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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말, '비키니 데이' 참석 때문에 일본 도쿄를 방문했다. 비키니 데이는 1954년 3월 1일 태평양 비키니섬에서 실시된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 때문에 죽은 일본인 어부 수십 명을 기리는 날이다. 이 일은 당시 일본 반핵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공항에 도착해 도쿄 도심으로 향하던 시간대는 오후 8시. 도시가 이전보다 어두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본 활동가들에 물어보니 "후쿠시마 참사 이후 절전이 생활화돼 그렇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금 일본은 역사적 실험을 목전에 두고 있다. '핵발전 없는 여름나기'가 바로 그것이다. 5월 22일 현재 54기의 일본 원전은 모두 '운전 정지' 상태에 있는데 여름이 다가오면서 원전 재가동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5월 중순 "최종 결정을 내리는 데 지도력을 발휘할 것"이라며 "결정 시점이 임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결단의 시점'이란 후쿠이 현 원전 3, 4호기를 비롯한 일부 원전을 재가동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정작 후쿠이 현의 니시카와 이세이 지사의 반응은 냉담하다. 지역 정부와 공동체의 찬성 없이는 원전 재가동이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해당 지방자치단체장의 승인 없이는 원전을 가동할 수 없다. 일본 국민의 전반적인 여론 역시 원전 재가동에 부정적이다. 조금 불편해지더라도 에너지를 아껴 쓰면, 원전을 재가동하지 않더라도 올여름 전력 대란을 피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본이 실제로 '핵 발전 없는 여름나기'에 돌입할 지, 아니면 '원전 마피아'를 비롯한 일각의 주장처럼 원전 없는 여름이 전력 대란으로 이어질 지는 두고 볼 일이다.

탈원전 전도사로 변한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

이명박 대통령(가운데),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왼쪽)와 원자바오 중국 총리(오른쪽). 지난 2011년 5월 21일 오후 일본 미야기현 아즈마 종합운동공원내 실내체육관에서 이 지역 농산물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오이를 시식하고 있는 모습
 이명박 대통령(가운데),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왼쪽)와 원자바오 중국 총리(오른쪽). 지난 2011년 5월 21일 오후 일본 미야기현 아즈마 종합운동공원내 실내체육관에서 이 지역 농산물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오이를 시식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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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핵발전 없는 여름나기'는 단순히 일본만의 실험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 전망된다. 후쿠시마 참사가 '원전 르네상스'를 향해 치닫던 인류 사회에 경종을 울린 것처럼, 일본이 탈원전 시험을 성공적으로 치러낸다면 그 파장은 또다시 지구촌 전체로 퍼져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본식 모델은 후쿠시마 참사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야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후쿠시마 사태 당시 총리였던 간 나오토는 2012년 2월 17일 한 언론을 통해 "사고 발생 1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도 수천만 명의 도쿄 주민들이 피난을 떠나고,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환영에 시달린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나는 가장 안전한 길은 원전에 의존해서는 안 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에 있고,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도달했다"고 역설했다. 후쿠시마 참사를 겪으면서 '탈원전 전도사'로 변신한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3.11 후쿠시마 재앙을 겪은 뒤 생각을 바꿨습니다. 우리는 도쿄를 포함해 수도권에서 살지 못하고 피난을 가야 할 수도 있는 상황에 마주했습니다. 상황이 그 정도까지 가면 국민들이 고난을 겪을 뿐 아니라 일본이라는 나라의 존재 자체가 위험에 빠질 것입니다."

'인간 윤리'로 원전을 거부한 독일

체르노빌로 사고로 인한 방사능 오염 지도.
 체르노빌로 사고로 인한 방사능 오염 지도.
ⓒ UN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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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중순, 독일 베를린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사흘이라는 짧은 기간 제3제국의 심장부로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기도 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동서 냉전의 상징이었으며, 이제는 통일 독일의 수도로 유럽의 중심 도시로 거듭나려는 베를린의 파란만장한 변천사를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다.

내가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독일의 '탈원전 모델'이다. 일본의 탈원전 프로세스는 후쿠시마 대재앙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본격화된 것이라면, 독일의 탈원전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참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일궈낸 '자발적 쾌거'다.

독일은 1980년대부터 본격화된 반핵 운동과 녹색당의 성장에 힘입어 2002년 탈원전을 선언했다. 독일에서도 체르노빌 사태에 의한 피해가 속출하자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연합정부는 원자력법을 개정해 2021~2022년까지 19개의 핵발전소를 모두 폐쇄키로 한 것이다.

