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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살살 하세요. 사고나지 않게 조심, 또 조심. 아셨죠?"

9개월 된 아이를 등에 업은 채 사랑이(본명이 '이사랑'이다!)는 자뭇 진지한 얼굴로 신신당부를 했다. 누군가 이 장면을 본다면 의젓한 동생과 철없는 언니 사이로 생각할 테다. 사랑이와 나의 나이 차이가 겨우 아홉 살이니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엄연한 사제지간이다. 그럼에도 제자인 사랑이가 저렇게도 나를 걱정하는 이유는 사랑이를 만날 당시 나는 그야말로 초짜 교사였기 때문이다.

9년 전, 교직에 발을 디딘지 두 해째인 스물일곱에 나는 사랑이를 만났다. '선생님'이란 말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그때의 나는 참으로 어설펐다. 오죽하면 당시 별명이 '어리버리'였다. 밤새 수업 준비를 했어도 수업 시간이면 아이들의 질문에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기 일쑤였고, 출근길엔 '왕초보'라고 커다랗게 써붙인 작은 차로 사고를 내는 바람에 수업에 늦게 들어가는 일도 많았다(그러니 지금도 사랑이는 '사고 조심'을 당부하는 것이다).

수업이나 출퇴근만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생활과 함께 처음 시작한 경기도 양평에서의 독립생활은 너무도 버거웠다. 엄마가 깨워서 밥을 차려주던 호시절이 그리웠다. 아침 일찍 스스로 일어나 내 손으로 밥을 챙겨먹고 출근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아침이면 출근하기 바빴고 그래서 늘 아침을 못 먹어 1교시가 끝나면 매점으로 달려가 아이들 틈에서 사발면을 사먹곤 했다. 그런 나를 아이들은 재밌어 했고 얼마 못 가 '결식교사'라는 별명이 추가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쉬는 시간, 사랑이가 교무실 문을 빼꼼 열더니 나에게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질문할 것이 있는가 해서 따라나갔더니 사랑이는 나에게 웬 종이봉투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니?"
"김치예요. 선생님 저희 가르치러 여기 혼자 오셔서 식사도 잘 못 챙기고 그런다면서요. 어제 선생님 생각하며 제가 좀 담가봤어요."
"뭐? 니가 김치를 담가?"
"맛있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샘, 밥은 할 줄 아시죠? 앞으로는 이거 해서 아침밥 꼭 챙겨 드시고 학교 오셔야 해요."

말을 마치고 활짝 웃으며 교실로 뛰어간 사랑이의 뒤에서 나는 한참을 멍하게 서 있었다. 요리라곤 라면이나 김치볶음밥 정도밖에 할 줄 모르는 스물일곱의 나에게 열여덟의 제자가 직접 담근 것이라며 건넨 김치라니!

'어리버리 결식교사'에게 직접 담근 김치를 건넨 그 아이

졸업생 대표로 후배들의 '송사'에 '답사'를 하며 울먹이던 사랑이의 모습(왼쪽 눈 보이는 이).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 졸업식에서의 사랑이 졸업생 대표로 후배들의 '송사'에 '답사'를 하며 울먹이던 사랑이의 모습(왼쪽 눈 보이는 이).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 박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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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놀라운 얘기를 사랑이의 담임선생님께 전했을 때 담임선생님은 놀라긴커녕 한숨을 내쉬며 긴 얘기를 해주셨다.

"걔는 초등학교 때부터 살림을 도맡아 한 애예요. 김치 담그는 것쯤 걔한텐 일도 아니죠. 그뿐 아니에요. 걔가 야간자율학습을 안 하는 이유가 공부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일해야 해서 그래요. 학교 마치면 곧장 집으로 달려가 직접 경운기 몰면서 밭 갈고 농사짓는다고요. 그러면서도 공부는 또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얘기를 듣는 내내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내 손으로 등록금을 벌며 대학을 다녀야 했기에 나는 내가 꽤 고생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어도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공부만 해도 됐다. 또 대학 시절 과외 아르바이트를 서너 개 한 것이 고생이라 한다 해도, 집에서의 나는 여전히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엄마가 빨래한 옷을 입는 '행복한' 딸이었다.

