론 형제 중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 받아 가면서 학교를 다녀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형제도 있었지요.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사고치는 형제도 있었고요.

 

학교는 뒷전이고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했던 아들이 학교는 가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가출한 날, 밤새 잠을 못 이루시고 담배를 피우시며 고뇌하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먹먹했던 적도 있습니다.

 

며칠 후 집으로 돌아온 자식을 보면서 안도의 숨을 쉬시더니 마당에 있던 작대기를 들고 집 밖으로 내쫓으시며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마음에 없던 말씀을 하시던 아버지.

 

29년 전 제가 결혼을 한 첫해 아버지의 회갑잔치가 있었고 마을 사람들을 모두 불러 동네잔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오빠가 아버지를 업고 둘째 오빠는 어머니를 업고 마당을 돌며 춤을 추었고 나머지 일곱 형제들은 노래를 불러 드렸던 추억도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동네 사람들은 "자식 많이 낳은 보람이 있당게, 참말로 좋아 보이는구만이라구"라고 했습니다.

 

작은 동산에서 술과 음식을 나누며 하루 종일 잔치를 했죠. 동네 사람들도 그날만큼은 하던 일을 멈추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어머니의 18번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가 마이크를 통해 온 동네에 울려 펴졌습니다.

 

흑백 TV가 나오던 시절, 권투중계를 유난히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경기에 열중한 나머지 주먹을 꼭 쥐고 선수처럼 손을 뻗기도 했습니다. 심장이 약해 경기를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할 거면 TV속으로 들어가라고 어깃장을 놓으셨던 어머니 모습도 생생합니다. 서로 취향이 달랐지만, 금실이 좋았던 부모님은 동네서 소문난 잉꼬부부였습니다. 덕분에 형제가 많지요.

 

아홉 남매가 모두 출가하여 자식을 낳다 보니 이제는 35명이나 되는 대가족이 됐습니다. 집안 행사가 있을 때면 어머니의 목청을 닮은 형제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담장을 넘기곤 합니다. 이웃 사람들은 시끄럽다면서도 부러운 시선으로 우리 집을 다녀가곤 할 정도랍니다.

 

형제들이 모이면 운동경기도 가능한데 한번은 족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남녀 구분하지 않고 편을 나누어 시합을 했습니다. 형제가 여럿이다 보니 은연중 이겨야 한다는 승부욕이 자리잡았나 봅니다.

 

이날 경기에 참여했던 남편은 혈기 왕성한 처남과 처제, 제부들과 게임을 하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허리를 다쳐 보름 동안 병원 신세를 진 적도 있답니다.

 

대부분 형제들이 서울이나 근교에서 살고 있는데 어머니께서는 자식들 보러 오실 때면 농사를 지어 수확한 것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오십니다. 그 바람에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가게를 하는 언니는 마중을 나가야 했고, 결혼을 해서도 고생한다며 불만을 토로하곤 했습니다. 이젠, 어머니께서 몸이 불편해 병원에 계시니 그럴 수도 없다며 옛날이 좋았다고 언니는 말합니다.

 

지난 7일은 아버지의 기일이었습니다. 직장 관계로 일곱째네만 빼고 대부분 참석했습니다. 제사가 끝난 후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아버지 젊으셨을 때는 고집이 대단하셨지? 콩밥을 무척 좋아하셨는데 한번은 어머니가 콩을 넣지 않고 밥을 해서 드리자 밥상을 대문 앞에 내놓으시며 큰소리로 '동네 사람들 여기 와서 보시오. 내가 좋아하는 콩밥도 안 해 주는 여편네 얼굴 좀 보시오. 구경 좀 하러 오랑 게요'라고 하셨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옛말도 사실이지만, 그 많은 가지들 아래에 가족이라는 포근한 그늘을 만들고 서로를 사랑하는 우리들. 하늘나라에서 아버지는 그날 우리의 담소도 보고 계셨죠?


태그:#회갑, #가족사진, #추억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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