그러나 친 원전파인 메르켈 정부가 등장하면서 탈원전 프로세스는 제동이 걸리는 듯했다. 2010년 이전 정부의 합의를 뒤집고 핵발전소의 수명을 연장하기로 했다. 그러나 메르켈의 원전 사랑도 후쿠시마 참사를 비껴가지 못했다.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원전 폐쇄'를 요구하자, 메르켈 정부는 '안전한 에너지 공급을 위한 윤리위원회'를 구성해 사회적 논의를 주도하게 했다. 결국, 2022년까지 모든 원전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을 존중키로 한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2011년 5월 30일을 "후쿠시마가 내 생각을 바꿨다, 우리에게 안전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며 탈핵을 선언했다.

주목할 것은 핵발전을 윤리의 측면에서 바라보고 또 이를 위해 '윤리위원회'의 상당수가 성직자와 윤리학자로 구성됐다는 점이다. 한국을 비롯한 원전 가동국 대부분의 원전 정책이 과학기술자와 관료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것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핵이라는 위험천만한 물질을 과학기술의 영역에 맡겨둘 것이 아니라 인간 윤리와 안전이라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영역에서 다뤄야 한다는 독일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2030년까지 원전 40기? 제정신 아니다

지난 2011년 3월 29일 서울 중구 명동거리에서 환경운동연합 여성위원회 회원들이 '핵으로부터 안전한 세상'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지난 2011년 3월 29일 서울 중구 명동거리에서 환경운동연합 여성위원회 회원들이 '핵으로부터 안전한 세상'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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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독일의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현실이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핵발전이라는 위험의 크기에 비해 우리 사회의 공론화 수준이나 문제 해결 수준이 너무 미약하기 때문이다. 현재 21기의 원전을 보유한 한국은 인구 및 면적당 원전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2024년에는 34기로, 2030년까지는 40기로 늘리겠다고 한다. 대를 이어 시한폭탄 돌리기를 하는 것이 아닌지 되물어봐야 할 상황이다.

지난 21일 환경운동연합과 일본 관서학원대학 박승준 부교수가 진행한 모의실험 결과가 나왔다. 고리 원전과 영광 원전에서 방사능 유출 사고가 발생할 경우, 최대 85만 명의 사망자와 628조 원의 경제적 피해가 나올 것이란다.

실험 조건이 비현실적이고 피해 규모도 과장된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지만, 체르노빌 사고로 사망자가 최대 100만 명으로 추정되고, 후쿠시마 참사 피해 비용이 100조 엔(약 1500조 원)에 달한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이 넘어갈 사안은 아니다. 그것이 인간의 실수에 의해서든, 자연재해나 기계의 오작동에 의해서든, 원전 사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한국이 가야할 길 보여준 서울시의 결정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2월 13일 '탈핵-에너지전환을 위한 도시선언 기념식 및 심포지엄'에 참석해 "2014년까지 에너지 절감과 재생에너지 생산을 통해 원전1기를 없애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2월 13일 '탈핵-에너지전환을 위한 도시선언 기념식 및 심포지엄'에 참석해 "2014년까지 에너지 절감과 재생에너지 생산을 통해 원전1기를 없애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 권승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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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을 폐쇄하면 대안이 무엇이냐는 반론도 많이 나온다. 그러나 사고 위험성 및 핵폐기물 처리 비용 등으로 원전 생산 단가는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반면, 태양열과 풍력 등 신재생 에너지의 생산 단가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재생 에너지가 원전보다 더 경제성이 있다는 것이 입증됐고, 독일은 신재생 에너지 분야를 핵심적인 경제성장 동력으로 삼고 있다.

21기의 원전을 하루아침에 모두 폐쇄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독일처럼 긴 시간을 두고 오래된 원전부터 점진적으로 폐쇄하고, 그 사이에 재생에너지 개발·생산을 집중 투자해 원전을 대체하자는 것이다. 또한, 앞으로 원전 신설보다 해체 사업이 더 유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원전 사업의 방향 전환도 검토해볼 만하다.

아울러 한국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이 독일이나 일본보다도 높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점에서 수요 관리 정책도 대단히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 지난 2월 서울시가 '원전 1기 줄이기' 실천의 일환으로 '쿨비즈'를 선언하고 나선 것은 작지만 의미 있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념 과잉의 한국 사회에서는 탈원전 주장조차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핵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독일의 우파 정권인 메르켈 정부가 탈원전 결단을 내렸듯이, 핵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실천이자 경제적 실용주의이며 인간에 대한 예의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제 우리도 원전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를 본격화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정욱식 기자는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를 맡고 있으며, 최근에 쓴 책으로 <핵의 세계사>가 있습니다.



태그:#핵 발전소, #일본, #독일, #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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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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