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성훈 연세대 연구교수가 1950년 인천경찰서에서 작성한 '요시찰인명부'를 들어보이고 있다.
 한성훈 연세대 연구교수가 1950년 인천경찰서에서 작성한 '요시찰인명부'를 들어보이고 있다.
ⓒ 구영식

관련사진보기


여기 두 개의 문건이 있다. 하나는 1925년 조선총독부, 다른 하나는 1950년 인천경찰서에서 각각 작성한 '요시찰인명부'다. 두 개의 문건 사이에 25년의 시차가 있는데도 제목부터  비슷한 구석이 많다. 이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부터 시작된 민간인 사찰의 연속성을 잘 보여준다. 

지난달 28일 열린 '2012년 비판사회학회 춘계 학술대회'에서 '사찰국가의 인권침해와 시민사회의 식민화'라는 논문을 발표한 한성훈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교수는 2일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민간인 사찰은 대표적인 식민지 유산"이라며 "그 역사는 100년이 넘어간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왜 민간인 사찰에 발언하지 않나?"

'근대 이후 국가의 권력작용'에 관심을 기울여온 한 교수는 "오랫동안 민간인 사찰 관련 논문을 생각하고 있었다"며 논문을 쓰게 된 배경을 이렇게 말했다.

"지난 2010년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이 불거졌는데 아무도 논문을 쓰지 않았다. 민간인 사찰은 충분히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해야 할 사안이다. 민간인 사찰을 학문적으로 접근해서 그것이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규명해야 하는데도 그런 작업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지난 2011년 계간지 <역사비평> 봄호(94호)의 권두언으로 쓴 '민간인 김종익 사찰 건으로 본 이명박 정부' 정도의 글이 전부다. 이날 인터뷰에 동석했던 민간인 사찰 피해자 김종익(전 KB한마음 대표)씨는 이러한 현실을 두고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맘이 상했다"고 토로했다.

김씨는 "한 교수의 논문처럼 민간인 사찰의 근원이 어디에 있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연구해줘야 하는데 한국의 지식인들은 그런 작업을 하지 않았다"며 "내가 수년간 후원하고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던 역사문제연구소조차도 민간인 사찰 문제에 발언하지 않았다"고 진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에 한 교수는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지식인 집단이 김종익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 가운데 하나"라며 "민간인 사찰 사건을 (구조적인 문제가 아닌) 다분히 개인적인 문제로 보기 때문에 기자회견조차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공감을 나타냈다. 

한 교수의 논문은 일제강점기부터 최근의 국무총리실 불법 사찰까지 '민간인 사찰의 역사적 기원과 과정'을 되짚으며 그 의미를 분석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조선총독부에서 시작한 민간인 사찰은 미 군정기, 박정희·전두환 정권 등 군부권위주의 정권 시기를 거쳐 김영삼·김대중 정부 등 일부 민주파 정부에서도 이루어졌다. 사찰의 주체도 경찰에서 보안사(기무사의 전신)와 국정원(안기부의 후신), 총리실 등으로 점차 확대됐다.

현재까지도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지난 1981년 제정된 '공안사범관리규정'(대통령 훈령)이다. 신군부는 이 규정에 따라 '공안사범자료관리협의회'를 설치하고 광범위한 공안자료를 전산화하기 시작했다. 한 교수의 평가처럼 "사찰이 더욱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국가보안법 관련자들은 이 '공안사범관리규정'에 의해 전산으로 관리된다. 한 교수는 "최근에 불거진 기무사의 조선대 교수 사찰도 이 공안사범관리규정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경찰은 지난 2008년 촛불집회 시위 관련자 재판과정에서 공안사범관리자료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에 국가인권위는 지난 2009년 12월 법무부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공안사범관리규정'이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평등권을 침해하고 자기정보결정권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찰 주체가 총리실로 확대돼 대규모 인권침해 가능"

민간인 사찰 피해자 김종익씨와 한성훈 연구교수가 만났다.
 민간인 사찰 피해자 김종익씨와 한성훈 연구교수가 만났다.
ⓒ 구영식

관련사진보기


특히 지난 2010년에 이어 최근 다시 논란이 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은 이전 시기의 사찰과는 성격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 한 교수의 판단이다.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그 차이점 중 하나를 이렇게 정리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 공안사범 관리가 도덕성이 허약한 정권이 체제를 유지하고 사상범을 주로 통제·관리하기 위한 권력기관의 욕구였다면, 현재 밝혀지고 있는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은 이와는 다른 평범한 개인의 생활세계와 시민사회를 식민화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10쪽)

한 교수는 김종익씨가 그런 대표적인 경우라고 봤다. 그는 "사찰은 김종익씨 자체를 파편화하기도 하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는 생활세계, 시민사회도 무력화한다"며 "김씨가 관계를 맺은 지식인들조차 발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시민사회를 식민화시킨다"고 지적했다.