그런데 사랑이는 그렇지 않았다. 두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미 모든 살림을 맡아야 했고, 좀더 커서는 몸이 편찮으신 아버지와 중학교를 자퇴한 뒤에도 여전히 사고만 치고 다니는 오빠를 대신해 농사일까지 해야 했던 거다.

사랑이의 성장 스토리는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을 넘어 부끄럽게 만들었다. 저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저렇게 훌륭하게 살아오는 아이 앞에서 내가 선생이랍시고 무슨 얘길 할 수 있는 것인지. 공부의 양이 아니라 인생의 깊이에 '선생'이란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나와 사랑이 사이의 사제관계는 바뀌어야 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은 그런 내 생각을 엿보기라도 했는지 다행스런 말을 덧붙이셨다.

"다행인 게 애가 겪은 게 많고 아팠던 게 많은 탓에 글을 참 잘 써요. 그냥 지가 살아온 얘기, 느낀 얘기 이런 걸 담아내기만 하면 그게 그렇게 감동인 거야. 또 경험과 생각의 깊이가 또래와 비교가 안 되니까 문학에 대한 이해도 아주 뛰어나요. 꿈이 국어교사인데, 딱인거죠. 국어선생 하면서 수필도 쓰고 소설도 쓰고 하면 쟤 참 잘할 거야."

나는 그때 "역경 속에서 피는 꽃이 가장 아름답다"는 영화 <뮬란>의 명대사가 떠올랐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도 않고 든든한 부모님이 지켜주고 있지도 못하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척박한 땅에서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며 사랑이가 피워낼 꽃은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다울 것 같았다.

혼자 농사지으며 공부한 사랑이, 취업한 회사 이름이...

사랑이 가득한 사랑이의 가족 사진. 사랑이는 이제 사랑받는 아내이자 며느리, 그리고 엄마가 되어 있었다.
▲ 사랑이의 아름다운 가족 사진 사랑이 가득한 사랑이의 가족 사진. 사랑이는 이제 사랑받는 아내이자 며느리, 그리고 엄마가 되어 있었다.
ⓒ 박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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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내 믿음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사랑이 앞에는 아직도 많은 역경이 남아 있었다. 원하는 대학의 인문학부에 합격을 하긴 했지만 대학에 합격한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몇 달 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럼에도 '정신을 못 차린' 오빠는 사고를 멈추지 않았다. 또 아버지가 남긴 빚 때문에 경제적인 고통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이는 지지 않았다. 특유의 밝음과 씩씩함으로 그 모든 것을 이겨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어 학사경고를 맞기도 했고, 그 덕에 교직 이수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그렇지만 사랑이는 다시 공부와 아르바이트에 최선을 다했고, 4학년 때는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 청소일과 홀서빙을 하며 영어 공부도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홀로 집안살림을 챙기고 농사를 짓던 그 힘으로 일을 하고 공부를 하며 척박한 현실에 절대로 지지 않던 사랑이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행복은 '취업'이었다. "선생님, 저 취업했어요!"라며 수화기 너머로 크게 소리치던 사랑이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전쟁터에까지 비유되는 취업난 속에서 사랑이는 졸업도 하기 전에 당당히 최종합격을 한 거였다.

그때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내 맘을 더욱 흔든 것은 사랑이가 취업했다는 회사 이름이었다. '오뚜기'라는 회사명을 듣는 순간, '아…' 하고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 어떤 괴로움에도 굴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서 온 사랑이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회사명이 어디 있을까!

더욱이 사랑이가 회사에서 처음 담당한 지역은 자신이 나고 자란 양평이었다. 자신이 지원한 것도 아니고 회사가 사랑이의 개인정보를 참고해 지정한 것도 아니었음에도, 당당히 취업해 고향으로 향할 수 있었으니, 그래서 돌아가신 부모님께 '절대로 쓰러지지 않고 오뚜기처럼 일어났음'을 보일 수 있었으니 이건 우연이라 할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랑이의 삶은 내 믿음을 증명하듯 너무도 아름답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사랑이는 입사 후 소개로 만난 사람과 결혼을 했는데, 남편은 그야말로 괜찮은 사람이었다. 대기업 연구원이라는 좋은 직업뿐 아니라 사랑이의 모든 것을 감싸주고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잘생겼다!).

