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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달고나.
 내가 일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달고나.
ⓒ 유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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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를 앞둔 저녁시간, 손님이 하나 둘씩 테이블을 채웠다. 주문이 들어왔고 불 위에 팬을 올리고 기름을 붓고 요리를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기름과 마늘이 타오르고 화이트와인을 뿌려 잡내를 날리고 삶은 면과 소스를 알맞게 뒤섞은 뒤 열심히 팬을 흔들었다.

그리고 접시 위에 멋드러지게 담아낸다. 이후 남은 건, 내가 만든 파스타 접시를 받아 한 입 떠먹은 손님의 행복한 표정을 살피는 일. 허나 지난 4월 11일, 이 날만은 내 시선이 손님의 표정이 아닌 가게 벽에 매단 TV의 아나운서 입에 무섭게 몰입돼 있었다.

정확히 오후 6시면, 19대 총선 투표의 종료를 알리며 동시에 출구조사결과가 발표된다. 정각 6시를 향해 초침이 흐를 때, 나는 끓고 있는 팬에조차 시선을 두지 않았다. 가게의 손님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출구조사 발표에 시선을 고정시키긴 마찬가지.

얼마나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던가, 그러나...

가게 모습.
 가게 모습.
ⓒ 유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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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카운트다운 10, 9, 8...

용산 참사, 4대강 파괴와 예산낭비, 한미FTA 날치기 통과, 붕괴된 대북정책, 천안함 미스터리, 물가 폭등과 줄줄이 터지는 각종 부정부패사건 등등. 이명박 정부와 간판을 바꾼 새누리당의 무능과 부패에 민심은 염증을 넘어 분노로 부글댔고 심판의 날이 오기만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던가?

페이스북과 트위터엔 이미 국회 권력은 물론 12월의 정권 교체까지 다 갈아치운 듯한 분위기였다. 새누리당과 현 정부는 비판이 아닌 야유와 조롱의 대상이 된 지 오래였다. 그곳의 여론만 보자면 진보신당이 원내 1당의 지위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 한 마디로 '응징'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래서 세상이 지금과 달라지기를, 그렇게 되리라 믿었던 운명의 시간, 3, 2, 1, 0.

순간 내 눈동자가 흔들렸다. 결과가 명확하게 시선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긴 건가? 진 건가? 잠시 혼란스러운 사이 '곳곳에서 박빙'이라는 자막이 커다랐게 떠올랐다.

가게에 일찌감치 모여든 친구들은 술을 마시며 개표방송을 지켜봤다. 출구조사에선 비록 박빙이긴 해도 결국 야당이 승리하리라 점치고 있었다. 특히 은평을의 천호선이 이재오를 꺾는 그야말로 파란을 예고하는 결과가 나오자 기대가 한껏 부풀기도 했다. 허나 기대도 잠시.

자정을 넘어 12일 새벽이 되면서 방송사의 개표방송도 시들해졌다. SBS는 채 새벽 1시가 되기 전에 방송을 종료해 버렸다. 더 두고 볼 필요도 없는 야당의 패배였다. 부산의 손수조는 문재인에 맞서다 낙선했지만 40%대의 득표로 기염을 토했고, 논문 표절 논란의 문대성과 성추행 논란의 김형태는 당선됐다.

막말 논란의 김용민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전사했고, 이정희는 일찌감치 후보직을 내려놨다. 문성근도 떨어졌고, 대구로 혈혈단신 들어간 김부겸도 떨어졌다. 다행히 노회찬은 비교적 여유있게, 심상정은 그야말로 턱걸이로 당선됐다. 그래도 가슴속엔 호수만한 구멍이 뚫렸고, 머릿속은 핵분열 같은 혼란이 멈추지 않았다.

새벽 2시가 안 된 비교적 '이른' 시간에 친구들과 헤어졌다. 가게 셔터를 내리고 앞에 종이 한 장을 붙였다.

'19대 총선 후유증으로 금일(12일)은 영업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멘붕(멘탈붕괴)'이었다. 마신 술도 술이지만 참담한 결과를 받아 든 정신으로 멀쩡히 요리를 하는 게 불가능하다 생각됐다. 집으로 향하며 혹시 연탄재가 없는지 두리번 거렸다.

술기운과 악몽 같은 기억이 뒤범벅된 새벽잠은 괴로웠다. 아침에 눈을 떴지만 텔레비전과 인터넷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시 가게로 나와 내린 셔터는 그대로 둔 채 대충 끼니를 때우고 뒷마당에 틈틈이 벌이던 봄맞이 녹화사업을 이어갔다. 화분에 흙을 채우고 분갈이 할 꽃과 새싹들을 옮기고 물을 줬다. 그렇게 하나씩 화분들을 정리해갔지만 마음은 여전히 엉망진창, 아수라장이었다.

내게 찾아온 '멘붕'... 애초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

일명 탕탕낙지라 불리는 산낙지회.
 일명 탕탕낙지라 불리는 산낙지회.
ⓒ 조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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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서 함께 일하는 친구가 말했다. "오늘 저녁은 정말 맛있는 거 먹자". 그 말에 당연히 동의했다. 그 어느 때보다 나를 위로할 아주 강한 무엇이 필요했고, 평소의 건전한 생활습관 상, 손에 닿는 건 마약이 아닌 음식이었다. 그래서 차를 몰고 먼 길을 달려 연안부두의 한 단골횟집에 도착했다.

상다리 부러지게 깔리는 접시들과 그 위에 꿈틀대는 온갖 산 것들. 어제에 이어 소주로 윤활질을 해가며 먹고 또 먹었다. 그리고 결과를 놓고 친구와 주거니 받거니 지난 사건들을 천천히 복기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떠든 후 우리는 결론을 이렇게 맺었다. 집을 부순 파도는 민주통합당의 '선거 전략 없음'과 '낡은 공천'이었고, 옷을 적신 빗줄기는 '김용민 파문'이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애초 기대를 품었던 내가 바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더 잘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좀 덜 못하는지를 놓고 경쟁을 벌인 선거였다고 한다면 나는 그 우스운 차이를 놓고 세상이 바뀌네 마네 흥분했기 때문이다. 지는 게 당연했고 어쩌면 그래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나를 비롯해 잠시나마 '멘붕'에 빠졌던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거기서 벗어났으리라. 그러나 야당들은 아직도 멘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위기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 경선 사태를 보고 있자니 다시 한숨이 나온다. 그래도 지난 번처럼 가게 문은 닫지 않으리라.

남은 대선이 이번 총선과 같은 결과로 되풀이 되는 건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갖고 있는 건 한 표뿐이다. 이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연말에 악몽을 겪지 않을 방법은 무엇일까? 상대 허점에 기대봤자, 얻을 건 하나도 없다.

지난 4월의 '멘붕'을 계기로 더 똑똑하고 강한 '선수'가 되기로 했다. 정치권의 그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서로 가슴에 구멍 내는 일 정말 못할 짓 아닌가.


태그:#19대 총선, #멘붕 극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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