"길게는 지난 87년 이후, 짧게는 지난 97년 정권교체 이후에는 시민사회의 자율성, 시민권, 헌법적 가치들이 유지된다고 봤다. 국가의 권력과 시민사회의 긴장관계가 유지되어야 민주주의가 작동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사찰은 이러한 긴장관계가 작동하지 않았다."

김종익씨도 "그동안 민주정부 10년을 거치면서 시민권을 누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며 "그런데 지금은 87년 이전으로 퇴행했다"고 지적했다.

"큰 형님이 학교 교장이었다. 퇴직해서 교장모임에 나갔는데 사람들이 '조중동'에서 보도하는 것처럼 내 얘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형님이 울화가 생겨서 건강이 나빠졌다. 또 딸아이가 대학교 3학년인데 스페인 한 대학의 교환학생으로 가게 됐는데 내가 농담삼아 '거기서 좋은 남자친구 만나서 살라'고 했다. 유럽은 무지막지한 한국사회와 달리 최소한 개인을 존중하는 사회니까 그런 농담을 한 거다."

또한 한 교수는 민간인 사찰의 주체가 공직자 감찰업무를 맡고 있는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로 확대된 점에도 주목했다.

한 교수는 "지원관실은 공직자 비리를 조사하는 곳인데 평범한 개인까지 사찰했다"며 "사찰 주체가 경찰, 기무사, 국정원 등에서 총리실로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에 대규모 인권침해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논문에서도 이러한 점을 지적했다.

"이전의 사찰이 권력기관이 형식적이나마 '사상법'이니 '좌익'이라고 하는 것을 바탕으로 한 관리체계였다면, 이 정부는 정권을 비판하는 자 또는 요직에 있는 인사들의 공적, 사적 생활을 감시했다. 정치권, 경제계, 언론계 그리고 사이버상의 정권 비판자, 공기업, 노동계와 권력기관장까지 사찰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사찰은 고위직 인사자료와 정치적 반대자라고 하는 목적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10쪽)

특히 한 교수는 "옛날에는 경찰, 기무사, 국정원 등에서 총리실 등 국가기관을 사적으로 유용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청와대의 영포라인이 사찰을 기획하고 지원관실을 직접 조종했다"며 "국가기관이 사적으로 운용된 셈"이라고 주장했다.

"지원관실이 특정한 사건과 관계없는 보통사람들까지 사찰한 게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와대에서 기존 정보기관을 동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민간인을 사찰하기 위해) 정보기관을 동원할 경우가 불법이 되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이렇게 정보기관이 나서기에는 한계가 있어서 (공적 기관인) 지원관실이 (특정세력의) 비밀사조직처럼 운영된 것이다."

"국가가 사찰 피해자에게 공식 사과해야"

한 교수는 피해자 구제방안과 관련해 "국가가 공식적으로 불법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며 "그것은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고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김종익씨도 "민간인 사찰은 당사자만이 아니라 가족들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겪는다"며 "그런 점에서 국가가 공식 사과하는 것이 저와 가족들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공감을 나타냈다.

이어 한 교수는 "국회 차원에서 피해자 구제법을 제정해 보상할 수 있는 방안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국가기관의 권력행사를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도록 제도 장치를 마련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민주주의로 이행한 뒤에도 '어떤 정부(국가)여야 하는가?'는 여전 중요한 질문이다. 4대 권력기관(검찰·경찰·국정원·국세청)은 민주적으로 권력을 작동하거나 민주적 원리에 따라 운영된 적이 없다. 그래서 정치권력이 요구하는 대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4대 권력기관은 민주적으로 통제하거나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꿈이었다. 권력자가 권력을 휘두르지 않을 테니 민주적으로 권력행사를 하라는 것이었다."  

한 교수는 "민주정부로 이행되고 나서 (의문사위나 진실화해위 등을 통해) 과거 국가기관에 의한 민간인 피해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며 "이런 활동이 '우리 기관도 잘못한 것은 고쳐야겠구나' 하는 견제작용을 했다"고 말했다.


태그:#민간인 사찰 의혹, #한성훈, #김종익,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