게다가 외아들을 키우며 늘 딸이 갖고 싶었다던 시부모님은 사랑이를 며느리라기보다 딸로 아껴주는 분들이었다. 이제 더 이상 사랑이는 내 가슴을 아프게 하는 제자일 수 없었다. 당당한 커리어우먼이자 사랑받는 여자 그 자체였다.

'씩씩 바이러스' 뿌려대는 훌륭한 교사가 되기를...

나보다 먼저 아이 엄마가 된 제자가 9개월 된 딸을 목욕시키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
▲ 제 손으로 행복을 이뤄낸 제자 나보다 먼저 아이 엄마가 된 제자가 9개월 된 딸을 목욕시키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
ⓒ 박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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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감사하고 기쁜 것은 사랑이가 지난해에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했단 사실이었다. 문학 이해의 깊이가 남다르고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글을 쓰는, 그래서 국어교사가 꿈이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교직 이수의 기회를 놓친 사랑이였다. 그런데 교직에 계신 시부모님께서 학비를 대주실테니 이제라도 교육대학원에 가라고 격려해주셨고, 그 덕에 사랑이는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에 진학해 다시 교사의 꿈을 꿀 수 있게 된 거였다.

"만삭으로 학교 다녔지만 저 지난 학기 '올 A+'이었다고요. 선생님, 저 잘했죠?"

자랑스런 웃음을 웃는 사랑이에게 나는 "잘했어. 정말 잘했어"라고 끊임없이 말해주었다. 사실 중등 교사를 희망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평소 호의적이지 못한 교사다. 웬만하면 다른 길을 가라고 조언하는 것은 중등 임용고사 경쟁률이 무시무시하고 사립 중고등학교 취업은 공정하지 못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이에게만은 왜 힘든 길에 들어서려 하느냐고, 회사를 그만둔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없었다. 사랑이라면 이번에도 오뚝이처럼 역경을 견디고 당당하게 국어 교사로 설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리바리 초임 시절의 나에게 손수 담근 김치를 내밀었던 열여덟의 사랑이는 이미 '선생'의 자격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도 밝고 씩씩하게 살아온 사랑이는 좋은 교사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반드시 교사가 '되어야만' 하는 것 아닐까?

'왜 나만 힘들지? 왜 나만 이렇게 고통스럽지?' 하며 힘겨워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다독이며, 사랑이는 내 삶을 보라고, 내가 이겨냈듯 너도 이겨낼 수 있다고, 역경 속에서 피는 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사로서 사랑이만큼 적합한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나보다 먼저 아이 엄마가 된 나의 '어리버리 결식교사' 시절의 제자 사랑이. 그래도 내가 선생인데 제자의 집으로 찾아간 것은, 사랑이가 9개월 아이를 데리고 먼 거리를 움직일 수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사랑이가 사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탓도 컸다.

그리고 그날 나는, 화단과 사진들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사랑이의 집에서 사랑이가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모습을 보며 가슴 가득 행복함이 차올랐다.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강하고 씩씩하게 제 손으로 인생을 이뤄낸 제자의 '행복 기운'이 나에게도 전해진 것이다.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랑이는 또 한 번 오뚝이처럼 가뿐하게 교직이라는 관문을 넘어설 것이란 사실을. 그리고 자신의 씩씩 바이러스, 행복 바이러스를 아이들에게 뿌려댈 것을. 이제 나는 그 새로운 믿음을 품고 교단에서 다시 만날 '이사랑 선생님'을 기다려야겠다.


태그:#용감한 녀석들, #사랑이, #스승과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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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사회과 교사였고, 로스쿨생이었으며, 현재 [법률사무소 이유] 변호사입니다. 무엇보다 초등학생 남매둥이의 '엄마'입니다. 모든 이들의 교육받을 권리, 행복할 권리를 위한 '교육혁명'을 꿈꿉니다. 그것을 위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글을 씁니다. (제보는 쪽지나 yoolawfi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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